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드라마 대박 행진(4)
음식 세팅이 끝나고 세 사람은 맥주를 시원하게 따 버렸다.
일단 차가운 맥주로 목을 축이며 드라마의 시작을 기다릴 셈이었다.
“자, 건배.”
“크크, 제일 어린 녀석이 건배가 뭐냐, 건배가.”
“그럼 뭐라고 해?”
“요즘 이런 거 많이 하잖아, 기숙사!”
“기숙사? 그건 또 뭐야?”
동생 이예지의 물음에 언니 이혜지는 웃으며 대답했다.
“크크, 기분 좋게! 숙취 없게! 사이좋게!”
“에이, 그게 뭐야? 더 틀 같아.”
옆에서 웃으며 대화하는 자매의 모습을 보고 있던 김남호도 궁금한 게 생겼는지 이예지를 보며 물었다.
“근데 방금 말한 틀은 또 뭐야?”
“오빠, 틀이란 말도 몰라? 요즘 나이 든 사람을 틀이라고 부르잖아. 오빠, 이런 말도 모르면 오빠도 그냥 틀이 되는 거야. 그러니 공부해.”
이예지가 자신을 틀이라고 놀리자 김남호는 발끈하며 항변했다.
“에이, 그건 아니다. 내가 나이가 몇인데 틀이라고 그러냐? 20대 중반을 보고 틀이라고 하는 건 정말 아니지.”
“흐흐, 오빤 신체 나이가 틀이 아니라, 정신 연령이 틀이야. 그러니 그런 말도 모르지.”
이야기가 갑자기 이상한데 흐르고 있었지만, 그냥 아무 대화나 주고받는 지금이 좋았다.
굳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고자 모인 것도 아니니 그냥 즐거운 분위기면 충분했다.
맥주 한 모금과 동생이 사 온 보쌈을 야무지게 한 쌈 싸 먹은 이혜지는, 맛있는 음식 덕분에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는지 옆에서 부지런히 쌈을 싸고 있는 동생에게 물었다.
“근데 너 ‘목소리3’ 볼 거지? 또 저번처럼 ‘연애할까요?’ 보자고 하면 안 된다.”
언니의 말에 동생 이예지는 억울한 듯 펄쩍 뛰며 말했다.
“언니, 도대체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나 목소리로 노선 갈아탄 지 꽤 됐어. 그리고 요즘 같은 시기에 내가 제정신이면 그 드라마를 보고 싶겠어?”
옆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가 또다시 궁금증이 생긴 김남호는 그 즉시 물었다.
“요즘 같은 시기? 요즘이 어때서 그래?”
이혜지는 질문한 자신의 남자 친구를 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해 주었다.
“오빠, 뉴스 안 봐? 요즘 이민규 때문에 난리잖아.”
“이민규? …아, 알겠다. 걔 최근 클럽 성추행 기사 떴었잖아.”
“맞아. 그거 때문에 이민규 이미지 완전 떡락이야. 걔 이제 완전히 끝난 거 같아.”
언니의 말에 분개한 표정을 짓던 이예지도 가세했다.
“나도 완전 동감. 난 지금까지 그 자식 좋아했던 세월이 얼마냐? 내 인생 허비한 거야. 내가 진짜 눈이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전자발찌를 찰 놈을 좋아할 수 있어? 나처럼 눈이 이상해서 그 녀석 좋아했던 팬들은 이번에 그놈한테 느낀 배신감 때문에 이민규란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 거야.”
이민규는 최근 클럽에서 성추행을 저질렀다는 기사로 인해 이미지가 급격하게 나빠졌다.
피해 여성이 개인 SNS에 성추행과 관련된 글을 올렸고, 그 글을 본 기자가 재빨리 기사를 내면서 사람들이 그 사건에 대해 알아 버린 탓이다.
화제가 된 피해 여성의 글은 빠르게 삭제가 되었고, 관련 기사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는 정정 기사 또한 빠르게 나갔지만, 이민규에 대한 여론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또 다른 피해 여성이 자신의 SNS에 자기 또한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면서 이민규가 진짜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것이다.
한 번은 모르지만, 연이어 등장한 피해자의 글.
