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예능 방송 출연(3)
담당 피디의 설명을 들은 유재성은 탈락을 당하지 않고 남은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이야, 이거 큰일이네. 남은 사람도 몇 명 없는데 말이야… 그리고 이 중에 첩자가 있을 가능성도 크고… 도대체 누구야? 누가 첩자냐고?”
말을 하는 유재성은 지금 현재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지 얼굴을 약간 찌푸린 채 말하고 있었다.
유재성의 말이 끝나자 여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송지영은, 현재까지 남은 사람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현재 살아남은 사람이 재성이 오빠랑 나… 그리고 서준이랑 정수네. 근데 왠지 느낌이 여기 있는 생존자 중에는 첩자가 없을 것 같은데… 혹시 이번에도 네가 첩자냐?”
그냥 멍하니 서 있던 이정수는 갑자기 자신을 노려보며 물어보는 송지영을 보며 최선을 다해 부인했다.
“나? 나 아니야, 누나. 왜 항상 이런 순간에는 무조건 나를 의심해?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그래?”
송지영은 이정수의 억울함이 담긴 답변을 듣고 순간적으로 웃음이 터졌다.
그래서 힘겹게 웃음을 참아 가며 다시 입을 열었다.
“뭐? 내가 왜 널 의심하냐고? 정말 그 이유를 몰라서 물어?”
순간 억울한 마음이 들어 강하게 따졌지만, 생각해 보니 송지영의 말처럼 자신이 그런 의심을 살 만한 짓을 여러 번 저질렀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약간 무안한 마음이 든 그는 멋쩍은 미소를 지은 채 진심으로 아니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나 진짜 아니야. 제발 한 번만 믿어 줘. 만약 내가 만약에 이번에도 첩자 역할을 맡았으면 누나가 해 달라는 것 다 해 줄 수 있어. 약속할게.”
이정수가 말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그의 말이 맞을 거 같다는 느낌이 든 송지영은, 그래도 의심을 버리지 못한 눈으로 다시 그에게 물었다.
“너 진짜 아니야? 맹세할 수 있어?”
“응, 나 진짜 아니야. 진짜 하늘에 대고 맹세할게. 나 진짜 오늘은 첩자 아니야.”
송지영과 이정수가 누가 첩자인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계속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하고 있던 이서준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세 사람을 향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제법 괜찮은 가설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는데… 말씀 좀 드려도 될까요?”
이서준의 말을 들은 세 사람은 반색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현재 상황이 매우 막막하다고 느끼던 중이라 조금 전 이서준의 말은 답답했던 그들의 입장에는 반가울 수밖에 없는 내용이 담긴 말이었다.
“어떤 가설?”
“제가 지금까지 사람들이 아웃 될 때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의 동선을 점검해 보았어요. 그랬더니 놀라운 결론에 도달하게 되더라고요.”
“놀라운 결론? 그게 뭐야?”
“다행인 점은 사람들이 갑자기 아웃 되던 그 순간, 여기 있는 사람은 다 알리바이가 있어요. 만약 정수 형이 첩자라고 가정하면, 가장 최근에 아웃 된 정훈이 형을 정수 형이 우리 몰래 다가가 아웃시켰다는 뜻이 되는데… 그때 정수 형의 동선을 따라가면 시간상으로 절대 불가능하더라고요. 우리가 아웃 안내를 들었을 때 정수 형은 약 30초 뒤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오셨죠. 그건 제 계산에 따르면 절대로 시간상 여유가 없어요. 그렇게 보면 정수 형은 절대 첩자가 아니란 뜻이 됩니다.”
첩자로 의심받아 내심 서운했던 이정수는, 이서준이 자신은 첩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 주는 것 같아 답답한 속이 풀리며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 이서준의 말을 함께 듣고 있던 유재성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우리 중 첩자가 없다고? 그럼 누가 사람들을 아웃시켰다는 말이야? 설마 자기 스스로 아웃 됐을 리는 없잖아.”
유재성의 말을 들은 이서준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다시 말했다.
