77. 도깨비 안경(1)
이재선 부사장은 권선동 사장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네, 이야기는 잘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저쪽도 이런 부정적인 화제로 자신들의 가수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게 부담스럽긴 마찬가지인 터라 생각보다 합의는 쉬웠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합의되었다는 소식에 조금 안심이 되었는지, 권선동 사장은 한결 편해진 얼굴로 이재선 부사장이 앞에 놓아준 물컵을 들어 입을 댔다.
마음이 편해지니 그제야 갈증이 느껴진 탓이다.
이재선 부사장은 물을 다 마시고 물컵을 내려놓은 권선동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제임스를 이대로 계속 회사에 놔두실 겁니까?”
권선동은 이재선 부사장이 왜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에 관한 이야기라서 그런지 쉽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 권선동의 모습에 이재선 부사장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제임스가 본격적으로 회사 일을 맡고 난 후 회사 사정이 많이 나빠졌습니다. 제임스가 담당한 캔디걸에게 들어간 돈이 다른 그룹 데뷔할 때보다 거의 세 배에 가까운 큰 금액이 투자되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런 큰돈을 투자한 캔디걸이 벌어온 돈은 정작 보통 그룹의 절반도 채 안 됩니다.”
“…….”
사장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아버지였기에 아들의 부족한 점을 직접 듣는 것은 나름대로 곤욕이었다.
그랬기에 권선동 사장은 이번에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물고 물컵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재선 부사장은 이왕 꺼낸 이야기를 여기에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혼자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곳도 아니고 JYK랑 척을 지는 행동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저질렀다는 사실은 제임스가 아직 MBT에서 중요한 일을 맡기에는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건의 하나 드린다면… 아직은 회사 일에 나서지 말고 공부에 좀 더 매진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속에만 담아 두었던 어려운 이야기를 드디어 꺼낸 이재선의 얼굴에는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이 잠깐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졌다.
아무리 틀린 이야기가 아니라고 해도 회사 사장의 아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일은 부하 직원으로서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이재선 부사장의 직언을 들은 권선동은 아버지로서 듣고 있기에 힘들었는지 조금 힘들어하는 모습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재선아.”
“…네, 형님.”
진짜 사적인 자리가 아니면 이렇게 반말투로 말하는 법이 없던 권선동이기에 이재선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바짝 긴장했다.
“…내 나이 벌써 60대 후반이다. 내 나이만 생각하면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시간도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되지. 그래서 네게 부탁한다. 우리 동섭이를 잘 챙겨 줘. 내가 이렇게 진심으로 동섭일 부탁할 사람이 너밖에 없단 사실은 너도 잘 알고 있지?”
“…네.”
이렇게 사적인 정까지 끌어다 진지하게 말하는 권선동의 모습에 이재선은 내키진 않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번에 진짜 제대로 가르치도록 하마. 그러니 이번에 들어가는 드라마까지만 기회를 줘라. 만약 이번에도 동섭이가 제대로 일하는 모습 보이지 못하면 그땐 나도 깔끔하게 미련을 버릴 테니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네, 형님.”
“고맙다, 재선아.”
결국은 권선동의 부탁에 알겠다는 대답을 남긴 이재선은 조금 힘이 빠진 모습으로 사장실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권선동 사장은 머릿속이 복잡한지 서랍 속의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자식 농사가 가장 힘들다더니… 이렇게 보면 옛말 중 틀린 말은 하나도 없는 거 같아.”
두 번의 이혼과 세 번의 결혼이라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그에게 제임스 권은 뒤늦게 생긴 정말 소중한 아들이었다.
그래서 너무 애지중지해서 키운 덕분에 고생을 모르고 자란 철부지 같은 녀석이 바로 본인의 아들 권동섭이란 녀석이었다.
아마 이번에도 그런 이유 때문에 사고를 쳤을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작은 사고는 쳤어도 큰 사고는 다행히 치지 않았었다.
