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드라마 대박 행진(1)
“오늘 어쨌든 오빠가 우리 집에 왔잖아. 오빠도 손님이니까 오늘은 네가 양보 좀 해 줘. 그러면 나도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를게. 예를 들어 네가 내 옷 중에 가장 좋아하는 치마를 1주일 입도록 허락해 주는 거지. 어때? 생각 있어?”
언니의 파격적인 제안을 들은 이예지의 눈은 놀라움에 커졌다.
옷을 좋아하는 언니가 자신의 최애 옷을 입도록 허락하겠다는 말은 평상시에는 절대 들을 수 없는 놀라운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만큼 매력적인 제의이기도 했다.
“1주일? …2주일이면 안 돼?”
슬쩍 기간을 늘리려는 동생을 보며 이혜지는 단호하게 말했다.
“2주? 협상 결렬이야. 그냥 우리가 다른 TV로 볼게. TV가 좀 작지만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너 앞으로 내 옷 손대면 그땐 진짜 죽음이야. 알겠어?”
예상을 웃도는 언니의 강경 발언에 겁을 먹은 이혜지는 얼른 꼬리를 내리며 결렬 직전의 협상을 다시 살렸다.
“아, 아니야, 언니. 내가 잠시 헛소리를 했어. 나 진심으로 콜, 콜이야.”
동생의 말에 살짝 의심의 눈초리로 물어보는 언니.
“…진짜?”
“응, 나중에 내가 다시 보기로 볼게. 우리 민규 오빠가 나오는 드라마는 꼭 본방 사수를 하겠다는 나 혼자만의 약속을 못 지켜 매우 아쉽지만, 언니의 치마를 입기 위해서는 그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지.”
“좋아, 그럼 협상 성립이다.”
“오케이.”
보고자 하는 드라마의 기호 차이로 인한 갈등은 그렇게 극적으로 해결되었다.
자매간의 원만한 합의로 인해 의견 차이를 극복했기에 세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좋은 분위기로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물론 맛있는 치킨과 맥주가 배달되었다는 사실도 좋은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
‘목소리3’의 5번째 이야기가 방영되기 시작하자 어느새 세 사람 모두가 말을 잃은 채 드라마에 쏙 빠져들었다.
1회부터 이 드라마를 계속 보고 있었던 김남호, 이혜지 커플은 물론이고 앞 이야기를 전혀 모르는 이예지조차 박진감 넘치게 전개되는 드라마 속에 폭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간혹 몰입이 깨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앞서 방영된 이야기를 전혀 못 봐 자세한 이야기를 전혀 모르는 이예지의 질문 때문이었다.
“쟤는 도대체 누구야?”
“어머, 저 사람 왜 저래?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저렇게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거야?”
이런 질문들이 계속 이어져 짜증이 날 만도 했지만, 언니인 이혜지는 그런 동생에 질문에 하나, 하나 다 대답해 주었다.
그런 친절한 언니 덕분에 이예지는 앞의 내용이 잘 몰라도 어느 정도 드라마 속 이야기를 따라가며 ‘목소리3’이란 드라마를 즐겁게 시청할 수 있었다.
드라마를 재밌게 보던 세 사람이 동시에 감탄을 터뜨린 순간도 있었다.
그 장면은 바로 이서준이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등장하자마자 얼굴부터 남다른 그의 모습에 순수하게 감탄했기 때문이다.
“어머, 존잘~~ 우리 오빠 사람이야, 요정이야?”
“헉, 나도 남자지만 바로 인정. 이서준 화면발 겁나게 잘 받네.”
두 사람의 반응처럼 원래 팬도 아니었던 이예지의 반응 역시 심상치 않았다.
더군다나 이예지는 원래부터 동 시간대 방영되는 상대 드라마인 ‘연애할까요?’의 남자 주인공인 이민규의 팬이었는데, 이서준을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설레는 걸 느끼게 되어 속으로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서준이 우리 민규 오빠만큼 잘 생겼다니…….”
이예지의 혼잣말을 들은 이혜지는, 동생을 향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추궁했다.
“솔직히 말해 봐. 우리 민규 오빠만큼이 아니라. 우리 민규 오빠보다 더 잘 생겼다가 진짜 네 속마음 아니야?”
“…….”
