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해외에서 반응이 오기 시작한다(4)
그는 다소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녹초가 된 그녀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저기… 오늘 연습하신다고 힘드신 거 같은데… 말씀드리긴 죄송하지만, 미리 짜 놓은 스케줄이 아직 남아 있어서요… 혹시 괜찮으시겠어요?”
피디의 말을 들은 워너비 걸즈 멤버들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지금 몸은 너무 힘들었지만, 정해진 스케줄이 남았다고 하는데 안 할 수도 없었기에 남은 일정을 모두 소화한 후 쉬려고 힘을 낸 것이었다.
소파에 누웠다가 일어나 앉은 리더 예빈은,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피디를 향해 애써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괜찮습니다. 저희가 소화해야 할 남은 스케줄은 뭔가요?”
그녀의 말을 들은 피디는 고맙다는 표정을 지은 채 아직 남은 스케줄을 설명해 주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해외 팬들도 여러분들의 컴백에 관해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저희가 프로그램 시작할 때 방송국 공식 SNS로 해외에 있는 팬분에게 컴백 과정을 담은 리얼리티에 여러분이 출연한다는 사실을 알렸고요, 더불어 컴백을 준비하는 여러분께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일주일이란 시간이 지났는데, 저희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엄청난 수의 댓글이 달리게 되어서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려고 해요.”
해외 팬들이 엄청난 수의 댓글을 달았다는 말을 들은 워너비 걸즈 멤버 전원의 표정이 달라졌다.
해외에서도 서서히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들의 컴백 소식에 엄청난 수의 댓글이 달렸다고 하니 그만큼 기쁜 소식이 없었다.
같은 소속사의 쓰리 타임즈가 해외를 돌며 월드 투어를 하고 있는 모습을 동경하는 그녀들이었기에 해외 팬들의 관심과 사랑만큼 반가운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피곤한 모습을 보이던 멤버 전원은, 어느새 피곤한 모습을 완전히 지우고 잔뜩 기대한 표정으로 피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중 맏언니인 레아가 궁금함을 참기 힘들었는지 피디에게 직접 물었다.
“얼마나 많은 댓글이 달렸기에 그러세요?”
그녀의 질문을 들은 피디는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해외 팬들 소식이 궁금하신 모양이네요. 그럼 바로 알려 드릴게요. 댓글 수는 무려… 9천 개가 넘어요. 거의 1만에 가까운 숫자이니 조금만 더 있으면 1만을 넘길 거 같네요.”
“와아… 진짜요?”
직접 듣고도 믿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숫자의 댓글이었기에, 멤버 전원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함께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기에 프로그램의 진행을 위해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피디는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겨우 웃음이 터질 위기를 넘긴 피디는 가까스로 말을 이어 갔다.
“그럼 어떤 글들이 올라와 있는지 직접 한번 읽어 볼래요?”
피디의 말을 들은 그녀들은 신이 나 일제히 소리쳤다.
“네!”
방송 스태프가 건네준 노트북으로, 옹기종기 모여 댓글을 읽기 시작하는 워너비 걸즈.
대부분 영어로 적혀 있었지만, 워너비 걸즈 멤버 중 가족의 이민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해외에서 살았던 레아가 있었기에 읽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영어에 자신 있는 레아가 가운데 앉아서 직접 댓글을 읽기 시작했다.
“자, 어떤 댓글들이 있는지 직접 살펴볼까요? 우선 이런 댓글이 보이네요. 프랑스에 사는 마리앙이라는 이름을 가진 팬이네요. 워너비 걸즈의 새 노래를 무척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 곧 컴백을 하신다는 소식을 들으니 너무 행복합니다…….”
대부분의 댓글 내용은 그녀들의 컴백을 너무 기다렸다, 이번에도 좋은 노래일 것 같다, 너무 팬이다 등의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자주 접하는 국내 팬이나 아시아 팬들의 응원만 주로 듣다가 멀리 떨어진 유럽 팬들이 글을 직접 보니 신기하고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댓글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는데, 멤버 유정이 특이한 댓글 하나를 발견하고는 모두에게 말했다.
