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깨비 덕분에 슈퍼스타-93화 (93/189)

93. 한 번 더 오케이?(1)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식사 시간만큼 행복한 시간이 또 있을까?

이진섭 감독님은 이번 드라마를 함께 작업하면서 진짜 삼촌같이 더욱 친근한 존재가 되었고, 자주 보진 못했지만, 가끔 촬영장에 들러서 응원을 보냈던 최은희 작가님도 오늘 함께 식사하다 보니 많이 친해진 느낌이 들었다.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였던 음식이 사라짐과 동시에 어느 정도 포만감을 느끼기 시작할 때쯤 이진섭 감독님이 나를 보며 한 잔을 꺾는 손동작과 함께 웃으며 물었다.

“흐흐, 이렇게 좋은 안주들이 있는데… 그냥 여기서 반주 한잔 간단하게 할까? 어때, 생각 있어?”

나 역시 간단하게 술도 할 거라 예상하고 온 자리라 바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흐흐, 좋죠. 안 그래도 감독님과 한잔하려고 기다리겠다는 제 팀원들도 다 집으로 보냈어요. 혼자서 편하게 감독님과 한잔하고 택시 타고 집에 들어가려고요.”

내 호탕한 대답이 감독님의 마음에 쏙 드셨는지 크게 웃으시며 다시 말씀하셨다.

“하하하, 좋아. 역시 우리 이 배우는 내 마음을 잘 알아준다니까. 촬영할 때도 그렇게 말 안 해도 알아서 내가 원하는 대로 척척 해 주더니… 술자리에서도 최고네. 마음에 들어. 그럼 우리 최 작가도 한잔 콜?”

옆에서 우리를 바라보던 최은희 작가님도 감독님의 제안에 즐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저도 당연히 콜이죠.”

“흐흐, 대답 한번 빨라서 좋네. 하하.”

잠시 후 이 가게에서만 특별히 맛볼 수 있는 귀한 전통 소주가 우리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전통 방식으로 만든 지방 특산물 소주였는데, 서울에는 이 가게에서만 이 소주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최근 일정이 많아 바쁘게 지내는 나를 배려한 감독님의 선택이었다.

처음 먹어 보는 술이라 묘한 기대감을 안고 한 모금 마셔 보니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독특한 소주의 맛에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몇 잔 주고받으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이진섭 감독님이 은근슬쩍 앞으로 내 행보에 관해 물으셨다.

“서준이는 이제 뭐 할 거야? 그러니까 최근 몇 달 동안 일정 잡힌 게 뭐가 있냐는 질문이야.”

감독님의 질문에 나는 연기자에서 돌아온 가수로서의 일정을 설명드렸다.

“저야 2집 준비해야죠. 2집 발매하자마자 곧바로 콘서트도 열 계획이에요.”

“…그럼 무지하게 바쁘겠네?”

“음반 준비에 활동, 그리고 콘서트 연습까지 해야 하니… 아마도 무지하게 바쁘겠죠?”

감독님의 질문에 대답을 마치고 감독님을 쳐다보니 이상하게 표정이 조금 달라지신 거 같았다.

그러고 보니 옆에 앉아 있는 최은희 작가님의 표정도 감독님과 비슷하게 달라진 거 같은데…….

두 분 표정을 자세히 보니 뭔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 표정 같았다.

마치 어떤 말을 해도 되나 고민하는 그런 표정 말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지 못해 주저하고 계신지가 궁금해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혹시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세요? 혹시 계시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저는 어떤 말이라도 괜찮아요.”

내 말을 들은 감독님은 약간 주저하는 듯한 모습으로 말했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긴 있는데…….”

“그럼 하시면 되죠. 진짜 괜찮으니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감독님이 너무 그러시니까 제가 살짝 서운해지려고 해요. 전 감독님과 제가 엄청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감독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하시는 거 같잖아요.”

내가 강하게 재촉하니 우물쭈물하던 감독님이 드디어 입을 여셨다.

“사실은… 네가 가능하다면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만드는 드라마에 다시 한번 출연해 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려고 했어.”

“드라마요?”

아니 드라마 끝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다시 드라마 이야기를 꺼내시는지…….

전혀 생각도 못 한 말씀이었다.