정곡을 찌르는 언니의 말에 이예지는 묵비권을 행사하며 오랜 시간 팬이었던 이민규와의 의리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어느덧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서 정신없이 보던 드라마가 결국 끝이 났다.
드라마가 끝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세 사람은 동시에 탄성을 터뜨렸다.
재밌는 드라마를 더 보지 못한다는 안타까운 마음 때문에 표출된 탄성이었다.
“와아, 벌써 끝이야?”
“안 돼! 여기서 끝나면 다음 내용 궁금해서 미칠 거 같단 말이야. 내일까지 도대체 어떻게 기다리냐고~~”
“와, 이거 정말 재밌네. 근데 이거 영화 아니야? 진짜 드라마야?”
모두 드라마가 너무 재밌게 봤기 때문에 드라마가 끝난 후 세 사람은 남은 음식과 술을 먹으며 기분 좋게 여운을 즐길 수 있었다.
술을 술잔에 따라 놓고 드라마 본다고 마시는 걸 잊어버렸기에 술잔 속의 맥주는 김이 빠져 버린 상황이었다.
밍밍한 맥주를 한 모금 마신 이예지는, 갑자기 언니 이혜지를 향해 결연한 눈빛으로 선언했다.
“언니, 나 결심했어.”
“엉? 결심? 무슨 결심?”
“나 오늘부터 서준 오빠 팬 할 거야. 민규 오빠 버리고 서준 오빠에게 넘어갈래.”
“뭐? 진짜? 정말 진심이야?”
자신의 동생이 아이돌 가수 출신인 배우 이민규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아는 언니였기에, 동생의 갑작스러운 폭탄선언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동생 이예지는 자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연예인을 바꾸게 된 이유를 언니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번 드라마 의리로 보고 있었거든. 1화하고 2화까지는 제법 재미있었는데… 딱 거기까지더라. 맨날 민지연하고 만났다가 헤어지고, 그리고 다시 만나고… 뭐 이런 것만 계속 반복이었어. 내용이 없다는 말이지. 그러니 봐도 사실 오빠 보는 재미 말고는 재미를 전혀 못 느꼈어.”
동생의 푸념을 들은 언니 이혜지도 적극적으로 동생의 말에 동의했다.
왜냐하면, 그녀 역시 호기심 때문에 ‘연애할까요?’를 다시 보기로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맞아. 나도 그 드라마가 조금 봐서 잘 알아. 거기 감독이랑 작가는 저번 드라마에서도 그렇게 맨날 헤어지고 만나고를 반복했잖아. 이번에도 그걸 반복하는 걸 보니 그렇게 하면 시청자들이 더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있나 봐. 그리고 드라마 속에서 ppl은 왜 그렇게 많이 나오냐? 그것도 앞뒤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장면에서 말이야. 아주 맥락을 도통 신경을 안 쓰더라. 남주가 여주랑 헤어져서 슬픈데 갑자기 새로 산 냉장고 기능 확인하며 감탄하는 장면을 본 시청자 중 누가 그 드라마에 몰입할 수 있겠어?”
이혜지의 지적처럼 ‘연애할까요?’는 투자를 많이 받은 드라마라서 그런지 ppl처럼 보이는 장면이 너무도 많이 나왔다.
요즘은 그런 드라마 속 광고를 시청자들이 단박에 알아차렸기 때문에 너무 많이 들어갈 경우 드라마에 몰입하기가 힘들었다.
‘연애할까요?’를 시청하는 시청자들 역시 그런 부분을 많이 지적했는데,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솔직히 그렇긴 하지. 나도 민규 오빠 안 나왔으면 절대로 안 봤을 드라마야. 그리고 여주인공은 어때? 여주 민지연은 이번에도 역시나 발로 연기하고 있잖아. 그 정도 연기자 생활했으면 이제는 좀 잘할 때도 되지 않았나? 중요한 장면에서 민지연이 대사만 치면 그냥 바로 ‘확’하고 깬다니까…….”
예쁜 얼굴 외에는 다른 장점이 전혀 없는 여주인공 역시 드라마가 서서히 인기를 잃어 가는 데 크게 일조하고 있었다.
아무튼, 초반 인기몰이에 성공했던 ‘연애할까요?’는 초반의 기세를 살리지 못하고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고, 이에 다르게 ‘목소리3’은 재밌는 이야기에 연기자들의 훌륭한 연기력으로 인해 서서히 인기몰이를 시작하고 있었다.