“어? 이건 서준 오빠 이야기다.”
“서준 오빠?”
자신들의 팬들이 달아 준 댓글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이서준 이야기가 나오는 댓글이 있다고 하니 모두가 궁금한 눈으로 유정이 발견한 댓글을 읽기 시작했다.
“이번 노래도 이서준 오빠가 만들어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뻤어요. 언니들이 최고로 빛날 때는 바로 우리 서준 오빠가 만들어 준 곡을 노래할 때거든요. 언니들이 컴백하고 조금 있으면 사랑하는 서준 오빠도 컴백을 하니 연달아 들려온 기쁜 소식에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예요.”
댓글을 읽고 나니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들 중 연아가 대표로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입 밖으로 끄집어내었다.
“우리 팬이야? 오빠 팬이야?”
그녀의 질문에 리더 예빈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아마 둘 다?”
“…아마 그렇겠지.”
지금 이 댓글을 쓴 팬이 누구의 팬인지 그 정체성에 관해 잠시 고민하게 되었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기에 웃으며 넘어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레아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이 모두에게 말했다.
“근데 말이야… 이 댓글 쓰신 분 영국분이지?”
“응, 맞아. 아까 자신을 영국인이라 소개하는 내용이 있었잖아.”
“그럼 영국 팬이 서준 오빠를 잘 안다는 소리네. 내 말 맞지?”
“어머, 정말 그렇네.”
그녀들이 조금 놀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지금까지 이서준이 해외에서 활동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영국에 이서준의 팬이 생겼다는 뜻이었기에 충분히 놀랄 만한 소식이었다.
“와, 오빠 아직 가수 활동 시작한 지 만으로 1년도 채 안 됐잖아. 그리고 드라마 찍는다고 해외 무대에 서 본 적도 단 한 번도 없고… 그런데도 오빠에 대해 아는 팬이 있다니… 이게 요즘 최고 스타인 이서준의 힘인가요?”
자신이 놀란 사실을 중얼거리는 레아를 보고, 지켜보던 피디가 설명을 거들었다.
“제가 알기론 유럽에는 지금 K팝 광풍이 부는 중이라 하더라고요. 그러니 요즘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이서준 씨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이 아닐까요? 평소에도 K팝 소식에 쭉 관심을 가져 온 분이라면 충분히 알 수도 있을 거 같은데…….”
들어 보니 나름 타당한 이유인 거 같아 워너비 걸즈 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의 유럽에서의 인기를 실감하는 도중 생뚱맞지만 이서준의 인기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 * *
앨범 준비는 거의 마무리가 되었다.
녹음도 끝났으니 앨범 제작에 돌입하기만 하면 되었다.
다음 차례는 뮤직비디오 촬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를 찾아왔고, 그분은 바로 나와 깊은 인연을 가진 박진섭 감독님이었다.
가능하다면 이번에 찍을 뮤직비디오도 박진섭 감독님이 맡아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직접 감독님 작업 사무실로 왔지만,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영화를 준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물어본 내 제안에 의외로 감독님이 바로 앉은 자리에서 흔쾌히 예스라고 답해 주셨다.
두 번의 연이은 대히트 덕분에 지금 감독님의 위상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간 상황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예전처럼 뮤직비디오를 연출해 주실 여력과 생각이 없을 것이라 짐작했는데, 그런 나의 짐작은 기쁘게도 깨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감독님께 직접 물었다.
“영화 준비하신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시간 없으실 텐데… 차마 거절 못 하셔서 괜히 무리하시는 거 아닌가 싶네요. 만약 그러시면 솔직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저 상처 전혀 안 받아요.”
내 말을 들은 감독님은 웃는 얼굴로 대답하셨다.
“아무리 바빠도 주인공 섭외에 소홀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네?”
주인공 섭외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주인공 섭외요? 저 또 주인공 시키시려는 건가요?”
