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결과가 나왔다(2)
별로 좋지 않은 이유로 대중의 관심을 받은 민지연은, 결국 캐나다까지 날아간 MBT 엔터테인먼트의 이재선 부사장의 손을 잡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화가 폭발해 절대 해서는 안 될 극단적 행동을 하였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차분히 생각해 보니 자신 역시 잃을 것이 상당히 많았기에, 그녀는 이재선 부사장이 내미는 손을 마다하지 못하고 잡았을 것이다.
그녀가 돌아오자마자 다시 시작된 드라마 촬영.
어찌어찌 갈등은 봉합되는 듯했고 촬영은 속행되었지만, 당연히 현장의 분위기는 매우 좋지 못했다.
상황상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촬영은 해야 했기에 그냥 불만은 속에 담으며 묵묵히 남은 촬영을 해 나갈 뿐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촬영된 드라마가 시청자들의 사랑을 다시 찾아올 리 만무했다.
결국, 야심 차게 시작한 16부작 미니시리즈 ‘연애할까요?’는 2%대의 저조한 시청률을 마지막으로 남기며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와 다르게 맞상대를 펼쳤던 ‘목소리3’은 많은 사람의 예상을 깨고 마지막 회의 시청률이 무려 31%를 기록하는 쾌거를 이루게 된다.
출연진 중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이서준이 이야기 전개상 범인에게 살해를 당해 더는 출연할 수 없었다는 우려를 뛰어넘어 케이블 드라마 사상 최고 시청률을 다시 한번 갱신한 것이다.
이런 사실만 봐도 이 드라마가 단지 스타 한 명 덕분에 시청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외 탄탄한 이야기, 훌륭한 연출 등 많은 부분에서 시청자들을 매료시켰다는 걸 잘 알 수 있었다.
드라마가 끝나고 ‘목소리3’은 가수 이서준이 아니라 배우 이서준의 재발견이라는 가장 큰 업적을 이루었고, 그 외에도 이진섭 감독이라는 신인 감독의 엄청난 연출력과 최은희 작가라는 신예 작가를 다시 한번 재조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연기에 매진해 왔던 중견 배우들 역시 그들의 뛰어난 연기력에 대해 다시 한번 찬사를 보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오늘은 무척 바쁜 날이었다.
우선 오전에 광고 촬영이 있었고, 그다음으로는 첫 팬 미팅이 예정되어 있었다.
6개월 계약에 5억이라는 엄청난 금액으로 자동차 광고를 찍었지만, 그것보다 나를 설레게 하는 일정은 팬 미팅이었다.
연예인이 되고 처음으로 갖는 팬 미팅이라 그 어느 때보다 무척 긴장되고 또한 흥분이 생겼다.
어느덧 내 공식 팬 사이트 회원 수가 30만 명이 넘어가고 있었는데, 실제 나를 좋아해 주시는 팬들을 직접 보지는 못해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러나 팬 미팅은 그런 팬들 다수를 처음으로 보게 되는 자리였으니 나로서는 기대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덧 팬 미팅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스타, 이서준 씨입니다.”
우와아아.
사회자의 소개에 따라 내가 무대에 등장하자마자 체조경기장을 가득 메운 팬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정말 태어나서 처음 겪어 본 엄청난 함성이었는데, 단지 그 소리만 듣고도 너무나 짜릿한 기분이 들어 온몸의 털이란 털은 죄다 서는 거 같았다.
그래서 그랬는지 팬 미팅 첫 순서인 내 히트곡 메들리 공연에서 나는, 그 어느 공연보다 더 열성적으로 노래했다.
길었던 메들리 노래가 끝난 뒤 가수 생활 중 처음으로 힘들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내가 얼마나 혼신의 힘을 다해서 노래를 불렀는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노래가 끝난 후 두 번째 순서는 나와 관련된 퀴즈를 풀어 보는 순서였다.
우승자는 무대에 올라와 나와 인사하고 사진도 찍는 코너였는데, 보고 있는 나의 눈이 놀라움에 점점 커지고 말았다.
본인인 나조차도 헷갈리는 내 신변잡기에 관한 것들을 이분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건지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우승자는 놀랍게도 남자분이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분이었는데, 내 노래를 정말 좋아해서 내 팬이 되셨다고 한다.
