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촬영 시작
본격적인 드라마 촬영 시작을 앞둔 나의 하루 일과는 전과 비교해서 매우 바빠졌다.
우선 하루의 시작은 언제나 연기 연습이었다.
오전 9시부터 시작되는 연기 연습은 저녁 식사 바로 직전까지 쭉 이어졌다.
순수하게 연기 연습에 매진하는 시간이 무려 8시간이 넘었기에 매우 타이트한 수업 과정이라 볼 수 있었다.
“아니, 천천히 말하라고 했지, 느리게 말하라고 했어? 지금보다는 빠르게 해. 너 평소에 말할 때 이렇게 안 하잖아. 기본은 실제 생활에 그리고 20% 정도만 연기를 섞으라고 몇 번이나 말해? 그리고 발음 조심하고. 고개는 더 들고. 시청자분들이 네 눈을 봐야 할 거 아니야.”
이 정도 호통 섞인 지도는 거의 일상이었다.
“손은 왜 그러고 있어? 그런 어정쩡한 자세로 TV에 나올 거야? 네 팬들도 지금 네 모습 보면 무조건 병신 같다고 웃겠다. 지금 내 자세가 얼마나 우스운지 내가 직접 찍어서 보여 줄까? 그래 네가 직접 봐라. 그래야 지금 네 모습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제대로 깨닫지.”
이런 독설이 난무하는 수업을 무려 8시간 넘게 하는 셈이다.
수업할 때면 언제나 한결같이 엄격한 모습으로 수업하는 호랑이 연기 선생님이 바로 내 연기 스승인 오민수 선배님이었다.
오민수 선배님과 함께 하는 빡센 수업을 끝내고 나면 나는 어느새 파김치가 되어 늘어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몸이 축 늘어진 채로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고 나면 이번에는 나는 본연의 자리로 돌아와 음악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사실 회사에서는 연기를 준비하는 동안은 음악 활동을 잠시 쉬라고 권유했지만, 내가 워낙 좋아하는 일이다 보니 연기라는 무서운 짐에서 해방되는 밤에는 어느새 나도 모르게 건반을 치거나 기타를 잡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게 바로 내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음악 작업을 하다가 10시가 되면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한다.
회사와 숙소가 바로 옆이라 잠시 뒤 집에 도착한 나는, 우선 씻고 잠시 숙소 정리를 한 후 11시가 되면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는 아침 7시까지 쭉 자는데, 예전과 비교하면 매우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예전에 작업할 때는 작업이 잘되냐 못되냐에 따라 필 받으면 밤을 새워 가며 내키는 대로 일하곤 했는데, 드라마 촬영이란 것이 심하면 이틀 이상 잠도 못 자고 촬영해야 하는 고된 일이라는 오민수 선배님의 설명에 따라 내 일상을 규칙적으로 바꾼 것이다.
체력적으로 준비가 안 되면 절대 좋은 연기를 할 수 없다는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촬영 전까지 규칙적인 생활로 잠을 충분히 자면서 체력을 비축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나는 본격적인 촬영에 앞서 만반의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 * *
MBT 엔터테인먼트의 사장실.
이곳에는 사장 권선동과 아들 제임스 권이 오랜만에 소파에 마주 보며 앉아 공적인 회사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버지, 이민규 섭외에 성공했습니다.”
“오, 그래?”
권선동 사장은 모처럼 아들에게 듣는 반가운 소식에 크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섭외한 거냐? 전에 출연 제안했을 때 분명 스케줄이 겹친다며 출연이 힘들겠다는 대답을 들었던 거 같은데…….”
권성동 사장의 물음에 제임스 권은 자랑하는 듯한 표정으로 섭외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저랑 친하거든요. 미국에서 처음 만나서 한국에 와서도 가끔 보고 그랬어요. 그래서 개인적인 친분으로 그냥 불도저처럼 밀어붙였죠. 그랬더니 원래 있던 스케줄을 조정하며 제 제안을 들어주더라고요.”
“그렇지. 우리가 하는 일이 원래 그렇게 무식하게 힘으로 밀어붙여야 잘될 때가 있어. 아주 잘했네. 잘했어.”