“우리 중에 반드시 첩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한쪽으로만 생각하는 꽉 막힌 사고가 아닐까요?”
“…뭐?”
유재성은 이서준이 하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채 그저 눈만 껌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 * *
“…….”
오늘 녹화에서 첩자 역을 맡은 김국종은, 아주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주변을 맴돌며 틈을 노리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숨어서 뒤를 쫓고 있는 건 꿈에도 모르겠지?’
오늘 자신은 스스로 자평하길 첩자 역할을 제법 준수하게 소화해 내고 있었다.
저번에 이서준과의 이름표 떼기 맞대결에서 예상외로 패하면서 능력자란 자신의 별명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시청자들에게 보였는데, 그때의 수모를 갚기 위해 자신과 제작진이 몰래 합심하여 만들어 낸 ‘히든 미션 미라클’ 시나리오대로 아무 일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오늘은 내가 반드시 저번 녹화 때의 수모를 갚는 모습을 보여 줘야지… 그래야 내가 제대로 체면이 설 테고 말이야.’
그렇게 다시 한번 각오를 다진 그는, 특유의 작은 눈으로 사방을 살피며 비밀번호가 적힌 힌트 봉투를 찾으며 걷고 있는 이정수의 등을 바라봤다.
이대로 아무 변수 없이 시간이 흘러간다면 자신의 우승이 확실하지만, 지금 자신이 뒤를 쫓고 있는 이정수 정도는 아웃시켜도 될 것 같아 틈을 노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정수는 자신이 만들어 낸 쇼의 마지막을 장식할 훌륭한 제물 역할이었다.
다소 어리숙한 모습으로 정처 없이 걸으며 힌트를 찾는 이정수.
김국종은 그런 그의 등을 바라보며 이름표를 뗄 타이밍만 재고 있었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등장했고, 그 주인공은 프로그램 여성 고정 멤버인 송지영이었다.
그녀는 이정수에게로 빠르게 달려와 숨을 헐떡이며 말하기 자신이 이정수를 찾아온 용건을 빠르게 쏟아 내듯 말하기 시작했다.
“야, 우리 지금 재성이 오빠가 찾아. 그러니 빨리 오빠한테 가야 해. 오빠가 비밀번호를 찾았다고 함께 탈출하자고 했어.”
“뭐? 진짜?”
송지영의 말을 들은 이정수가 순간 많이 놀랐지만, 근처에 숨어 이들의 대화를 듣게 된 김국종도 많이 놀랐다.
‘아니, 재성이 형이?’
만약 지금 숨어서 들은 송지영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떠올린 김국종은 곧바로 힌트 번호를 찾은 유재성을 잡기 위해 조용히 뛰기 시작했다.
저들이 이대로 합류하게 된다면 자신은 혼자이고 저들은 다수이다 보니 이름표를 떼어 내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 분명했기에, 두 사람보다 빠르게 유재성에게로 뛰어가 그의 이름표를 먼저 떼 낼 생각이었다.
전력을 다해 움직인 김국종은, 운 좋게 어딘가를 바라보며 서 있는 유재성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나이스…….’
최선을 다해 발소리를 죽이며 달렸기에 다행히 유재성은 자신이 다가서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는 발소리를 줄이며 빠르게 유재성의 등 쪽으로 다가섰다.
손을 뻗어 유재성의 이름표를 잡으려는 그 순간, 갑자기 자신의 이름표가 뜯기는 느낌이 들었다.
쫘아악.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깜짝 놀란 얼굴로 급히 뒤를 돌아보는 김국종.
그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에는 자신의 이름표를 손에 쥐고 있는 이서준의 모습이 보였다.
“아, 아니, 어떻게…….”
지금 상황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어 고개만 갸우뚱거리며 이서준을 바라보는 김국종이었다.
숨은 첩자를 찾기 위해 멋지게 미끼 역할을 해낸 유재성이 그런 그를 보며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하하하, 낚시 성공. 이야, 서준이 말대로 덫을 준비하니 첩자를 이렇게 쉽게 잡는구나. 하하하, 낚시 한번 시원하게 했네. 크하하하.”
