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도깨비 안경(3)
오래전부터 도깨비는 부와 명예를 주는 신적인 존재로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내려온 옛이야기 속 도깨비의 모습에서 도깨비가 가진 그런 특징들이 잘 드러나는데, 그 이야기 속 도깨비의 모습이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었는지 도깨비님이 선물한 도깨비 안경 역시 부와 명예를 중심으로 앞날을 예지해 주는 기능을 가졌다.
이미 실행해서 경험해 본 튜토리얼에 따르면, 도깨비 안경으로 사물이나 사람의 흥망성쇠를 살펴보았을 경우 대상에게서 보이는 빛의 색깔로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나타나는 색깔은 총 네 가지 색깔인데, 먼저 황금색 빛이 나타나면 그것은 그 사물이나 사람으로 내가 어떤 일을 도모하면 그 결과로 돈을 벌게 된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리고 밝기가 밝을수록 버는 액수가 커진다고 한다.
다음으로 만약 파란색 빛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좋은 명성을 얻게 된다는 뜻이었다.
결국, 정리하면 파란색과 황금색 빛을 나타내는 사물이나 사람은 내게 좋은 결과를 안겨 주는 존재라는 뜻이 되는데, ‘목소리3’을 도깨비 안경으로 확인해 본 결과 파란색 빛이 생기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목소리3’에 출연한다면 그 결과 좋은 뜻이 담긴 명성을 얻게 된다고 해석하면 아마 정확한 풀이가 될 것이다.
이와 상대적으로 안 좋은 의미를 담고 있는 색깔의 빛도 있었는데, 그 빛깔은 바로 회색빛과 빨간빛이었다.
회색빛과 빨간빛은 앞서 설명한 두 색깔의 빛과 정반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빛이라고 보면 되는데, 회색빛은 금전적으로 큰 손해를 보는 경우를 뜻하고 빨간빛은 안 좋은 의미로 사람들에게 내 이름이 널리 알려진다는 안 좋은 뜻을 담고 있다.
결국, ‘연애할까요?’란 드라마는 도깨비 안경으로 확인한 결과 내가 절대 해서는 안 될 작품이란 결론을 얻게 된 셈이다.
‘분명 어떠한 이유가 있어 이 드라마가 이런 좋지 못한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일 텐데… 도대체 그 이유가 뭘까?’
나는 이 드라마에 출연하지 않을 좋은 핑계를 찾기 위해 손에 들고 있던 제안서를 다시 한번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왜 이 작품이 잘 안 되는지 그 근본적 이유가 될 거라고 보이는 점들을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짐짓 제안서를 꼼꼼히 읽다가 이제야 큰 문제점을 발견한 사람처럼 연기하며 형님에게 말했다.
“형님, 이거… 이 작품은 잘 안 되겠는데요?”
뜬금없는 내 예언에 형님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엉? 갑자기 그게 무슨 황당한 소리야? 이게 왜 잘 안 돼?”
형님의 물음에 나는 제안서를 읽다가 발견한 문제점을 조목조목 설명하기 시작했다.
“연출을 맡은 이분이 예전에 방영되었던 청혼이란 드라마를 연출하신 분이라면서요. 그리고 작가님도 그때 청혼이란 드라마를 직접 쓰신 작가분이고요.”
“맞아, 그 두 사람. 청혼이란 드라마가 정말 잘됐잖아. 그러니 이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하는 이 드라마를 방송국에서 편성한 거지. 근데 이 드라마가 왜 실패해? 히트작을 만들었던 이 두 사람이 다시 손을 잡은 드라마니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정상 아니야? 방금 네 말에 모순이 있는 건 너도 잘 알지?”
내 의견에 반박하는 듯이 말하는 형님의 이야기에 난 고개를 가로저으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전 이 드라마의 연출자와 작가가 이 두 분이란 사실 때문에 불안해졌습니다. 형님 말대로 이전에 만드셨던 청혼이 큰 성공을 거둔 것은 물론 사실이죠. 근데 형님은 기억 안 나십니까? 인기가 많았지만, 그에 따른 혹평도 정말 많이 들었던 드라마가 바로 청혼이란 사실을요.”