그리고 이민규를 따라다니는 루머와 과거의 행적에 대해서 재조명되면서 그에 관한 여론은 급격히 나빠졌다.
엎친 데 덮친다고 했던가?
함께 ‘연애할까요?’에 출연하고 있는 민지연이 갑자기 의미심장한 글을 자신의 개인 SNS에 올렸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라…….
앞으로는 조심해서 살아가길…….
이 글을 무슨 의미에서 쓴 건지, 그리고 누구에게 쓴 글인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었지만, 글에 담긴 뉘앙스나 글을 올린 시기를 따져 봤을 때 사고를 친 이민규를 향한 불편한 심사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글이라는 추측이 가장 많았다.
민지연의 글 또한 다시 화제가 되자 민지연은 문제의 글을 곧바로 내렸고, 소속사에서는 그런 의미로 올린 글이 아니라는 해명까지 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보쌈을 맛있게 먹던 이예지는 문득 생각이 났는지 자신의 언니에게 재밌게 본 영상 하나를 급히 소개했다.
“언니, 민지연 연기 3종 세트 영상 봤어?”
“응? 민지연 연기 3종 세트? 아니, 못 봤어.”
“내가 보여 줄까?”
“응, 그래.”
이예지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언니와 김남호에게 재밌는 영상 하나를 곧바로 재생시켜 주었다.
이예지가 보여 주는 영상은 민지연이 이번에 출연한 ‘연애할까요?’라는 드라마에서 보여 줬던 감정 연기 장면을 모아서 편집한 영상이었다.
민지연이 드라마 속에서 연기한 감정 신들 위주로 편집된 영상이었는데, 분노, 슬픔, 기쁨 등 다양한 감정을 그녀가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영상이었다.
“엉? 이게 뭐야? 개 웃기네. 하하하.”
영상을 보고 있던 이혜지는 다 보지도 않았는데, 웃음을 참기 힘들었는지 갑자기 박장대소했다.
조금 전 이예지가 이 영상을 웃긴 영상이라고 소개했던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는데, 영상 속 민지연은 다양한 감정을 연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장면에서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돌 출신으로서는 드물게 많은 드라마에 모습을 드러냈던 그녀였지만, 출연하는 작품마다 연기력 논란이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이유를 단박에 알 수 있는 영상이었다.
이 영상을 만든 사람 역시 민지연의 부족한 연기력을 지적하기 위해 이 영상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상을 다 본 이혜지는, 이제는 웃기기보다는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이예지에게 말했다.
“와아, 얘도 진짜 심하네. 출연한 드라마가 몇 편인데 아직도 이러냐? 내가 연기해도 민지연보다는 잘하겠다. 슬플 때나 기쁠 때 등 다양한 상황인데도 표정은 그냥 하나잖아. 이 정도면 연기하지 않아야 하는 거 아냐?”
“히히, 그지? 나도 완전 동감. 근데 재밌지? 난 이거 볼 때마다 너무 웃겨서 죽을 거 같아.”
“웃기긴 정말 웃기네.”
어쩌면 ‘연애할까요?’가 계속 시청률이 떨어지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주연 배우들이 이렇게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기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거나 슬픈 장면을 연기했는데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웃는 웃픈 상황도 생기게 되니, 그런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가 잘되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어? 시간 됐다.”
“맞네. 야, TV 켜.”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덧 기다리던 드라마가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이예지는 언니의 말처럼 부리나케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휴~, 다행이다. 이제 시작이야.”
혹시나 이미 시작한 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TV를 켜니 드라마는 지금 막 시작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어느새 집중하며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헉, 저 사람이 저기서 왜 나와?”
저번 주 마지막 장면에서 진짜 살인범의 정체를 다음 회에 알려 줄 것처럼 하면서 끝이 났는데, 전혀 예상 못 한 인물이 살인범처럼 나와 집중해서 보고 있던 이혜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예지는 그런 언니를 째려보며 타박했다.
“좀 조용히 봐라, 언니야. 언니가 떠드는 바람에 몰입이 깨지잖아.”
“아, 미안. 나도 너무 놀래서 그래. 조심할게.”
다시 집중하는 세 사람.
