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도깨비 안경(2)
회사에서는 내 변덕에 가까운 연기를 하겠다는 선언 덕분에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가수로서 승승장구하던 내가 갑자기 연기하겠다고 나섰으니 회사 분들 입장에는 매우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괜한 소란을 일으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성격의 일이었기에 그냥 소란이 어서 사라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소란을 떠는 사람 중에는 우리 회사 대표님인 김진영 형님도 있었다.
본인 역시 연기를 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을 내게 해 주셨다.
“나도 네가 연기에 도전하는 건 길게 봐서는 무조건 찬성이야. 노래도 하고 연기도 하고 다방면에 도전한다면 아티스트로서의 스펙트럼이 더 넓어지는 효과도 분명 있으니까. 그리고 네 얼굴은 노래만 하기에는 조금 아까운 면도 있지. 하지만 말야, 조금 더 있다가 연기하면 안 될까? 연기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야. 그리고 난 네가 아직 노래로서 보여 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돼. 그러니 정규 앨범 하나만 더 내고 잠시 재충전하는 의미에서 연기에 도전해 보는 게 시기상 지금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데… 넌 내 이야기 어떻게 생각해?”
이런 식으로 나를 여러 번 설득하셨지만, 나는 형님에게 미안하게도 내가 처한 사정상 이번에 곧바로 연기에 도전하겠다는 고집 아닌 고집을 부려야만 했다.
결국, 내 황소고집을 꺾지 못한 회사 사람들은 그냥 의견을 존중해 주는 것으로 결정했고, 자연스럽게 회사에서는 출연할 만한 작품을 살피기 시작했다.
내가 이진섭 감독님의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는 의사는 분명하게 밝혔기에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회사 차원에서 작품을 살펴보는 일을 아예 안 하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내가 드라마에 출연하는 일은 점점 기정사실로 되어 실제로 일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 * *
♪♪♩♪
지금 녹음실 안에서는 워너비 걸즈의 레아가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매의 눈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래를 부르는 레아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내가 이렇게 레아를 쳐다보는 이유는 그녀의 노래를 한 음절도 놓치지 않기 위해 고도로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잠깐만, 레아야.”
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생겨 일단 레아의 노래를 중단시켰다.
그리고는 레아를 향해 말했다.
“마지막 소절에서 너무 세게 부르지 마. 세다는 느낌보다는 리듬감 있게 가자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내 물음에 녹음 부스 안의 그녀는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대답했다.
[네, 오빠.]
“오케이, 그럼 다시 한번 가자.”
그렇게 다시 시작된 녹음.
나는 이번에도 정신을 집중해서 레아의 노래를 들었다.
오늘 레아의 컨디션이 내 예상보다 너무 좋았다.
해외 일정을 소화하고 온 레아였기에 컨디션이 좋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걱정을 했었는데, 생각보다 목을 잘 관리한 모양이었다.
그 덕분에 녹음은 내가 예상했던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끝이 날 거 같았다.
내 직업이 가수이자 프로듀서인 관계로 일상 중 가장 많이 반복하는 일이 녹음이었기에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사실 없었다.
그래서 나는 환하게 웃으며 레아를 향해 외쳤다.
“오케이, 끝! 고생했어, 레아야.”
내 말을 들은 레아는 녹음 부스 안에서 두 발을 번쩍 들어 올리며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와아, 만세!]
그리고는 밝게 웃는 얼굴로 부스 밖으로 뛰어나와 나를 향해 다시 인사했다.
“프로듀서님 고생하셨습니다.”
나도 고생한 그녀를 향해 밝게 웃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오늘 너 노래 좋았어. 그래서 네 덕분에 녹음도 생각보다 훨씬 빨리 끝난 거야. 너희 일본 스케줄 갔다 오고 난 뒤 그때는 워너비 걸즈 멤버 모두 다 모여 제대로 녹음해 보자. 알겠지?”
“네!”
신이 나서 인사를 한 후 레아는 녹음실 문을 열고 나갔다.
아무리 빨리 끝났다고는 하지만, 녹음 자체가 매우 피곤한 일이었기에 지금 당장 침대에 몸을 던진 후 푹 쉬고 싶은 바람뿐일 것이다.