“크크, 맞아. 미안한데 우리 최 작가가 도무지 너만 생각하며 대본을 써내니 나도 어쩔 수가 있겠냐? 그러니 내가 역으로 질문할게. 우리 슈퍼스타 이서준 씨. 다음에 영화 만들 때 함께하실 생각이 없으신가요?”
“그야 당연히 있죠. 두 분 작품이 얼마나 좋은지 직접 출연한 저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요. 근데 한 가지 걱정은 드네요.”
“그게 뭔데?”
“두 분 작품에 제가 너무 많이 나와서 저한테 질려 작품에 피해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요. 배우분들은 이런 고민을 항상 하고 계신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는데… 저 역시 이 고민을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네요.”
내 고민을 들은 감독님은 걱정 말라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최 작가가 자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이야기가 떠오르는 모양이더라. 최 작가님 입장에선 우리 서준이가 창작의 샘물인 셈인 거지. 그 이야기는 서준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역할이란 뜻도 되니 그런 염려는 할 필요가 없을 거 같아.”
“…그런가요?”
“그럼.”
감독님의 말씀을 들으니 조금 안심이 되는 것 같긴 했다.
나야 최고의 작품을 만들 두 분과 다시 작업하는 것만큼 좋은 일은 없으니 출연을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걱정했던 일도 괜찮다고 말씀해 주시니 더욱 주저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뮤직비디오 때문에 온 사무실 방문이 영화 출연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향후 계획 하나를 만들어 줄지는 몰랐기에 나는 약간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감독님과 아이디어 회의를 시작했다.
* * *
“형님.”
한창 업무에 매진하던 김진영은, 자신의 사무실에 방문한 손님의 얼굴을 보곤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세계를 씹어 먹는 그룹 BTC를 만든 박시혁 프로듀서님 아니신가요? 아, 아니다. 상장했으니 회장님이라고 불러 드려야 하나?”
김진영의 농담에 손님 박시혁도 웃으며 받아쳤다.
“아이고 이거 왜 이러세요? 저야 내세울 만한 아티스트가 BTC 하나밖에 없는데, 비스트 보이에 쓰리 타임즈, 그리고 워너비 걸즈에 괴물 신인 이서준까지 데리고 계신 김진영 대표님이 제게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하면 제가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고 있는 우스운 꼴이잖습니까? 하하하.”
과거 함께 일하면서 원체 가깝게 지내던 두 사람이었는지라 오랜만에 봤는데도 아무 스스럼 없이 편하게 농담을 나누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후 아끼던 차까지 테이블 위에 올려 둔 김진영.
그런 그를 향해 박시혁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 사실 이서준 보러 왔습니다.”
그런 박시혁의 말에 김진영이 조금 놀라며 물었다.
“서준이를? 왜?”
“곡 좀 부탁하려고요.”
“곡? 그쪽도 작곡가는 빵빵하잖아. 굳이 외부에서 곡을 구할 필요가 전혀 없을 텐데… 아니야?”
“후후, 곡이야 항상 부족한 거 아닙니까. 그리고 솔직히… 이전과 다른 느낌의 곡이 필요합니다. 좀 더 해외에서 먹힐 만한 곡을요. 제가 사실 바빠서 최근 음악을 많이 못 듣고 살았는데, 서준이 곡을 듣고 꽤 심하게 충격을 받았거든요.”
박시혁의 말을 들은 김진영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좋은 뜻으로?”
“네, 완전 좋은 뜻으로요. 지금까지 한국에서 저런 곡을 뽑아낸 작곡가가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음악의 결이 완전 한국에서 태어난 느낌이 아니더라고요.”
“그럼 어디서 태어난 음악처럼 느껴졌어?”
김진영의 물음에 박시혁은 꽤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이 받은 느낌을 솔직하게 말했다.
“미국이나 유럽 쪽에서 만들어진 음악 같았어요. 김치랑 쌀밥 먹고 자란 아이가 아니라 빵이랑 버터 먹고 자란 녀석이요.”
박시혁의 말을 들은 김진영은 자신 역시 공감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