실제 청혼이라는 드라마를 보고 욕을 하는 사람이 정말 많았었다.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 무려 우리나라 대표 배우라고 하는 이병한과 전주연이었는데, 드라마를 본 사람들 중 많은 분들이 이 두 사람의 연기력과 매력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다 엉망인 드라마라고 욕을 했었다.
사람들이 청혼이란 드라마에 악평을 단 이유는 간단했다.
드라마의 스토리가 너무 진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출도 엉망이란 평도 많았다.
드라마 속 신들이 과거 히트했던 드라마의 명장면을 그대로 따라 한 티가 너무 많이 났던 것이다.
나 역시 주연 배우 두 명의 명성 때문에 크게 기대하며 드라마를 봤다가 딱 2편까지 보고 더는 보지 않았던 기억이 있었다.
그 이후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계속 인기몰이에는 성공했지만, 그에 따른 악평이 담긴 기사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었다.
그리고 내가 발견한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주연으로 출연하는 민지연이란 배우도 문제가 많은 배우 아닌가요? 얼굴이 예쁜 거는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출연하는 작품마다 연기력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음…….”
형님은 내 물음에 쉽게 입을 여시지 못했다.
내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아마 반론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내 한 가지 반박할 말이 떠올랐는지 나를 보며 이의를 제기했다.
“원래 모든 사람이 만족하고 좋아하는 드라마는 없잖아. 그리고 실패를 통해 배우는 것도 있고. 그러니 연출자랑 작가분도 이번에는 청혼 때와 크게 다르게 만들지 않을까?”
형님이 겨우 찾아낸 반론을 들은 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형님, 여기 적힌 간략한 스토리 보셨잖아요. 사실 이런 진부한 스토리라면 방금 형님이 언급하신 새로운 면모는 더 기대하기가 힘들 거 같은데… 형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끙…….”
제안서에 들어 있던 드라마 시놉시스에는 ‘연애할까요?’라는 드라마가 어떤 이야기를 담을 것인지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간단한 드라마의 줄거리가 적혀 있었다.
“재벌가에서 태어난 철없는 금수저 재벌 3세가 흙수저라 부를 만한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난 여자 주인공의 밝고 귀여운 모습에 빠져 사랑을 나누게 되는 이야기라… 이런 진부한 스토리 라인으로 청혼 때와 크게 달라진 부분이 과연 만들어질까요?”
“…그만하자.”
결국, 나와 의견이 달랐던 형님은 두 손, 두 발을 다 드는 성의까지 보이며 항복을 외치셨다.
‘연애할까요?’란 드라마는 매우 위험한 선택지라는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 셈이었다.
그 이후 형님과 나와의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마침내 내가 ‘목소리3’에 출연하는 데까지 합의를 보게 되었다.
이제 드디어 회사 차원에서는 내가 출연할 작품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 * *
본격적인 촬영에 앞서 해야 할 일이 정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래서 오늘도 드라마 제작실의 불은 매우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꺼지지 않고 언제나처럼 켜져 있었다.
오늘 이곳에서 야근을 하고 있는 사람은 이진섭 감독과 조감독, 그리고 작가 최은희와 방송국 국장인 박철민이었다.
박철민 국장의 경우는 보통 본인이 직접 야근을 하는 경우는 없었지만, 개인적으로 매우 친한 이진섭 감독과 최은희 작가가 사무실에 있었기에 겸사겸사 남은 상황이었다.
이미 나온 대본에 문제가 없는지 마지막으로 점검하던 최은희 작가는,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옆에서 촬영 콘티를 점검하고 있는 이진섭 감독을 향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박상원 씨하고는 이야기가 잘 됐어요?”
최은희가 언급한 박상원은 이서준 때문에 역할이 바뀐 배우의 이름이었다.