악수와 함께 간단히 포옹까지 해 드렸는데, 갑자기 우는 바람에 난 당황하고 말았다.
설마…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처럼 날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겁이 나서 내색을 하진 못했다.
다음 순서는 팬들이 나에게 묻고 싶은 질문들을 모아 사회자가 물으면 내가 대답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는 팬들이 내가 불러 줬으면 좋겠다고 말한 노래 중 가장 많이 나왔던 베스트 5 중에 내가 한 곡을 정해 불러 주는 코너였다.
나는 5곡 중에 1위로 언급되었던 ‘바람의 기억’을 오랜만에 불렀다.
예전부터 많은 분이 내가 너튜브에 가장 처음으로 올렸던 ‘바람의 기억’을 다시 듣고 싶다는 요청을 해 왔다는 걸 알기에 선곡한 노래였다.
진짜 오랜만에 이 노래를 불러 봤는데, 팬들도 듣기 좋았는지 노래가 끝난 후 열화와 같은 함성을 다시 질러 주셨다.
팬 미팅은 그렇게 끝나고 이어진 스케줄은, 팬 미팅장을 찾아 준 팬 중 특별하게 선정된 300분에게 사인을 해 드리는 사인회 시간이었다.
내 앨범을 산 분 중 사인회에 참석하고 싶다고 하신 분들이 별도로 응모를 해 주셨는데, 그분들 중 추첨을 통해 300분을 뽑은 것이다.
나를 좋아해 주시는 팬들과 가장 가깝게 만날 수 있는 자리라서 색다른 기분이 드는 시간이었다.
사인과 함께 사진까지 찍어 드린 많은 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팬분은 62세 할머니와 65세 할아버지 부부였다.
생각보다 남성 팬 비중이 높아서 여느 남자 아이돌 팬덤의 구성과 많이 다른 팬들을 가진 나였지만, 할아버지 할머니 팬이 사인회장에 찾아와 주실 줄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실제 두 분이 무대에 올라왔을 때 나는 잠시 눈에 이상이 생긴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두 분이 내 팬이 맞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또 너무 놀라 잠시 할 말을 잊어버릴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호호, 앞으로도 좋은 노래 많이 들려줘요. 그리고 드라마에도 자주 출연하고… 우리 예쁜 서준 씨가 TV에 자주 나오니 내가 TV 보는 재미가 너무 쏠쏠해요. 호호호.”
사인을 받고 난 후 할머니가 해 주신 이 말씀은 사인회를 다 마치고 밴에 탔을 때까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바빴던 일정을 마무리하고 차에 타고 개인 스케줄이 있는 곳으로 이동을 시작하니 문득 제임스 권과 했던 내기가 떠올랐다.
우리 두 사람 간의 내기는 굳이 세세하게 따질 필요도 없이 명백하게 내가 이겼다.
그러니 이제는 내기에서 진 제임스 권에게 벌칙을 수행하도록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전화를 걸지 말지를 잠시 고민했던 나는 굳이 미룰 필요가 없었기에 생각난 김에 바로 벌칙 수행을 하도록 말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옆에 둔 스마트폰을 곧바로 집어서 제임스 권에게 전화를 걸었다.
♩♪♪♩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제임스 권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몇 번 더 통화를 시도했지만, 역시나 결과는 같았다.
결국, 제임스 권은 이번에도 벌칙을 수행하지 않고 비겁하게 튄 것이다.
“…비겁한 자식…….”
제임스 권의 도망 때문에 조금 화가 난 나는, 어딘가에 있을 제임스 권을 향해 작은 소리로 욕했다.
“어? 뭐라고요, 오빠?”
작게 중얼거린 내 목소리를 들은 은비가 갑자기 뭐라고 했는지를 물었지만, 굳이 다른 사람에게 이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대충 말을 얼버무리며 넘어갔다.
벌칙을 수행하지 않는 녀석의 행동은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고 화가 났지만, 한편으론 이젠 제임스 권이 나를 보면 부끄러워 피할 거라는 생각이 들자 조금은 화가 가라앉았다.