자신이 약간의 도움을 준 덕분에 JYK 산하 작곡가 레이블에 선발되어 들어갔고, 그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아들의 앞날이 모두 순조롭게 풀릴 것만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무슨 일인지 아들은 JYK를 박차고 뛰쳐나와 버렸고, 회사에서 제대로 된 일을 해 보겠다며 호기롭게 나서기 시작했다.
아직 경험도 없는 녀석이 바닥에서부터 차곡차곡 일을 배우려 하지 않고 겉멋만 잔뜩 든 소리를 해 대서 실망이었지만, 웬일로 열심히 하려는 의욕적인 모습을 보여 그만 마음이 약해져 버려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허락을 하고야 말았다.
저 정도의 각오라면 만약 실패하더라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거라 잘못된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들은 자신의 바람을 산산이 부숴 버리고 걱정했던 대로 이상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프로듀서로서 무게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얼굴 반반한 년의 치마폭에 휩싸여 제멋대로 일을 처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연경이라는 다이아몬드 원석을 내치는 것까지는 그나마 괜찮았다.
그러나 아들은 자신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기행까지 벌이게 되는데, JYK를 상대로 작업을 건 것이다.
최근 몸이 좋지 못해 회사를 자주 비웠던 덕분에 회사가 아들 멋대로 엉망이 되어 굴러간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엎친 데 덮쳤다는 말처럼 조연경이란 요망한 것이 순진한 아들 몰래 녹음까지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일은 더욱 MBT에게 불리하게 흘러갔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점은 JYK가 뒤쪽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해서는 MBT보다 약한 편이라는 사실이다.
생각해 보면 매우 부럽기도 한 부분이지만, 앞에서 이야기하는 부분과 다르게 남들 모르는 뒤편에서의 작업이 일을 성사시키는 데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는 연예계에서, JYK는 비교적 그런 편법 없이 성공한 몇 안 되는 회사였다.
쉽게 말해, MBT는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PD를 극진히 모시고 비싼 유흥주점에 가 돈을 처발라 가며 로비를 벌여서 일을 따 오지만, 인기 스타가 많은 JYK는 그런 편법보다는 데리고 있는 회사 아티스트들의 인기에 힘입어 일을 따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JYK가 상대였기 때문에 살벌한 연예계 바닥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작업 노하우는 그렇게 보잘것없었다.
그랬기에 어느 정도의 사과를 건네고 앞으로 조연경에 대해 어떤 작업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만으로도 합의를 볼 수가 있었을 것이다.
만약 상대해야 할 회사가 JYK와 같은 거대 기획사 중 다른 회사와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철없는 아들 때문에 자기가 평생을 바쳐 키운 MBT에게 어떤 큰 피해가 생겼을지 감히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였다.
“…후.”
담배를 피우던 권선동 사장은 담배 연기를 사장실 천장을 향해 내뿜었다.
어느새 사장실 안을 가득 메운 연기를 보며 생각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아들이 이쪽 일에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니 이재선 부사장의 말처럼 회사 일에서 손을 떼게 하는 게 맞았다.
그러나 권성동 사장은 차마 그런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기왕지사 이렇게 되었으니 아들이 앞으로 전과 다르게 자신이 이끌어 준 대로 회사 일을 잘해 나가는 모습만 보여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래도 이번에 드라마 투자 건에 관해서는 제법 수완을 발휘했던 아들의 모습을 봤기에 이번만은 자신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해 주길 기도할 뿐이었다.
* * *
직접 작업실로 찾아온 실장님은 나를 보며 기쁜 소식을 전했다.
“이야기는 잘 되었으니 걱정하지 마. 앞으로 MBT에서 연경이에 대해 어떤 짓도 벌이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으니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더 이상 없을 거야.”
조상구 실장님의 말을 들으니 이제야 많이 안심되었다.
“실장님도 고생하셨어요.”
“하하, 그래. 너도 마음고생이 심했지? 앞으로는 그냥 나한테 곧바로 말해. 괜한 마음고생 하지 말고. 어차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너보다는 내가 나서는 게 더 나아.”
“네, 그래야겠네요. 근데, 저는 지금도 이해는 안 돼요. MBT가 왜 그렇게 지저분하게 나왔는지를요.”