드라마는 중반을 넘어 끝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기에 더 눈을 뗄 수 없는 장면의 연속이었다.
요즘 이명우 역으로 엄청나게 인기를 끌고 있는 이서준이 등장한 장면.
여주인공 강선영은 이명우와 함께 살인범을 알아낼 결정적인 단서를 찾을 장소에 도착했다.
빠른 수색을 위해 나중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지는 두 사람.
이제 여주인공 강선영은 결정적인 단서를 찾을 방에 등장했다.
그리고 결정적 단서와 함께 깨닫게 되는 진실.
범인은 놀랍게도 두 명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뒤를 쫓는 강선영의 존재를 깨달은 두 사람은 강선영을 조용히 처리하기 위해 이곳에서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었다.
죽음의 위기에 처한 강선영을 구하기 위해 갑자기 등장하는 이명우.
이명우는 위험에 처한 강선영을 구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범인들과 싸웠다.
범인과 죽음을 건 혈투를 하는 중에도 이명우는 강선영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선배, 가요! 일단 밖으로 도망쳐요! 어서!”
그러나 이명우 혼자만을 두고 갈 수 없었던 강선영은 그의 말을 거절했다.
“너 혼자 두 사람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일단 내가 한 명을 막아 볼 테니 네가 한 사람을 빨리 제압해!”
강선영의 말을 들은 이명우는 고개를 저었다.
잠시 상대해 본 결과 자신은 저들 중 한 명도 이겨 낼 자신이 없었다.
남자인 자신도 그런데 여자인 강선영은 절대 상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 이명우는 기지를 발휘해서 강선영을 밖으로 내보내고 문을 잠가 버렸다.
“야, 너 지금 뭐 해? 어서 문 열어! 어서!”
강선영은 안타까운 마음에 문을 두드렸지만, 굳은 결심을 한 이명우가 문을 열어 줄 리가 만무했다.
결국, 동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강선영은 황급히 움직였고, 괴력의 범인 두 사람을 혼자서 막으려던 이명우는 범인이 들고 있던 칼에 찔려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드라마를 보고 있던 이혜지, 이예지 자매는 이미 펑펑 울면서 드라마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잉, 우리 오빠 어떡해? 이대로 죽는 거야? 안 돼!”
“흑흑, 죽으면 안 돼요. 제발 살아 주세요, 제발!”
이명우를 처리한 두 명의 범인은 사라진 강선영을 찾기 위해 황급히 움직였고,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이명우는 제발 강선영이 무사하기만을 바라며 죽어 갔다.
“…선, 선… 배 뛰어… 요, 제발…….”
어느덧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걸 깨달은 이명우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짝사랑했던 강선영을 걱정했다.
“…많이 우… 웃으며… 살았으면 조… 좋겠어… 요, 선배… 는 웃을 때… 진짜 예… 쁘거든… 요.”
이 말을 끝으로 이명우의 고개를 힘없이 떨궈졌다.
* * *
작업실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내 스타일리스트 은비와 매니저 찬식이가 작업실로 들어왔다.
“오빠, 뭐 해요?”
은비의 물음에 난 힘없이 대답했다.
“그냥 있어. 그냥 멍 때리며.”
그런 내 모습이 이상했는지 은비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살피며 말했다.
“우리 이서준 씨가 도대체 왜 이럴까? 항상 씩씩하고 파이팅이 넘치던 사람인데… 어디 아파요?”
은비의 물음에 난 힘을 내어 답했다.
“아니,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이렇게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를 알고 있는 찬식이는, 걱정하는 은비를 향해 나 대신 설명을 시작했다.
“형, 지금 후유증을 앓고 계신 거야.”
“후유증? 무슨 후유증?”
“얼마 전에 촬영이 끝났잖아. 맡았던 배역 때문에 지금 정신을 못 차리셔.”
“아, 그랬구나. 이건 약도 없는데…….”
은비 역시 다른 연예인과 일해 본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 내 상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나는 지금 조금 힘이 빠진 상황이다.
왜냐하면, 내가 맡은 이명우가 드라마상에서 죽게 되었고, 나는 그 모습을 연기했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너무 힘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