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드라마 방영(1)
새벽까지 이어진 촬영.
나는 여주인공인 이하니 선배님과 함께하는 신을 찍기 위해 촬영 준비에 한창이었다.
이진섭 감독님은 이번 신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는지 본 촬영에 앞서 나에게 오셔서 내가 이번에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를 한참 동안 설명하고 계셨다.
“자, 서준아. 이명우가 어떤 친구인지는 네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제 역할이니까 당연히 그렇죠.”
“그럼 이번 신이 이 드라마에서 얼마나 중요한 신인지도 네가 알아야 해. 너도 알다시피 우리 드라마는 사랑 이야기가 주가 되는 멜로드라마가 아니야. 근데, 이번 신은 전체 드라마 신 중 몇 안 되는 로맨스 신이지. 그래서 더 중요한 거야.”
감독님은 어느새 나에게 강의를 하는 선생님처럼 이번 신이 가진 의미에 관해 장황하게 설명하고 계셨다.
“난 사랑만큼 보편성을 띤 감정은 없다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우리 드라마가 서스펜스에 범죄 활극이라고 해도 이런 신이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거지. 모든 이야기에 사랑이 빠질 수는 없으니까.”
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서 그런지 서론도 그 어느 때보다 길었다.
“강선영이란 여주인공은 상처를 감추고 사는 인물이야. 그리고 그 상처는 사랑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생겨난 상처고. 그러면 그런 상처들은 어떤 방식으로 치유해야 할까?”
“…다른 사랑으로?”
“그렇지. 바로 그거야. 그래서 드라마에서는 세 가지 사랑이 주인공 강선영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게 되는 거야. 난 이런 따뜻한 모습을 시청자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
이 이야기는 감독님이 아주 자주 하시는 말씀인 관계로 방금 이야기한 세 가지 사랑이 무엇인지 나는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감독님이 말씀하신 여주인공 강선영을 따뜻하게 감싸 줄 세 가지 사랑이란 다음과 같다.
먼저 첫 번째로 우리 드라마에 담길 사랑은 함께 고생하는 동료들 간의 끈끈한 인간미 넘치는 사랑이었다.
팀이란 조직으로 얽힌 인간군상들이 서로에게 힘이 되어 함께 범인을 잡는 과정에서 여주인공 강선영은 잊었던 사람의 정을 다시 느끼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자신과 비슷한 상처를 가진 남자 주인공인 장진욱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고독하고 쓸쓸한 사랑이었다.
남자 주인공 장진욱 역시 가슴 속에 큰 상처를 가지고 있어 그로 인해 미친 듯이 범인을 쫓고 있는데, 상처를 가진 사람이란 공통점 때문에 강선영은 장진욱에게 큰 연민과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마치 거울과 같은 서로를 바라보며 자신의 상처를 깨닫고 치유하고자 하는 의지를 다지게 되는 게 이 드라마 속에 담긴 가장 중요한 멜로 라인인데, 이 멜로 라인은 시즌 1부터 시작되어 이번에 만들어지고 있는 시즌 3에서도 변함없이 등장했다.
그리고 마지막 사랑은 남자 주인공 장진욱과 정반대의 캐릭터인 이명우, 즉 내가 맡은 배역이 표현하는 사랑이다.
이명우는 특수 범죄 수사반에 배치되어 강선영과 함께 일하다 보니 저절로 그녀를 좋아하게 되는데, 나는 그런 이명우의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잘 표현할 의무가 있었다.
감독님은 무지막지하고 잔인한 범죄를 소재로 한 드라마인 ‘목소리3’이 시청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전체 내용 중 5%도 되지 않은 이 인간적인 사랑이 담긴 내용이 우리 드라마를 보시는 분들에게 제대로 전달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계셨다.
어쩌면 날 그렇게 캐스팅하고 싶으셨던 이유도 바로 이명우의 순수한 사랑을 표현하는 데 나만 한 인물이 없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중요한 내용을 표현할 신이라서 그런지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설명하고 계셨다.
“무거우면 안 돼. 그리고 너무 가볍지도 않게. …내 설명이 너무 어렵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미안해하는 감독님을 향해 난 환한 미소와 함께 기대하고 계실 만한 대답을 해 드렸다.