“원래 연예계가 그런 곳이야.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순리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보다는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더 많은 곳이 바로 이 바닥이니까.”
실장님의 말을 들으니 곧바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건이 있었다.
“소속사가 재계약을 위해 자기 가수를 협박하는 경우가 파다하다면서요? 최근에 뉴스에 나온 일도 바로 그런 경우잖아요.”
내 말에 실장님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그런 경우가 제법 많지. 내가 아는 어떤 회사는 재계약을 안 하려는 가수에 대해 일부러 안 좋은 기사를 내보내는 경우도 많아. 그리고 출연하던 프로그램도 모두 그만두게 만들어 연예인의 손발을 잘라 버리지.”
“네? 계약 해지 전까지는 자기 가수일 텐데… 도대체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벌이는 거예요?”
“재계약을 안 하려는 가수에게 미리 힘을 과시하려는 거지. 아티스트와 이성적인 협상을 통해 재계약을 맺는 것이 아니라 우리랑 재계약 안 하면 네 앞날이 이렇게 어둡게 변한다는 걸 실제로 느끼게 해 주는 거야. 그래서 많은 연예인이 그런 회사의 횡포가 무서워 재계약을 억지로 맺는 사례도 무척 많아.”
“…정말 무서운 일이네요.”
정말 연예계에 몸담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곳의 어두운 단면을 점점 많이 알게 되는 거 같아 마음이 씁쓸했다.
실장님은 MBT와의 얽힌 일은 이제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일 이야기를 꺼내셨다.
“나 어제 너에게 메시지 받고 깜짝 놀랐어. 갑자기 연기하고 싶다고?”
네가 어제 실장님께 미리 메시지를 보냈었다.
메시지 내용은 ‘연기도 하겠습니다. 실장님도 제가 연기하는 것에 대해 미리 생각해 보세요.’라는 내용이 담긴 메시지였다.
“네.”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기는 전혀 생각이 없던 거 같더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어쩔 수 없이 해야 하… 아니 가수로서 대중에게 더 사랑받으려면 연기를 하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어요. 이세린 선배의 경험담도 들으니 그런 생각이 맞는 거 같기도 하고요.”
자칫하며 말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이런 걸 보면 나는 거짓말을 잘하는 편은 확실히 아닌 거 같았다.
“그래? …뭐 어쨌든 정말 연기를 하겠다는 생각은 맞지?”
“네. 정말 열심히 해 보려고요.”
열심히 하겠다는 내 말이 마음에 드셨는지 실장님은 웃으며 옆에 둔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는 가방 속에서 종이 더미를 한가득 꺼내 내 앞에 놓으셨다.
“지금 회사에 들어온 제안을 전부 정리해서 가지고 왔다. 연기하는 건 결국 네 몫이니까 내 생각에는 네가 직접 여러 제안을 살펴보았으면 좋겠어.”
실장님의 말을 들은 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작품은 이미 정했어요. 물론 실장님의 의견도 듣고 정식으로 출연 결정을 하도록 할 테니 너무 성급한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은 하지 마세요.”
내 말을 들은 실장님은 깜짝 놀라며 내게 물었다.
“뭐? 벌써 정했다고? 어떤 작품인데?”
“제 뮤비 찍어 주신 이진섭 감독님 아시죠? 그분이 이번에 드라마를 만드세요. ‘목소리3’이란 시즌제 드라마죠. 이번에 세 번째 시즌이고요. 가능하면 그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어요.”
다행인지 실장님은 그 드라마를 본 모양이다.
“아, 나도 그 드라마 봤어. 지금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정말 재밌는 드라마였다는 사실만 기억이 나네. 혹시 네가 그 드라마에서 맡을 배역은 알아?”
“네. 조연이에요. 여주인공과 함께 일하는 막내 형사 역할이에요.”
“이야, 이미 자세하게 다 알아봤네. 좋아, 일단 나도 검토할 시간을 줘야 해.”
“당연하죠.”
내 말을 들은 실장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향해 작업실을 떠났다.
본격적으로 ‘목소리3’라는 드라마에 대해 알아보려는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