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깨비 덕분에 슈퍼스타-81화 (81/189)

81. 대본 리딩(2)

흔히 방송국은 아주 유행에 민감한, 매우 트렌디한 곳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물론 유행에 민감한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유행을 선도하는 곳이 바로 방송국이기도 하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분명 틀린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방송국이나 그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방송국에 대한 이미지를 물으면 의외로 트렌디함과 너무 거리가 먼 느낌의 단어인 보수적이란 단어로 그곳의 분위기를 설명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것은 앞서 설명한 트렌디함과 너무나 이질적인 단어로서 그만큼 방송국은 트렌디함의 대명사와 같은 곳이지만 동시에 그 어떤 곳보다도 보수적인 곳이기도 했다.

그런 방송국의 특성에 대해 나 역시 이제는 어느 정도 파악을 하고 있었기에 그 어느 때보다 예의 바른 모습으로 ‘목소리3’ 출연진을 향해 먼저 깍듯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이명우 역할을 맡게 된 이서준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내 인사를 받는 사람들의 반응은 의외로 다양했다.

“오, 반가워요. 이번에 함께 연기하게 되어서 너무 기쁩니다. 우리 다 같이 파이팅해서 좋은 작품 만들어 봅시다.”

남자 주연 배우인 이진석 님은 인사를 건네는 나를 보고 이렇게 반가워하는 반응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아, 네…….”

여주인공인 이하니 님은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신지 내 인사를 받고는 부끄러우신지 얼굴이 붉게 변하시면서 대회의실 쪽으로 도망치듯 들어가 버렸다.

정말 의외의 반응을 보인 사람도 있었는데, 분명 얼굴은 조금 낯이 익은 분인데, 성함은 잘 모르겠는 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

휙.

그분은 인사하는 날 그저 차갑게 쳐다보더니 아무런 말 없이 그냥 ‘쌩’ 하니 내 옆을 그대로 지나쳐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혹시 모를 오해를 받을까 봐 무명에 가까운 분일수록 더 큰 목소리로 인사한 나로서는 매우 무안해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방금의 난감한 상황이 왜 일어난 건지 아무리 고민해 봐도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이유를 알지 못한 채로 내 인사 시간은 그대로 끝나 버렸다.

“긴장돼?”

방송국 사람들에게 나처럼 인사한다고 잠시 내 옆을 떠났던 실장님이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실장님의 질문에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답했다.

“조금요.”

“후후, 잘할 수 있을 거야. 이번에 너 연습하는 거 내가 옆에서 계속 봤잖아. 그 모든 과정을 다 본 사람으로서 솔직하게 말하면 너 연기 잘해. 그러니 자신감을 가져.”

“네, 알겠습니다. 잘할게요.”

“그래. 파이팅!”

“파이팅!”

어느덧 대본 리딩을 시작할 시간이 가까워져 가고 있었기에 실장님에게 파이팅 포즈까지 취하며 기합을 넣은 나는, 다시 조금씩 긴장되는 기분을 느끼며 대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 * *

드라마를 만들 때 대본 리딩이란 과정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은 아니었다.

그래서 드라마를 제작할 때 대본 리딩 과정을 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의외로 이 과정을 생략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

그럼 대본 리딩을 하게 될 경우 도대체 무엇 이유 때문에 대본 리딩을 하게 될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의외로 홍보 때문이다.

대본 리딩을 한다고 외부에 알려지면 많은 매체에서 취재를 와 주기 때문에 드라마에 대한 홍보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된다.

요즘처럼 홍보가 중요한 시대에 이런 좋은 홍보 수단을 포기할 수 없기에 대본 리딩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를 더 꼽는다면 그건 바로 함께 촬영할 연기자와 제작진이 본격적인 촬영에 앞서 서로 간의 얼굴을 맞대고 친목을 다지는 좋은 사교의 장이 만들어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본 리딩에 참석하는 사람은 크게 나누어 보면 주요 제작진과 주연 배우, 그리고 비중 있는 조연 배우만이 보통 참석해서 실시한다. 대부분의 드라마가 대본 리딩을 실행할 때는 1회에서 2회 정도의 대본만이 나온 상황에서 진행되는 터라 아주 짧은 분량만을 선정해서 대본 리딩 과정을 진행하곤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이 끝나면 어쩌면 대본 리딩을 실행한 진정한 목적이라 할 수 있는 미디어 취재가 자연스럽게 마무리되고 그다음 목적이라 할 수 있는 회식 자리를 가지게 된다.