레아가 녹음실을 나가자마자 누군가와 마주쳤는지 열린 문틈 사이로 그녀의 인사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뒤 녹음실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우리 회사 대표 김진영 형님이었다.
“녹음 다 끝났다며? 고생했다.”
웃는 얼굴로 녹음실 안으로 들어온 형님은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으며 내게 말했다.
“네, 방금 끝났어요.”
“그럼 이제 오늘은 스케줄 끝났지? 그럼 여기서 나랑 잠시만 이야기 좀 할까?”
“네, 형님.”
우리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 형님이 양손에 들고 온 음료수를 따서 함께 마시며 대화하기 시작했다.
“레아가 오늘 녹음한 게 워너비 걸즈 다음 노래야?”
“네, 맞아요. 일단 대충 뼈대만 만들어 봤어요. 디테일한 작업하기 전에 감부터 확실하게 잡고 싶어서 레아보고 일단 녹음해 보라고 한 거예요.”
“그래? 그럼 가녹음을 마친 소감은 어때? 괜찮은 거 같아?”
“네, 너무 좋아요. 한번 들어 보실래요?”
내 제안에 형님은 손사래를 치며 일어서려던 나를 만류했다.
“지금은 아니야, 앉아. 물론 들어 보고 싶기는 한데… 오늘은 그 일보다는 다른 용건 때문에 온 거니 일단 그 이야기부터 먼저 하자.”
“네.”
조금 진지한 표정을 지은 형님은 이곳에 온 용건을 드디어 꺼냈다.
“네가 출연할 만한 작품을 회사에서 두루두루 살펴봤어. 이제 최종적으로 선택만 하면 될 거 같은데… 중요한 이야기가 될 거 같아 내가 직접 가지고 온 거야.”
녹음을 방금 마친 터라 조금 피곤했지만, 중요한 이야기라는 형님의 이야기에 정신을 가다듬었다.
“여러 제안이 있었는데, 네가 아직 연기를 한 적이 없어서 그런지 괜찮다고 생각되는 제안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어. 실무진들이 아주 엄밀하게 검토해 본 결과 정식으로 제안이 들어온 것 중에는 이 두 가지가 가장 괜찮다는 결론을 내린 거야. 뽑힌 두 작품이 뭔지 네가 직접 확인해 봐.”
형님은 가지고 온 자료를 내게 건넸고, 난 그것을 받아서 읽기 시작했다.
형님이 건넨 자료에는 네가 출연할 만한 두 가지 작품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회사에서 본 장단점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공중파 드라마 하나와 케이블방송국 드라마 한 개야. ‘목소리3’은 네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작품이니 굳이 설명을 안 해도 될 거 같고… 공중파에서 방영되는 미니시리즈 ‘연애할까요?’는 사실 방송국 국장님이 직접 나를 불러 널 출연시켜 달라는 제안을 했던 드라이기도 해.”
형님의 이어진 설명에 따르면 ‘연애할까요?’라는 드라마는 공중파 방송국 국장이 나를 직접 ‘픽’을 했다고 한다.
의외의 일이라 조금 당황스러운 소식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날 좋게 봐 주신 셈이니 고마운 일이기도 했다.
“중국 쪽 투자자가 많이 붙은 드라마라 큰일이 없으면 자연스럽게 중국에서도 방영될 게 확실한 드라마라고 그러더라. 아마 그 말이 맞을 거야. 그럼 이 드라마가 잘 나오면 넌 이 기회를 통해 중국에서 좋은 인지도를 쌓을 계기가 있겠지.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네가 이 드라마를 했으면 싶다.”
형님의 추천은 이 드라마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굳이 형님이 직접 와서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도 형님이 나를 설득해 보려는 목적 때문이라는 것도 지금에야 깨닫게 되었다.
나도 형님이 날 생각해서 이렇게 제안해 주신 거니 가능하면 형님의 말을 따르고 싶었다.
그래서 형님에게 한 가지를 물었다.
“형님, 혹시 그 드라마 제작사에서 보낸 제안서도 있나요?”
“응, 혹시 몰라서 가지고 왔어. 볼래?”
“네.”
난 형님이 건네는 제안서를 받은 후 가방에서 안경 하나를 꺼내서 썼다.
그 모습을 본 형님은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너 갑자기 안경은 왜 써? 눈이 안 좋아?”
이런 질문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이미 예상을 했었기에 난 당황하지 않고 형님에게 대답했다.