“이번 드라마 끝난 지 아직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음 작품 이야기가 너무 빠르신 거 아니에요?”

내 말에 감독님과 작가님 모두 약간 멋쩍은 표정을 지으셨다.

아마 두 분 역시 다음 작품 이야기를 너무 빨리 꺼냈다는 걸 알고 계시겠지.

“뭐…그건 그렇지. 하지만 우리가 하고 싶은 작품을 진짜 만들어 보려면 지금 아니면 시간이 안 되니 우리 입장에도 어쩔 수가 없었어.”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나 빨리요? 저도 저지만, 감독님하고 작가님도 좀 쉬셔야지요. 촬영하고 대본 쓰신다고 엄청 힘드셨잖아요.”

“우린 괜찮아. 나야 이렇게 팔팔하고, 최 작가도 새로 써야 하는 게 아니라 이미 써 놓은 작품을 수정 정도만 하면 되니까 크게 무리할 필요는 없어.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일정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지금 원래 편성되어 있던 드라마가 갑자기 엎어지는 바람에 생긴 기회를 치고 들어가는 거거든. …근데 넌 너무 바빠서 출연이 힘들겠지?”

갑자기 어울리지 않게 불쌍한 표정을 짓는 감독님의 모습에 실소가 터져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어떻게 보면 정식으로 출연 제의를 받은 것과 다름이 없었기에 나는 곧바로 드라마 출연이 가능한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실장님을 억지로 퇴근하게 만든 게 살짝 후회가 된다.

일 이야기는 실장님과 의논하며 처리하는 게 편한데…….

지금은 실장님은 댁에 가고 없으니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잠시 고민해 본 결과 드라마 출연은 솔직히 쉽지 않은 상황인 거 같았다.

2집에 들어갈 노래들은 제법 많이 만들어 둔 상황이었지만, 어쩌면 내 가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2집 앨범을 준비하는 것이기에 시간적으로 충분히 여유를 가지고 일을 해야 할 거 같았다.

가요계에서 흔히 하는 말로 가수가 롱런하기 위해서는 2집이 잘되어야 한다는 속설도 있지 않은가?

그 말의 참뜻을 나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이번에 발매할 2집에는 정말 큰 정성을 쏟을 계획이었다.

내 표정만 보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 눈치를 채셨을까?

감독님은 갑자기 드라마 시놉시스를 내게 내미셨다.

이건 도대체 언제 꺼내신 거야?

어쩔 수 없이 받아 든 시놉시스.

나는 그것을 곧바로 훑어보았다.

두 분이 만드시고 싶다던 드라마의 장르는 의외로 첩보 액션물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신선한 장르라서 나는 곧바로 감독님께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장르가 첩보 액션물이네요. 완전 의외에요.”

의외라는 내 말에 두 분은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며 내게 다시 말했다.

“이 드라마가 사실 내가 진짜로 만들고 싶었던 시나리오야. 우리 최 작가가 몇 년에 걸쳐서 썼던 시나리오이기도 하지.”

감독님의 말에 옆에 있던 작가님도 설명을 보탰다.

“그래, 내가 진짜 열심히 쓴 시나리오야. 사실 내가 시나리오 작가가 된 이유도 이 이야기가 머릿속에 떠올라서 글로 표현해 보고 싶었던 게 내 작가 인생의 시작이었어.”

두 분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 보니 사실 이 작품이 두 분이 진심으로 함께 작업하고 싶었던 작품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시나리오를 들고 제작사를 만나고 다니며 제작을 하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잘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제작사 쪽에서 제작을 거절한 이유는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쉽게 짐작이 갔다.

초짜 감독과 초짜 작가가 가지고 온 작품에다가 가장 제작하기가 어렵다는 첩보 액션물이라는 장르의 대본이었으니 어느 제작사가 선뜻 이들의 손을 잡을 수 있었을까?

자신들이 너무 무모한 시도를 했다는 걸 알게 된 두 분은 곧바로 계획을 바꾸었다고 한다.

일단 경력을 쌓자, 그래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을 만한 위치가 되면 그때 다시 도전하자.

이게 두 분의 계획이었고, ‘목소리3’이라는 드라마의 성공으로 그 기회가 생긴 것이다.