한국에 와서 사고만 치던 아들이 오랜만에 제대로 된 큰일을 해냈기에 권선동 사장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이내 한 가지 걱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근데 말이야… 그 친구 최근에 안 좋은 소문이 들리는 거 같던데… 성추행 사건이 있지 않았어?”
아버지가 걱정하는 게 무언지 바로 알아들은 제임스 권은 재빨리 입을 열어 상황을 설명했다.
“아, 그건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소문대로 작은 문제가 있긴 있었는데… 그건 악의적인 목적을 가진 여자가 작업을 건 거였습니다. 처음부터 헛수작이어서 문제가 더 커질 위험도 없고요. 그러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제임스 권에게서 설명을 들었지만, 여전히 의심하는 권선동 사장.
“…정말이야?”
“네. 정말입니다. 제가 직접 다 확인했습니다. 그러니 믿으셔도 됩니다.”
제임스 권의 거듭된 설명을 들은 권선동은 그제야 안심하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아들을 흐뭇하게 쳐다봤다.
“잘했다.”
“네, 사장님.”
회사에서 업무적인 일로 보는 자리라 권선동 사장의 말에 제임스 권은 여전히 공적인 말투로 대답하고 있었다.
권선동 사장은 그런 아들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어느새 인자한 아버지의 얼굴로 아들 제임스 권에게 말했다.
“지금은 사장이 아니라 네 아빠로서 말하는 거야. 그러니 너도 편하게 말해도 돼. 아들, 정말 고생했어.”
“…나 이번에는 제대로 한 거 맞지?”
“그럼, 제대로 했지.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해 줘. 아빠가 정말 부탁한다.”
“알았어, 아빠. 염려하지 마.”
오랜만에 부자간의 훈훈한 대화를 마친 제임스 권은, 사장실을 빠져나와 자신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지하로 향했다.
지하 주차장에서 멋진 자태를 뽐내며 서 있는 제임스 권의 스포츠카에는 이상하게도 이미 한 사람이 탄 채 제임스 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자신의 차 앞에 도달한 제임스 권은 주인도 없는 차에 타고 있는 사람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자신 역시 차에 탔다.
왜냐하면, 차에 타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의 정체가 바로 자신과 사귀고 있는 캔디걸의 리더인 세진이었기 때문이다.
권선동 사장이 이들의 사이를 눈치채고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중이었기에 두 사람은 이렇게 몰래 숨어서 만나고 있었다.
“오빠, 잘하고 왔어?”
차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세진의 물음에 제임스 권은 으스대는 얼굴로 대답했다.
“당연히 잘하고 왔지. 내가 할 때는 정말 제대로 하는 스타일 아니냐?”
“맞지, 맞지. 우리 오빠가 일하면 아주 잘하지. 사장님도 무척 좋아하시지?”
“그럼 우리 꼰대가 엄청 좋아하지. 사실 이민규가 한 인기 하는 배우잖아. 해외에도 팬이 많고. 그 정도 인물을 남주로 딱 섭외해 왔는데, 어떻게 우리 꼰대가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어? 내가 이민규 물어 왔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입이 그대로 쫙 찢어지며 좋아하더라. 이제 방송국에 들어가서 가오 좀 잡으시겠지. 그리고 머릿속으로 계산기 두들겨 보면 이제 투자한 돈이 몇 배로 커진다는 계산이 서니까 기분도 좋을 테고. 안 그래?”
“맞아, 맞아. 히히.”
큰일을 해낸 성취감 덕분에 스포츠카 안에 함께 있는 남녀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화기애애할 수밖에 없었다.
흐뭇한 미소를 짓던 세진은 문득 생각이 났는지 제임스 권에게 다시 물었다.
“근데 오빠, 뒤탈 없이 잘 해결된 거 맞지?”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며 물어보는지 바로 알아들은 제임스 권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럼, 잘 해결했지. 혹시 몰라 적당히 겁도 줬으니 절대 그년이 딴 맘 먹지 못할 거야. 그리고 막말로 그년이 받아 처먹은 돈이 얼마냐? 처음부터 돈 노리고 그 지랄을 떨었을 텐데, 원하는 돈 손에 쥐여 주었으니 바라던 목적은 이미 달성한 거 아니야? 그러니 그년도 아무 불만 없을 거야.”