“아니요. 충분히 이해는 됐습니다. 물론 제가 제대로 표현할지는 장담 못 드리지만요. 일단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드셨는지 그제야 조금 웃으시는 감독님이었다.
“오케이. 알았어. 일단 해 보고 어려우면 그때 좀 더 구체적으로 디렉팅해 줄게. 알겠지?”
“넵.”
드디어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갔다.
이하니 선배님과 나는 어느새 친해져 서로에 대한 호칭을 편하게 부르는 사이로 발전했다.
“누나, 이 정도 속도로 걸을까? 어때?”
“좋아, 그 정도 속도가 딱이겠다.”
“오케이. 그럼 걷는 속도는 이 정도로 할게.”
촬영 시 움직일 동선은 물론이고 걷는 속도까지 맞출 정도로 우리는 디테일에 신경 썼다.
그래야 실수를 줄이고 빠르게 촬영을 마무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힘든 드라마 촬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촬영 시간을 줄이는 일이었다.
어느새 모든 준비가 완벽히 끝나고 모두가 기다리던 촬영에 들어갔다.
“레뒤~ 액션!”
감독의 촬영 시작 신호를 들은 우리는, 천천히 정해 놓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범인을 운 좋게 만났지만 놓치고 돌아오는 길이라 그 어느 때보다도 울적한 기분을 표현해야 하는 장면이었다.
절뚝절뚝.
범인과 조우한 덕분에 살벌한 추격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추격전에서 여주인공 강선영은 다리에 부상을 입었고, 그 때문에 지금 절뚝거리며 걷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우연히 발견한 뒤 절뚝거리는 강선영의 앞으로 가 그대로 앉았다.
그 모습을 본 강선영은 의아한 눈으로 나에게 물었다.
“너 갑자기 왜 이래?”
“왜 이러긴요, 선배 지금 다리 아프잖아요. 제가 일단 업어 줄 테니까 업혀요. 병원으로 바로 갑시다.”
내 말을 들은 강선영은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는 듯이 강한 거부 의사를 표시하며 사색이 된 얼굴로 말했다.
“아냐, 난 괜찮아. 그러니 절대로 이럴 필요 없어. 내 발로 병원까지 충분히 걸어갈 수 있으니까 어서 일어서.”
그러나 난 그런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그대로 그녀의 팔을 붙잡고 단숨에 업어 버렸다.
의외로 가벼운 그녀는 나의 예상 못 한 동작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내 등에 업혀야만 했다.
그 때문에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내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야, 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어서 안 내려? 너 계속 이러면 나 화낸다.”
나는 정색하며 말하는 선배의 말을 듣고도 오히려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네, 그냥 혼날게요. 나중에 선배가 분이 풀릴 때까지 뺨을 치시든 발로 차시든 그냥 다 몸으로 때우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그냥 업혀 계세요. 상처 덧나기 전에 빨리 병원에 가야 하잖아요.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가며 내일 아침이 되어서야 병원에 도착하겠네요.”
“아니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 넌 어떻게 된 녀석이… 선배 말도 안 듣고 네 마음대로 하는 거야…….”
귀여운 얼굴의 후배가 갑자기 남자답게 강하게 나오자 내리라고 말하던 강선영은 오히려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이며 말이 점점 없어졌다.
아마 조금 당황스럽고 부끄러운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런 강선영의 반응이 귀엽다는 생각이 든 나는 혼자 해맑게 웃으며 다시 그녀에게 말했다.
“네, 선배님. 말을 듣지 않아 죄송합니다. 이것도 일단 계산해 두셨다가 나중에 저 혼내실 때 더 혼내십시오. 알겠죠? 자, 그럼 일단 병원으로 빨리 가겠습니다. 많이 흔들릴지도 모르니 제 목을 꽉 잡아 주십시오. 자, 출발합니다.”
나는 강선영을 업은 채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 감독님의 목소리가 촬영장 전체가 울릴 정도로 크게 들렸다.
“컷! 좋았어!”
감독님 목소리를 들어보니 방금 촬영이 마음에 드신 것 같았다.
연기하는 내 입장에는 이것보다 듣기 좋은 말이 없었다.
“너무 좋았어요. 두 사람 다 고생했어. 자, 그럼 현장 정리합시다. 오늘 촬영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진짜 끝!”