결국, 보통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대본 리딩 과정을 하는 이유인 연기 연습을 위해서 대본 리딩을 시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목소리3’ 팀의 대본 리딩의 분위기는 다른 드라마에서 실행하는 대본 리딩 현장의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그리고 그런 차이점이 생겨난 이유는 감독인 이진섭에게 있었다.

이진섭 감독은 대본 리딩에 앞서 참여하는 배우들에게 실제 촬영 현장과 같은 수준의 연기를 해 달라고 미리 부탁을 했었다.

좋은 드라마 신을 만들기 위해 배우들 간의 조합을 조금이라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럴까?

지금 방송국 대회의실에서 실행되고 있는 대본 리딩 현장의 분위기는 다른 곳의 대본 리딩 현장과 비교해 매우 진지했다.

배우들 역시 목소리로만 연기하고 있지만, 거의 실전에 가까울 정도로 열연하며 대본을 리딩하고 있었다.

“소리가 들렸어요. 뭔가를 사고파는 듯한 소리가요. 그리고… 아, 아이들의 목소리도 많이 들렸어요.”

“뭐? 아이들 목소리? …그리고 뭔가를 사고파는 소리가 들렸다라… 야, 조 형사. 서울에서 유치원생들이 야외 활동 가기 좋은 공원이 어디가 있지?”

“그렇게 따지면 범위가 너무 넓습니다.”

“거기다가 공원 바로 옆에 시장이나 상점이 많은 곳만 추려 내면 되잖아.”

“아, 그러면 범위가 많이 좁혀지겠네요. 그럼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서둘러. 시간 없어.”

“네.”

‘목소리3’의 대본을 맡은 최은희 작가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배우들이 연기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글자들이 이 배우들의 몸을 통해 실제로 구현되는 장면은 작가로서 아직 초보라고 할 수 있는 그녀에게는 너무나 꿈만 같이 황홀한 순간이었다.

단지 목소리 연기일 뿐이지만, 열심히 연기하는 배우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녀.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이동하다가 어느 한 곳에서 순간 멈춰서 움직일 줄 몰랐다.

최은희 작가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사람은 바로 이서준이었다.

그녀가 지금 이서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배우들을 지켜보던 이유와 크게 달랐다.

그녀가 다른 배우들을 볼 때는 그 배우들이 자신의 상상 속에서만 살고 있던 드라마 속 인물들을 어떻게 구현해 내는지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지켜봤다면, 이서준은 그와 다르게 오늘 이 자리에서 자신이 맡은 배역을 제대로 표현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담긴 시선이었다.

‘서준 씨, 제발 잘해라.’

속으로 이제 자신의 차례가 되어 대본 리딩에 참여할 이서준을 향해 몇 번이고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는 있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걱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초조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걱정하던 이서준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특수 사건 전담반에 새로 배치된 신입 형사로서 여주인공인 이하니와 함께 범행 현장에 와 범인의 흔적을 찾는 장면이었다.

“명우야, 아무거나 만지지 말고 조심해서 둘러봐. 뭐 이상한 거 발견하면 바로 나 부르고. 알았지?”

이하니의 대사가 끝나고 처음으로 이서준이 대사를 칠 순간이 되었다.

순간 이서준은 진짜 최은희가 바라는 것처럼 순수하고 매사에 열심히 임하는 신입 형사가 된 것처럼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옛썰! 강 선배의 말씀처럼 현장을 조심해서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막내, 출동!”

목소리만 들어도 ‘귀엽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제대로 이명우를 연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그다음 대사는 제대로 압권이었다.

이서준이 연기해야 할 대사는 자신을 어리고 어리숙하게만 보는 강선영 형사에게 자신 역시 남자라는 사실을 제대로 보여 주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한 대사였다.

이 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너무 남자다우면 안 된다는 점이었다.