“…그건 그렇겠지. 아무튼 고생했어. 이제 드라마만 방영되면 분명 이쪽이 그냥 압승할 거야. 진짜 오빠가 바라는 대로 말이야.”
“…그렇게 되어야지. 내가 들인 돈과 시간이 얼만데…….”
사실 제임스 권이 공석이었던 남자 주인공 자리에 이민규를 꽂아 넣은 것은 이서준에 대한 반발심이 작용한 결과물이었다.
조연경 때문에 한번 크게 부딪쳤던 두 사람.
그 결과 제임스 권은 아버지 잘 만나서 능력도 없는 주제에 회사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는 천둥벌거숭이라는 부끄러운 별명이 생기고 말았다.
만회가 필요한 시점에 좋은 기회를 노리던 제임스 권에게도 제때 역전의 발판이 만들어졌다.
이서준이 출연한다고 전해진 ‘목소리3’과 MBT가 심혈을 기울여 투자까지 한 ‘연애할까요?’가 동 시간대에 방영될 거 같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이다.
그 사실을 안 제임스 권은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공석인 남자 주인공을 직접 섭외하기 위해 노력했다.
원래 드라마가 잘되기 위해서는 배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로서는 누구도 인정할만한 좋은 배우를 남자 주인공 자리에 꽂아 넣는 것이야말로 이서준이 출연하는 드라마를 처참하게 뭉갤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섭외는 의외로 잘되지 않았다.
시기와 때가 잘 맞지 않은 탓이었다.
소위 잘 나간다는 배우들은 이미 1년 이상의 스케줄이 이미 빡빡하게 잡혀 있는 상황이라 원하던 거물급 배우의 섭외는 계속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때 들은 소식 한 가지.
그건 여자를 밝히기로 소문난 이민규가 제 버릇 버리지 못하고 클럽에서 만난 여자를 추행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원래 이민규는 미국에 있을 때부터 아무도 모르게 나쁜 짓도 함께 하면서 어울려 놀았던 형이었기에, 제임스 권은 곧바로 곤란한 상황에 빠진 이민규에게 접근했다.
그래서 이민규가 한 짓을 함께 수습하는 정성을 그에게 보였다.
곤란한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준 것에 대한 고마움도 있었고, 더불어 자신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일을 제임스 권이 모조리 알아 버렸기 때문에 이민규는 제임스 권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미 짜여진 스케줄까지 대대적으로 수정하며 ‘연예할까요?’에 출연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제대로 쓴맛 좀 봐야지. 원래 이 바닥이 이렇게 계속 잘 나갈 수만은 없는 곳이잖아. 안 그래?”
“그럼 그렇지. 그리고 오빠, 나 그 드라마 OST 부르게 해 준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지?”
“알았으니까 그만 이야기해. 그리고 미리미리 노래 연습 좀 해 놓고. 너 노래 못 부르면 그냥 내가 욕먹는 거야. 알겠어?”
“알고 있어 오빠. 그래서 내가 요즘 얼마나 열심히 연습하는 줄 알아? 걱정 말고 제대로 일이나 성사시켜 줘.”
어느새 떨어질 콩고물까지 신경 쓰는 두 사람이었다.
* * *
촬영은 시작되었다.
처음 해 보는 촬영이라 너무 긴장되었지만, 나는 어느새 적응해 가고 있었다.
감독님이나 다른 배우분들의 반응을 보면 나름 순조롭게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서준아, 잘했어. 그냥 이 느낌 그대로 앞 신 따자. 오케이?”
“네, 감독님.”
실제 촬영에 들어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NG를 많이 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컸는데, 의외로 난 NG를 거의 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스텝들도 나를 더 살갑게 대하는 거 같았다.
타이트한 촬영 스케줄에 배우가 NG 내는 걸 현장에서는 제일 싫어한다고 했던 오민수 스승님의 말이 옳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