두 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 마음속에는 부담감이 점점 쌓이고 있었다.

머리로는 스케줄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두 분이 정말 진심으로 내가 출연하기를 바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 시간 좀 만들어 보자. 이렇게까지 바라시는데 그냥 못한다고 하는 건 아닌 거 같아.’

그렇게 생각한 나는 두 분께 진지하게 말했다.

“아직 많이 부족한 저한테 출연 제의를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솔직히 시간은 많이 없습니다. 그런 제 사정을 이해해 주신다면 가능한 한 출연하도록 해 볼게요.”

내 말을 들은 감독님은 크게 기뻐하며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정말? 너무 고마워. 우리 서준이 덕분에 내가 이번에도 좋은 드라마를 만들 수 있을 거 같아. 정말 너무 고마워.”

“아이고, 왜 이러세요? 감독님이 만드시는 드라마에 제가 출연하게 되어 제가 더 영광이죠. 근데, 제가 맡을 배역은 뭔가요? 주인공 동료인가요?”

내 질문에 감독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럼… 외국 스파이요? 혹시 그것도 아니면 이번엔 악역?”

아니라는 감독님의 말에 나는 시놉시스상에서 확인한 여러 배역을 고려하며 감독님께 물었다.

그러나 감독님은 내 모든 예상이 틀렸다는 걸 바로 알려 주셨다.

“서준이 네가 주인공이야. 조연이 아니라.”

“네?”

너무 놀라 쓰러질 뻔한 나.

아니 내가 주인공이라고?

“아, 아니 제가 어떻게 주인공을 해요? 이번에 드라마 첫 출연인데… 그리고 이 드라마는 액션도 많잖아요. 저 못 해요.”

나는 주인공이라는 감독님의 말을 듣자마자 온몸으로 거부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인공은 아직까지 나에겐 시기상조였다.

감독님과 작가님 두 분도 내 말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시는 것 같은 표정이셨다.

“사실 나도 네가 주인공을 하는 데 고민이 많아.”

“아니, 감독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면 저에게 주인공 역을 제안하시면 안 되죠. 생각을 그렇게 하셨는데, 제안은 저한테 한다? 이건 생각과 행동이 다른 거잖아요.”

“그렇지. 그건 네 말이 맞아. 그런데도 내가 왜 너에게 주인공을 제안했을까? 그건 나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는 거 아니겠냐?”

“피치 못할 사정요?”

“응. 그게 있어. 사실은…….”

감독님의 이어진 설명을 들어 보니 피치 못할 사정은 분명 있었다.

방송국 쪽에서 내가 주인공을 맡는 걸 강하게 원한 것이다.

방송국과 연예인의 관계는 서로 공생 관계이다.

방송국이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는 출연자인 연예인이 필요하고 연예인들도 방송국에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일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공생 관계라고 해서 방송국과 연예인의 입장이 같은 건 아니었다.

지금도 그런 경우라고 볼 수 있는데, 방송국은 지금 잘나가는 나를 다시 한번 자사 드라마에 출연시키고 싶어 했다.

인기가 있을 때 재미를 보려는 행동인 것이다.

그러나 내 입장에는 연이은 출연이 부담이었다.

연예인에게 이미지는 상품성이기 때문에 잦은 노출은 오히려 독이 될 때가 많은 것이다.

방송국 역시 이런 연예계의 생리에 잘 알지만 신경을 써 주진 않았다.

그들 입장에는 내 인기가 언제까지 최고일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인기 있을 때 바짝 땡겨 재미를 보지 못하면 다음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국장님이 네가 주인공이 아니면 편성을 못 받는다고 하시니…….”

“그렇다고 능력도 안 되는 제가 주인공을 맡는 건 옳은 판단은 아니잖아요. 감독님도 시청자에게 사랑받는 작품을 만들고 싶으실 테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그건 그렇지. 하지만 하나는 짚고 가자. 넌 내가 드라마를 편성하기 위해 억지로 널 주인공 자리에 앉히려고 한다고 생각하지?”

“그거 아닌가요?”

감독님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절대 아니다. 설명하긴 힘들지만… 난 네가 그 역할을 훌륭히 소화할 가능성도 크다고 생각해. 물론 어디까지나 내 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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