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대본 리딩(1)
다시 모두가 자신이 맡은 일에 매진한 덕분에 사무실에는 침묵만이 가득했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 지난 후 대본을 검토하던 최은희 작가가 가장 먼저 기지개를 피며 외쳤다.
“아이고, 다 했다. 전 끝났어요. 감독님은 멀었어요?”
그녀의 물음에 이진섭 감독 역시 하던 일이 끝났는지 볼펜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도 다 했어.”
결국, 이들은 오늘 해야 할 일을 늦은 밤이 다 되어서야 모두 마칠 수 있었다.
조연출 정진용은 홀가분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과 함께 있는 세 사람을 보며 마지막 잔소리를 던졌다.
“자, 모두 일을 끝마치셨으면 이제 정리하고 집으로 가서 쉬시죠. 그리고 미리 말씀드리지만 출출하시다는 핑계로 삼겹살 가게로 새면 안 됩니다. 내일도 할 일이 태산같이 많다는 사실을 모두 잘 알고 계시죠?”
마지막까지 잔소리를 잊지 않는 그의 모습에 박철민 국장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이야, 진용이 이 자식 잔소리가 우리 마나님보다도 더 심하네. 너 언제부터 이렇게 독하게 변한 거야? 원래는 안 그랬잖아?”
그의 물음에 정진용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게 다 우리 감독님 덕분이죠. 제가 이렇게 확실하게 챙기지 않으면 늘 흘리고 다니시는 게 많은 분이 우리 감독님이시거든요.”
“그럼 우리 순진했던 진용이가 이렇게 무섭게 변한 게 다 우리 이진섭 감독이 칠칠치 못해서 생긴 일이란 뜻이군. 내 말 맞지?”
“바로 그거죠.”
실제로 잘 흘리고 다니는지라 이진섭 감독은 멋쩍은 표정으로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고생을 아는 박철민 국장은 이진섭 감독을 마냥 놀릴 수만은 없었다.
그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근데 우리 감독님이 챙길 게 너무 많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야. 그래서 감독이란 자리가 그렇게 힘든 자리이기도 하고.”
박철민 국장의 말을 듣고 있던 최은희 작가도 동의한다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그렇죠. 감독이란 자리가 원래 모든 걸 다 챙겨야 하는 허드렛일을 하는 자리잖아요. 이쪽에서 일을 안 해 본 사람은 절대 모르는 부분이기도 하고. 감독이라면 손가락 까닥해도 스텝들이 다 해 놓는 줄 아니까. 정말 현장에서 가장 바쁜 사람을 한 명 꼽으라면 전 주저 없이 우리 감독님을 꼽겠어요.”
“그렇지. 최 작가 말이 맞아.”
자신의 노고를 알아주는 사람들의 말을 흐뭇하게 듣고 있던 이진섭은 단 한 가지 사실만 정정하고자 했다.
“제 고생을 알아줘서 너무 고맙네요. 근데 앞으로 며칠 동안 가장 바쁠 사람은 제가 아니라 서준이가 될 거 같네요. 그 녀석 첫 대본 리딩 때까지 제대로 준비하려면 잠도 못 자며 죽어라 연습만 해야 할 텐데… 안 그래요?”
이진섭의 말을 들은 최은희 작가는 잊었던 이서준의 이름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제가 서준 씨의 상황을 잠시 잊고 있었네요. 촬영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 준비한다고 정말 바쁘겠네요. 거기다 연기까지 처음이니… 첫 대본 리딩 때는 아마도 큰 기대를 하면 안 되겠죠?”
그녀의 말에 이지섭 감독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첫 대본 리딩 때는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 주기가 힘들 거야. 시간이 너무 부족하잖아. 서준이가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연기를 처음으로 해 보는 거니 어쩔 수 없겠지. 그래도 상관없으니 실제 촬영 전까지만이라도 어떻게든 감이라도 잡아 줬으면 좋겠는데… 지원을 빵빵하게 해 줄 수 있는 JYK의 역량을 한번 믿어 보자고.”
“그래야겠죠. 이거 서준 씨 때문에 너무 걱정이 많아 자리에 누워도 잠이 안 올 거 같네요. 이럴 때는 소주 딱 한 잔만 먹고 자리에 누우면 그나마 잠이 오겠죠?”