여전히 상황 파악이 덜 된 김국종은 크게 소리 내 웃는 유재성을 향해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다시 물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내가 첩자인 걸 알고 있었어?”
그의 물음에 유재성은 자세한 내막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알고 있었어. 거의 백 퍼센트에 가까운 확신을 가지고.”
“아니 어떻게?”
“서준이가 미션을 통해 획득한 단서를 조합해 보니 네가 첩자일지도 모른다는 추리를 해내더라.”
“진짜?”
유재성의 설명을 듣고 깜짝 놀란 김국종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근처에 서 있던 이서준에게로 향했다.
그리고는 본인에게 직접 궁금한 내용이 담긴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어떻게 내가 첩자라는 사실을 알아냈어?”
김국종의 질문을 들은 이서준은 아주 차분하게 추리 과정을 설명했다.
“힌트 덕분에요. 우리가 찾아낸 힌트 숫자가 9, 7, 1, 1 이렇게 4개의 숫자였잖아요. 그리고 여기서 ‘시작’이라는 단어가 적힌 힌트 봉투도 찾았고요. 그래서 골똘히 생각해 보니 선배님이 데뷔한 날이 97년 11월이라는 걸 알겠더라고요.”
“헉, 내 데뷔 일을 네가 어떻게 알았어? 혹시 검색한 거야?”
“네,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에 검색을 해 봤죠.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선배님이 데뷔 일이 우리가 찾은 힌트 숫자의 구성과 일치하더라고요. 그래서 선배님이 첩자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어요.”
이서준에게 설명을 들으니 이제야 지금 이 황당한 상황이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그제야 이해하게 된 그는, 마지막 질문까지 추가로 물어보았다.
“그럼 비밀번호를 찾았다고 정수를 불러온 것도 결국은 거짓말이었어?”
이번 질문에 관한 대답은 두 사람의 대화를 함께 듣고 있던 유재성에게서 나왔다.
“일종의 덫이었지. 혹시 네가 우리에게 들킨 걸 알면 시간 끌려고 도망 다닐지도 모르니, 서준이가 네가 낚일 만한 함정을 파서 널 유인하자고 우리에게 먼저 제안했거든.”
그제야 모든 상황을 알게 된 김국종은 허탈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이야… 내가 완전히 당했네. 사실 이번 주 녹화의 비밀 제목이 바로 ‘복수’였거든.”
“아니 왜 그렇게 살벌한 이름을 지었냐?”
“이 저번에 내가 서준이한테 이름표를 뜯겼잖아. 그래서 이번에 명예 회복을 노리는 마음으로 내가 첩자 역할을 맡겠다고 제작진에게 특별히 먼저 부탁까지 했는데… 결과는 내 바람과 정반대로 나와 버렸네. 서준이는 진짜 인정이다. 얘는 머리도 좋고 피지컬도 좋아. 내가 너는 특별히 인정할 수밖에 없다.”
김국종의 칭찬이 담긴 말을 들은 이서준은 약간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대한민국 예능 캐릭터의 역사를 쓰고 있는 능력자에겐 인정을 받다니… 정말 기분 좋네요.”
“크크, 우리 국종이가 누굴 인정한다고 말하는 건 10년 동안 처음 있는 일이긴 하네. 근데, 솔직히 나도 비슷한 마음이야. 우리 서준이가 너무 바쁘지만 않으면 같이 예능프로그램 하나 하자고 권하고 싶을 정도로 센스가 넘치는 친구라니까.”
김국종의 칭찬에 이어 국민 MC 유재성도 극찬에 가까운 칭찬을 해 주었기에 이서준의 낯이 더욱 붉게 변하고 있을 뿐이었다.
* * *
2집 정규앨범을 발매하자마자 실시간 음반 판매량 1위, 전 음원 차트 1위 싹쓸이 등 성공적인 컴백에 성공한 이서준은 며칠 전에 방영된 ‘달리는 사람들’ 덕분에 다시 한번 대중의 큰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