“와아아아!”
감독님의 오늘 촬영 종료 선언에 스텝들은 모두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다음으로 단 한 번에 촬영을 끝내 준 나와 이하니 선배를 향한 칭찬의 말이 사방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니 씨, 잘했어. 그리고 서준 씨도 너무 잘했어. 두 사람 다 어쩜 그렇게 연기를 잘해? 이거 그냥 단번에 오케이가 나오네. 정말 최고야.”
“맞아. 특히 서준 씨는 아직까지 NG 한 번 제대로 낸 적이 없는 거 같은데… 내 말 맞지?”
“그럼 맞지. 요즘 서준 씨가 스텝 사이에서 뭐라고 불리는 줄 알아? 연기 기계야. 감독님이 그냥 액션만 외치면 그냥 원하는 대로 연기가 쫙 하고 나오잖아.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다른 분들도 우리 서준 씨처럼 준비 잘해 와서 바로바로 오케이 사인 나왔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럼 집에 있는 토끼 같은 내 새끼들과 저녁 같이 먹을 수 있는 기적과 같은 일이 생길 거 아니야.”
온통 칭찬뿐이라 조금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부끄러워하는 나를 대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이하니 누나가 갑자기 나를 향해 사과했다.
“나 업는다고 힘들었지? 내가 생각보다 무겁거든. 네가 진짜 힘들었을 거야.”
누나의 말을 들은 나는 일부러 놀리기 위해 장난을 섞어 대답했다.
“어쩐지 다리가 계속 후들거려 죽을 뻔했네요. 감독님한테 누나가 너무 무거워서 업는 신은 다신 못 하겠다고 미리 말씀드려야겠어요.”
내 농담을 들은 누나는 어느새 노려보는 표정을 지으며 타박했다.
“뭐? 너 고생 많이 한 거 같아, 나중에 먹으려고 차에 둔 맛있는 김밥이라도 줄려고 했는데, 내가 괜한 생각을 했구나. 그냥 살이나 더 찌개 나 혼자 먹어야겠어.”
그 말을 들은 난 곧바로 빠른 태세 전환을 번개처럼 시전했다.
“누나, 차가 어디에 있어요? 자, 업히세요. 제가 다시 차까지 업어 드릴게요. 아까 업었는데 너무 가벼워서 순간적으로 안 업은 거 같아 헷갈렸어요. 정말 깃털같이 가벼웠거든요. 오늘 촬영하신다고 고생이 많으셨으니 제가 손수 업어서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누나는 그런 날 밀치며 자신의 차를 향해 걸어가셨다.
“저리 비켜. 너 진짜 간사하구나. 뭐 준다니 말 바꾸는 게 완전 선수야 선수.”
“헤헤헤, 배가 고파서요. 그럼 누나 뒤를 따라가서 얼마나 맛있는 김밥이기에 우리 누나가 그렇게 칭찬을 하시는지 직접 먹어 보며 확인해 볼까요?”
“어머, 누가 준대?”
“네, 우리 착하고 예쁜 누나가 귀여운 동생에게 김밥을 주신다고 하네요. 자, 가시죠. 제가 옆에서 에스코트하겠습니다.”
촬영이 생각보다 빨리 마무리가 되어서 연기자들 역시 스텝들만큼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러고 보면 ‘목소리3’ 촬영장은 항상 이렇게 분위기가 좋았던 거 같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이런 기대를 가지며 걸었다.
‘이렇게 좋은 분위기 속에서 계속 촬영하면 도깨비 안경이 예언한 것처럼 좋은 성과가 반드시 따라올 거 같아. 앞으로도 열심히 하자.’
그렇게 다짐하며 나는 하니 선배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 * *
주말 오후 9시 30분.
이 시간은 각각의 방송국에서 심혈을 기울인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이었다.
‘목소리3’ 역시 이 시간대에 방영이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연애할까요?’란 드라마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처음으로 방영이 되게 되었다.
한마디로 제대로 맞붙었다고 볼 수가 있는데, 많은 방송인들은 두 드라마의 대결에 관심을 가졌다.
왜냐하면, 최근 케이블 방송국에 뺏긴 드라마 왕국이란 별칭을 공중파 드라마인 ‘연애할까요?’가 다시 되찾아 올 수 있을지가 걸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