이서준이 맡은 캐릭터 자체가 각종 강력 범죄들을 전담하는 특수팀에서는 볼 수 없는 신선하고 순수함을 표현하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첫눈에 반한 선배 여형사에게 남자로 보이고 싶지만, 나이나 경력 때문에 태생적인 어설픔을 감추지 못하고 드러내는 역할이라 그런 부분이 얼마나 제대로 표현되는지가 가장 중요했다.

극 중 강선영 형사의 지시대로 움직이려던 이서준, 아니 이명우는 갑자기 움직이던 발걸음을 멈추고 강선영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 그리고 선배도 수상한 사람 보이면 혼자 움직이지 말고 저를 곧바로 부르세요. 제가 보기엔 약해 보여도 의외로 진짜 통뼈거든요. 경찰 대학에서도 격투 수업에서 항상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사람이 바로 접니다. 선배의 안전은 제가 책임질 테니 항상 든든한 보디가드와 같은 후배 이명우를 잊지 말아 주세요.”

이서준의 대사가 끝나자 대본 리딩 현장의 분위기가 순간 변하였다.

말은 안 했지만, 이곳에 있는 많은 사람이 초짜 연기자인 이서준에 대한 큰 걱정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그러나 실제로 이서준의 연기를 보게 되니 그런 예상과 다르게 너무 잘해서 모두 놀란 상황이었다.

그중 가장 많이 놀란 사람인 최은희 작가는 진심으로 탄복했다.

‘내가 이서준 씨를 보고 생각한 게 틀리지 않았어. 바로 이런 부분 때문에 이 남자를 애타게 기다린 거였어.’

새삼스럽게 이진섭 감독의 눈썰미에 다시 탄복하게 되는 최은희였다.

* * *

대본 리딩이 끝나고 회식 자리가 이어졌다.

다른 때 같으면 해야 할 일이 많은 관계로 회식은 빠질 수도 있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좋은 연기를 보여서 그랬을까?

이서준은 이 자리 저 자리 불려 다니며 열심히 사람들이 주는 소주를 받아 마시느라 평소와 다르게 만취했다.

만취한 이서준은 집에 가지 않고 자신을 기다려 준 조상구 실장 덕분에 편하게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운전하던 조상구 실장은 눈이 풀린 채로 옆좌석에 앉아 있는 이서준을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오늘 잘했다고 들었어. 수고했어.”

아무리 취했어도 이서준은 자신의 칭찬하는 소리는 제대로 들리는지 조상구의 말에 곧바로 반응했다.

“저 잘했다고 그래요? 정말요?”

“후후, 그래 모두가 너 잘했다고 그러더라. 아마 연기가 처음인 네가 제대로 할 건지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지. 넌 오늘 그 사람들의 걱정을 연기로 단숨에 날려 버린 거고.”

조상우의 말을 듣고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 이서준도 사실 내심 느끼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연기자분들과 저 사이에 큰 벽이 있었던 거 같았어요. 특별히 저에게만 다르게 하시지는 않았던 거 같던데, 이상하게 그런 느낌이 있더라고요. 그게 과연 뭐였을 까요?”

“아마, 텃세 같은 거 아닐까? 아무래도 넌 그 사람들 입장에는 외부인이니까. 지금도 그렇게 느껴?”

“아뇨. 신기한 건 회식 자리에서는 그런 느낌이 거짓말 같이 사라졌다는 거예요. 훨씬 살갑게 느껴지더라고요. 특별히 달라진 건 정말 모르겠는데… 정말 신기하죠?”

“하하하, 네가 연기를 제대로 해서 그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불안감이 사라져서 그런 느낌이 든 걸 거야. 앞으로도 잘하면 이젠 완전히 그런 거 못 느끼게 되겠지. 연습 열심히 해.”

조상구 실장의 말에 술 취한 눈으로 주먹까지 쥐며 다짐하는 이서준이었다.

“그럼 당연하죠. 안 하면 안 했지. 하면 또 제가 제대로 해내는 놈 아닙니까? 실제 촬영장에서도 진짜 제대로 연기하는 모습 보여 드릴 테니 기대해 주세요.”

술기운에 힘껏 들어 올린 손이 스르르 내려가는 모습을 본 조상구는 너무 웃음이 나와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결국, 잠이 들어 버린 이서준의 얼굴은 마치 막냇동생처럼 귀여웠기에 운전하는 조상구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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