떳떳하게 내기에 진 것을 인정하고 당당히 벌칙을 수행하면 오히려 그 후 나를 볼 때 지금처럼 목을 꼿꼿이 세우고 볼 수 있겠지만, 지금처럼 비겁하게 도망을 친 후 나를 보면 부끄러워 피하게 될 것이다.
뭐 얼굴에 철판을 깐 사람처럼 막무가내로 나올 수도 있지만, 하늘을 찌를 정도로 콧대가 높았던 녀석을 생각하면 두 번이나 도망친 전과 때문에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고생 한 연경이에게 직접 사과하는 일을 만들어 주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건 다음으로 미뤄야 할 거 같았다.
제임스 권과의 내기를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식당.
나는 이곳에서 실장님, 그리고 다른 직원들에게 여기서 바로 퇴근할 것을 권했다.
“편하게 맥주도 한잔할 수 있으니, 끝나면 바로 택시 타고 들어갈게요. 그러니 모두 기다리지 마시고 퇴근하세요.”
실장님과 은비, 그리고 찬식이는 혹시 모를 일이 생길 수 있으니 가게 근처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했지만, 특별한 일이 생길 건덕지가 없으니 그런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그대로 퇴근하라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이번 승부에서는 내가 이겼기에 사람들은 나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식당을 떠났고,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 직원분을 따라 미리 예약된 방으로 들어가니 이미 와 계신 두 분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우선 늦었기에 사과부터 건넸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었죠?”
“하하, 우리 서준 씨가 늦게라도 와 주신 거에 너무나 감사하죠.”
“그럼요. 바쁜 스케줄 중에 우리를 보러 와 주신 게 어디에요.”
내 사과를 짓궂은 농담으로 받는 두 분의 모습에 나는 살짝 삐친 척을 해 보았다.
“자꾸 놀리시면 저 갈 거예요. 그래도 되나요?”
“아이고, 그건 안 되지. 지금 헤어지면 또 언제 볼지 장담을 못 하는데… 뭐 해요, 최 작가? 어서 이서준 배우님 잡아요. 진짜 가시면 어쩔 거야?”
“아, 네. 잡아야죠. 서준 씨 우리 농담한 거니까 그냥 앉아. 미안해.”
역시 이번에도 농담으로 내 투정을 받아주는 두 분의 모습에 나는 웃으며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는 두 사람.
이 두 분은 오늘 내가 식당에서 만나기로 한 이진섭 감독님과 최은희 작가님이었다.
“스케줄 많은 날 불러서 정말 미안해. 오늘 힘들었지?”
내 스케줄을 들은 감독님의 걱정에 나는 걱정 마시라는 의미에서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감독님. 저 정말 괜찮아요.”
내 대답을 들은 최 작가님은 나를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광고 촬영에 팬 미팅까지 하고 왔는데 정말 괜찮다고? 그거 진심이야? 그냥 우리 봐서 하는 말이지? 만약 우리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진심이라면… 그럼 우리 서준 씨 체력이 정말 좋은 거야.”
나 역시 내 스스로 체력이 좋다고 생각했기에 최 작가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른 분들과 비교하면 아직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신인이지만… 그래도 스케줄 빡빡하게 며칠 다녀보니 적응이 좀 되더라고요. 타고난 체력 탓도 좀 있는 거 같고요. 그러니 체력은 걱정하지 마세요.”
내 대답을 들은 두 분은 다시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웃었다.
마치 삼촌과 이모가 조카를 대견하게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내가 올 시간에 맞춰 음식을 미리 주문해 두셨는지 곧바로 방문이 열리며 음식이 테이블 위에 놓이기 시작했다.
담긴 음식의 비주얼만 봐도 얼마나 맛있을지 기대가 될 정도로 맛깔스럽게 보이는 음식들이었다.
“자, 그럼 먹을까?”
“네. 두 분도 많이 드세요.”
“호호, 고마워 서준 씨.”
부모님과 떨어져 동생과 자취하는 내 사정을 잘 아는 두 분이었기에 나 때문에 일부러 맛있는 한정식집을 예약하셨다.
밥을 한 끼 먹더라도 엄마가 해 주신 밥처럼 느끼길 바라는 두 분의 마음이 담긴 식당 선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