게다가 ‘목소리3’에 출연한 이서준 덕분에 드라마의 반응은 더욱 뜨거워지려고 하고 있었다.
* * *
한 번도 해 본 적 없던 연기를 시작한 이후로 내 하루 일과는 전과 비교해서 많이 달라졌다.
전에는 거의 작업실에서 작업만 하는 생활이 주였다면 지금은 촬영 때문에 작업실 밖에 나가 있는 경우가 더욱 많아졌다.
그러나 연기 시작 전과 후를 비교했을 때 단 하나의 스케줄은 절대 달라지지 않았는데, 그것은 바로 ‘토크 버스킹’에 출연하는 스케줄이었다.
나는 토크 버스킹이란 프로그램에 1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여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노래를 불러 줄 가수로 출연했었는데, 지금은 그때와 비교해 프로그램 내용상의 역할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는 어엿한 진행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다 정확히 설명하면 메인 진행자인 제영이 형님을 보조하는 보조 진행자가 지금의 내 역할이라고 볼 수 있었다.
프로그램 녹화 시작 시간이 아직 많이 남은 관계로 나는 내 밴에서 대기하며 쉬고 있었다.
그때, 제영이 형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내 밴 근처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황급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형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형님, 안녕하세요.”
“그래, 서준아. 반가워. 근데 안녕은 못 하다. 정말 큰일이 생겼거든,”
큰일이 생겼다는 형님의 말에 나는 놀라며 걱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큰일이요? 무슨 안 좋은 일 생겼나요?”
“그래, 아주 안 좋은 일이 생겼지. 오늘 녹화가 안 될 거 같거든.”
“네?”
녹화가 안 될 거 같다는 형님의 말에 나는 다시 깜짝 놀랐다.
녹화를 할 수 없을 만한 일이 생겼다면 그건 정말 큰일이 생긴 것이 맞았기 때문이다.
덩달아 심각해진 나는 형님에게 녹화가 힘들어진 이유에 관해 물었다.
“형님, 도대체 어떤 일 때문에 갑자기 녹화가 힘들어진 건가요?”
내 물음에 형님은 나를 빤히 응시하시며 대답했다.
“너 때문에 그래.”
형님의 말에 나는 다시 화들짝 놀랐다.
아니 나 때문에 녹화를 못 하게 되었다니…….
도통 이해가 가질 않는 말이었다.
“저 때문에요?”
“그래, 너 때문에.”
도대체 이유를 알아챌 수 없는 형님의 말 때문에 내 표정은 더욱 심각하게 변했다.
그런 내 모습이 조금 웃겼을까?
진지한 얼굴로 나를 보던 형님이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크, 짜식, 놀라긴. 장난이다. 물론 너 때문에 촬영이 힘들어진 건 사실이고.”
형님이 날 놀린 이유는 토크 버스킹 촬영장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모였기 때문이다.
대다수가 나를 보러 온 팬들이었기에 형님은 그걸 구실로 나를 놀렸다.
그리고 형님의 설명을 들어 보니 나 때문에 프로그램의 녹화가 힘들다는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저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 앉힐래? 그리고 우리 프로그램 특성상 오늘 프로그램 주제와 관련된 사연을 가진 분과 토크도 해야 하는데… 그분들이 네 팬들 때문에 프로그램에 참여를 못 할 지경이다.”
이것 또한 형님의 말이 맞았다.
토크 버스킹은 일반인 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중요한데 나를 보러 온 팬들만 가득 앉아 있다면 그건 토크 버스킹이 아니라 그냥 내 팬미팅 현장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쩌죠? 형님.”
형님은 내 물음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쩌긴 네가 해결해야지.”
“…그러고 싶은데 방법을 잘 모르겠네요.”
고민하는 나를 보며 형님은 웃으며 다시 말했다.
“이미 해결하고 있어.”
“누가요?”
“누구긴 누구야 네 매니저지. 조상구 실장님이지. 그분이 네 회사 식구들 잔뜩 데리고 와서 네 팬들 통제하고 있더라.”
“그래요?”
형님의 말을 듣고 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현장 근처로 갔다.
직접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내 실수였다.
스텝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우리 회사 직원분들로 보이는 사람들의 통제를 따르던 팬분들이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흥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꺄아악!
괴성과 같은 소리를 듣고 나는 곧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