최은희 작가의 말에 일 끝난 후 벌어질 회식만 기다리던 박철민 국장이 반색하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렇지. 이럴 때 소주 한잔 먹어야 잠이 오지. 걱정도 잠시 잊고 말이야. 안 그래?”
일 끝난 후 회식할 핑계를 찾는 두 사람의 콤비 플레이를 본 조감독 정진영은 이번에도 역시 눈을 부라리며 단호하게 외쳤다.
“회식 안 됩니다. 바로 집으로 귀가하십시오.”
은근슬쩍 이서준을 핑계로 삼겹살에 소주 한 잔 먹으려던 두 사람의 꼼수는 깐깐한 조연출 정진용의 철벽 방어 덕분에 시도하자마자 막혀 버렸다.
결국, 박철민은 밤늦게까지 야근을 자원하고도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채 쓸쓸히 집으로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 * *
나는 드라마 촬영까지 며칠 남지 않은 관계로 밤잠도 잊어 가며 연기 연습에 매진해야 했다.
조연급 역할이라 해야 할 대사가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연기 자체를 처음으로 하는 상황이었기에 정말 연습할 것도 많았고 어려웠다.
내가 준비를 제대로 못 갖춘 채 촬영에 들어가면 그런 나로 인해 모든 촬영 일정이 엉망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니 힘들더라도 제대로 준비를 갖춘 채 촬영에 들어가야만 했다.
다행히 회사에서는 제대로 된 연기 선생님을 나에게 붙여 주었다.
연기 고수들이 득실거리는 연극판에서도 연기를 잘하기로 소문난 배우인 오민수 선배님이 내 연기 연습을 도와줄 특급 도우미로 회사에 와 주신 것이다.
이런 엄청난 사람이 나를 도와주기 위해 회사에 오게 된 진짜 이유는 날 보자마자 정색한 얼굴로 당부하는 선배님의 말을 통해 알 게 되었다.
“내가 평생 해 온 일이 연기라서 그런지 연기를 할 때 최선을 다하지 않는 걸 정말 끔찍하게 싫어한다. 그러니 대충하면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지금 머릿속에 갖고 있는 중이라면 지금 말해라. 그런 썩어 빠진 생각으로 하는 연기가 잘될 리가 없으니 너도 괜한 연기 도전 때문에 욕먹을 일 없어져서 좋고, 나도 그런 너 때문에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아도 되니 우리 둘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니냐? 사실 너희 회사 대표가 나와 오래된 친구 관계만 아니라면 내가 마지못해 이곳에 올 일도 분명 없었을 테지만…….”
처음부터 무서운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선배님의 모습 덕분에 나는 바짝 기합이 든 상태로 연습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오민수 선배님과의 연습.
아무래도 연기가 처음이다 보니 큰소리로 혼나야 할 때가 무척 많았다.
“야, 넌 실제로 그렇게 걷니? 평소에도 그렇게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걸어 다니냐 이 말이야?”
이 정도 호통은 애교 수준의 호통이었다.
“힘 빼! 어디서 쓸데없이 무게를 잡고 그래? 정신 똑바로 안 차려?”
욕을 너무 많이 먹어서 멘탈이 살짝 흔들리려고 했던 적도 무척 많았지만 난 최선을 다해 흔들리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연습에 매진했다.
당장 며칠 후면 대본 리딩 현장에 나가야 하는데 여유를 부릴 시간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욕을 들으면 들을수록 오기 같은 것도 생겼다.
내 연기를 보고 혼을 내시는 선배님의 입에서 칭찬 같은 걸 듣고 싶다는 연기 초짜답지 않은 무모한 포부 같은 것이 마음 한구석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최선을 다해 연기 연습에 매진했다.
* * *
작업을 하려던 김진영은 이서준이 걱정되어 제대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하려던 일을 멈추고 이서준이 연기 연습에 빠져 있을 본사 건물 뒤편을 향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혹시 연습에 방해될까 봐 발걸음도 나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걷고 있는데, 마침 휴게실에서 커피를 머그잔에 따르고 있는 친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김진영은 반가운 마음에 친구를 향해 빠르게 다가가 물었다.