“드라마에서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산 안경인데, 어때요? 좀 똑똑해 보이지 않나요?”
내 대답을 들은 형님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똑똑해 보이는 건 잘 모르겠고, 확실히 이상한 놈처럼은 보인다. 너 이럴 때 보면 의외로 바보 같아.”
“흐흐, 진짜 똑똑한 사람은 겉으로 티가 잘 안 나는 법입니다. 그리고 팩폭해서 죄송한데 형님도 공부를 잘했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모든 시험에서 전교 1등을 하진 못하셨죠?”
“…알았다. 입 다물고 가만히 있을 테니까 보던 거나 마저 봐.”
약간의 농담과 더불어 학업 성적 드립으로 내가 안경을 쓰는 이상한 장면은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근데 갑자기 내가 안경을 꺼내 쓴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이 안경이 바로 도깨비님이 내게 선물한 도깨비 안경이라는 이름의 레전더리 아이템이었기 때문이다.
안경을 착용하자마자 처음 이 안경을 썼을 때처럼 눈앞에 난데없이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도깨비 안경을 착용하셨습니다. 이 안경은 확인을 원하는 사물이나 사람의 흥망성쇠를 파악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안경입니다. 혹시 확인하고 싶은 물건이나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그 대상을 2초 이상 바라봐 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도깨비 안경의 안내 글을 보자마자 손에 들고 있는 제안서를 뚫어지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잠시 후 제안서가 살짝 빛나기 시작했다.
【이 서류에 적힌 드라마에 관한 흥망성쇠를 확인하시겠습니까? 만약 그러시다면 ‘네’라고 적힌 버튼을 눌러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참고로 현재 착용자님은 이용권 1장을 소지하고 계십니다. 만약 이번에 흥망성쇠를 알아보는 작업을 이대로 진행하시면 가지고 계신 이용권 1장이 곧바로 소모됩니다. 이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처음 도깨비 안경을 착용하였을 때에는 이용권 2장이 있었다.
아마 도깨님이 내가 사용할 수 있도록 선물해 주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하나는 저번에 ‘목소리3’이란 드라마의 제안서를 확인해 보는 데 사용을 했기에 지금 1장만 남은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 사용하게 되면 가지고 있는 이용권은 다 쓰게 되는 셈이다.
그럼 정작 필요할 땐 어떻게 하냐고?
그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이 된다.
도깨비 안경을 처음 썼을 때 실행한 튜토리얼에 따르면 내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서 선업을 쌓으면 그런 선업들이 모여 새로운 이용권 1장이 생긴다고 한다.
선업을 쌓는 방법은 내가 만든 노래를 듣고 사람들이 행복한 마음을 얻는 거였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이용권이 생길 거라는 설명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나는 한 장 남은 이용권도 아무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네’ 버튼을 누르기 위해 나와 함께 있는 김진영 형님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형님, 죄송한데… 저기 컴퓨터 책상 위에 있는 볼펜 좀 가지고 와 주시면 안 될까요?”
“어, 그래.”
착한 형님은 내 부탁에 곧바로 몸을 움직이셨다.
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눈앞에 만들어진 버튼을 얼른 손가락으로 눌렀다.
찰칵.
그러자, 약하게 빛나던 제안서가 눈이 부실 정도로 강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물론 남의 눈에는 이런 광경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기에 형님과 함께 있는 도중에 도깨비 안경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윽고 사라진 빛.
그리고 들고 있던 제안서에는 은은한 붉은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붉은색이라… 이 작품 했다가는 욕먹겠는데…….’
설명을 들은 바에 따르면 빨간색 빛은 안 좋은 명성을 얻을 경우에 발생한다고 한다.
그러니 이 작품을 했다가는 내 평생을 따라다닐 흑역사 하나가 생성된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면 절대 하지 말아야지. 목소리3은 파란색 빛이었으니 당연히 그 작품은 해야 하고… 그럼 남은 건 어떤 이유를 대야 형님이 내 의견에 옳다고 생각할지 그 이유를 고민하면 되겠네.’
형님은 약간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계셨다.
지금 내게 남은 일은 형님을 어떻게 설득하냐였기에 난 그럴듯한 핑계를 찾기 위해 머릿속 두뇌를 맹렬하게 가동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