이서준에 대한 미련 때문에 캐스팅 작업이 예정보다 많이 늦어진 드라마 제작진은, 어쩔 수 없이 이서준을 포기하고 오디션에서 보고 차선책으로 점찍어 두었던 박상원을 빠르게 캐스팅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이서준이 드라마에 출연하겠다는 의사를 통보해 오면서 이서준 역할에 캐스팅되었던 박상원은 자연스럽게 캐스팅된 배역에서 밀려나 다른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의 입장에는 너무나도 속상하고 분한 일일 수도 있기에 변동된 배역에 관한 제작진의 의사를 전달하는 데 보다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고, 그런 전후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최은희 작가가 걱정했던 일이 잘 해결되었는지를 이진섭 감독에게 물은 것이다.
그녀의 물음에 이진섭 감독이 보고 있던 촬영 콘티 자료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잘됐어. 내가 무릎 꿇고 정말 미안하다며 싹싹 빌었거든. 얼마나 열심히 빌었던지… 덕분에 손금이 희미해질 정도야.”
이진섭 감독의 농담 섞인 답변을 들은 최은희는 그제야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었다.
이진섭 감독이 농담까지 할 정도면 생각보다 수월하게 교통정리가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 역시 편한 마음으로 그의 농담을 받아 줄 수 있었다.
“그래요? 그럼 어디 한번 봐요. 만약 진짜 희미해졌으면 내가 다시 그려 줄게. 그리고 이참에 꼬인 팔자 좀 풀어 보자.”
그녀의 농담을 들은 이진섭은 보고 있던 콘티 자료에서 눈을 떼며 그녀를 보고 발끈하며 따지고 들었다.
“뭐? 최 작가 지금 내 손금 별로라고 말한 거야? 나 손금 좋아. 옛날부터 우리 할머니가 내 손금 보고 나중에 크게 성공할 황금 손금을 타고났다고 하셨단 말이야.”
“호호, 그럼 할머니 말씀이 맞다면 아직까지 때를 못 만난 거네요. 그렇게 좋은 팔자를 지니고 태어난 사람이 10년도 넘게 탄 헌차를 몰고 다닐 리 없잖아요.”
“그렇지. 아직 타고난 운세가 제대로 풀리기 전이지. 아마 이번 드라마를 기점으로 내 깜깜했던 앞날이 환하게 밝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어.”
“어머, 저도 꼭 감독님이 기대한 대로 되었으면 좋겠네요. 정말 그렇게 되면 제 대본이 정말 괜찮았다는 뜻이 되잖아요.”
“흐흐, 그거야 당연하지. 우리 드라마가 잘되는 이유가 바로 최 작가의 대본 덕분인데.”
“호호,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네요.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나도 그래.”
농담 섞인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본 조감독 정진용은 잔뜩 인상 쓴 얼굴로 두 사람에게 잔소리를 던졌다.
“아니 두 분. 지금 시간 없어 죽겠는데, 그렇게 실없는 소리나 하고 있을 겁니까? 오늘 집에 가기 싫어요? 숙직실에 이불 펴 드릴까요?”
서슬 퍼런 조감독의 기세에 장밋빛 미래를 그리던 두 사람은 황급히 다시 하던 일에 매진해야 했다.
“…일합시다, 일.”
“…네, 어서 하죠. 진짜 여기서 잘 수는 없잖아요.”
이 상황을 지켜보던 박철민 국장이 웃으며 감탄했다.
“하하, 드라마 팀의 진짜 실세는 우리 조감독 정진용이었네. 그럼 나도 앞으로는 진용이한테 잘 보여야 하는 거야?”
무표정으로 일하던 정진용은 이번에는 깐죽거리는 박철민 국장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잔소리를 퍼부어 주었다.
“국장님도 시간이 많으신가 보죠? 다른 방송국 직원 대신 남으셨으면 오늘 해야 할 일은 다 끝내고 집으로 가셔야 할 거 아닙니까. 근데 지금 국장님 일하시는 모습을 보니 그러기 힘들 거 같은데… 당직실에 이부자리 봐 드릴까요?”
말투는 공손하지만, 담겨 있는 의미가 살벌한 관계로 깐죽거리던 박철민 국장 역시 보고 있던 서류에 고개를 다시 파묻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