“민수야, 커피 마셔?”
그제야 김진영을 발견한 오민수도 반가운 마음에 그에게 물었다.
“너도 커피?”
“좋지.”
두 사람은 그렇게 함께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시던 김진영이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오민수에게 물었다.
“연기 연습은 잘 되어 가?”
그의 물음에 오민수는 그제야 친구가 갑자기 여기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를 깨닫고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너 그게 궁금해서 갑자기 여기에 나타났구나?”
“흐흐, 솔직히 그래. 걱정돼서 일도 잘 안 되더라. 원래 연기를 준비하던 친구가 아닌데 갑자기 드라마에 들어가게 되었거든.”
김진영의 말에 오민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함께 연습해 보니 완전 연기 초보라는 건 바로 알겠더라. 정말 아무것도 몰라. 그래서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야 해서 처음에는 정말 막막했다.”
지금 이서준의 상태가 궁금했던 김진영은 막막했다는 친구에게 다시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그럼 지금은 어때?”
김진영의 물음에 오민수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리고는 기다리고 있던 대답 대신 의외의 질문을 김진영에게 물었다.
“가수도 사실 타고난 사람이 분명 있지?”
“타고난 사람? 물론 있지. …근데 그건 갑자기 왜 물어?”
오민수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걱정 많은 친구를 향해 원하던 대답을 해 주었다.
“서준이가 바로 그래. 그 녀석 연기를 타고 났다. 눈빛이며 목소리가 딱 연기하기 위해 태어난 녀석 같아. 그리고 내 지도를 받아들이는 수준이 거의 스펀지와 같아.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고 했나? 지금 서준이가 딱 그래.”
머릿속에 가득했던 걱정을 한 방에 날려 버리는 친구의 설명에 김진영은 환하게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 정도야? 정말 그 정도로 연기에 소질 있어?”
“그래, 그 정도야. 내가 정말 네 거듭된 부탁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수업이 이런 가수 출신들 연기 봐주는 거였는데… 지금은 내가 진심으로 수업한다. 가르치는 맛이 정말 최고야. 지금까지 진짜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레슨을 해 봤지만, 이런 기분이 드는 건 정말 처음이야. 이건 진심으로 내가 먼저 부탁하는 건데 저 친구 웬만하면 계속 연기 시켜라. 쟤는 연기를 해야 할 친구야.”
극찬이란 표현이 어울릴 정도의 설명이었기에 그 말을 들은 김진영은 너무 기뻤다.
그래서 이곳에 올 때와는 정반대의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의 작업실로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다.
* * *
첫 대본 리딩이 있는 날.
오늘은 ‘목소리3’의 주요 출연진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간단하게 연기를 맞춰 보는 날이었다.
오늘은 가수가 아니라 한 명의 연기자로 처음 공식적인 활동에 참여하는 터라 마치 처음으로 무대를 설 때처럼 많이 긴장한 상태로 방송국에 들어서야 했다.
방송국에 온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방송국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인사하는 거였다.
내가 아직 신인에 가까운 입장이었기에 인사보다 중요한 일은 나에게 없었던 셈이다.
그래서 방송국 곳곳에 내 인사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내 인사를 받는 사람 중 나를 가장 반기며 인사를 받아 준 사람은 역시 날 이곳으로 이끌어 준 이진섭 감독님이었다.
“감독님, 안녕하십니까?”
“아이고, 우리 서준이 왔어? 오늘 너무 긴장하지 말고 잘해. 네가 연기를 처음으로 하는 거고, 준비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사실은 모두 잘 알고 있으니까 너무 큰 부담은 가질 필요 없어. 오늘은 함께 연기할 사람들과 안면 트고 분위기를 느껴보는 정도만 하면 된다는 말이야. 내 말 뜻 잘 알겠지?”
“네, 감독님.”
감독님의 배려 담긴 말에 난 고마움을 느껴야만 했다.
한 시간 정도 일찍 와서 인사를 하며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방송국에 온 ‘목소리3’에 출연하는 배우들을 하나둘씩 만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