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연말 시상식(4)
물론 그 답은 세계를 호령한 BTC와 국내에서 최단 기간에 정상에 오른 이서준이었다.
BTC가 대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동생 문가희가 앞서 말한 대로 세계 무대에서 맹활약한 BTC가 당연히 엄청난 클래스를 보여 줬기 때문에 대상은 그들이 받아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이에 반해 이서준에게 대상이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의 의견은 이거였다.
지금 열리고 있는 가요 시상식은 국내 가요계를 대상으로 열리는 가요제이기 때문에 당연히 국내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가수에게 대상이 수여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이었다.
물론 BTC가 세계를 무대로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인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은 분명했지만, 이서준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국내 활동이 적었기 때문에 대상은 국내 무대에서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이서준이 받는 것이 더 옳다는 주장이었다.
양쪽 다 일리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논쟁 자체가 무의미한 논쟁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두 팀 모두 대상을 받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좋은 활약을 펼쳤기 때문이다.
계속 진행되는 시상식.
연말에 방송되는 가요제를 팬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이유는 자신이 응원하는 가수가 상을 받는 기쁨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도 분명 있었지만, 그것 외에도 가요제에서만 볼 수 있는 가수들의 특별 무대를 보고 싶은 마음도 컸다.
이서준의 특별부대를 애타게 기다리던 문가영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옆에 앉아 있던 동생에게 말했다.
“야, 서준 오빠 무대는 도대체 언제 하는 거야? 마지막 엔딩 무대는 당연히 BTC 오빠들이 나오겠지만, 우리 서준 오빠 정도라면 첫 무대나 1부 마지막쯤에 나와 줘야 하는데… 왜 아직도 나오지 않는 걸까?”
문가영의 이야기를 들은 문가희는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언니에게 으스댔다.
“오, 방금 언니 입으로 직접 인정했어. 우리 BTC 오빠들이 마지막 무대를 장식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이야기했지? 이건 바로 우리 오빠들이 최고라는 걸 내심 인정하고 있다는 말이잖아. 그렇다면 올해의 가요 대상도 우리 BTC 오빠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걸 언니도 사실은 알고 있다는 뜻이지?”
“그건 절대 아니고. 사실 BTC 오빠들이 대단했다는 건 나도 ‘쿨’하게 인정하는 바야. 다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국내 활동보다는 해외 활동에 주력했으니 국내 가요제 대상은 우리 서준 오빠에게 가는 것이 더 옳다는 뜻이었지. 근데 너 했던 말 자꾸 반복하게 만들 거야?”
“언니가 인정할 때까지 계속 물어볼 거야.”
두 사람이 다시 싸우는 동안 가요제는 어느덧 마지막 무대를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문가영이 그토록 기다리던 이서준의 모습이 무대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앗! 우리 오빠 나왔다!”
격렬하게 벌이던 동생과의 말다툼을 즉시 중단하고 TV 화면에 집중하는 문가영.
문가희는 그런 언니의 모습에 샐쭉한 표정을 했지만 본인 역시 TV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BTC 다음으로 좋아하는 가수가 바로 이서준이었기에 그녀 역시 이서준의 무대를 내심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머무는 화면 속의 이서준.
그는 무대 중앙에 마련된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감정을 잡는 듯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그는, 이내 모든 준비가 끝났는지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이 듣는 사람의 귀를 간지럽히기 시작했고, 그것을 듣고 있는 두 사람의 표정도 그에 따라 시시각각 변해 갔다.
이서준의 광팬인 문가영은 당연히 이서준의 멋진 연주에 또 한 번 감동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문가희의 표정은 정말 오늘만큼은 인정하기 싫지만, 이서준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피아노의 선율이 너무 환상적이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은 동시에 경악했다.
“어! 이거 우리 BTC 오빠들 노래잖아.”
“맞아. ‘봄날에’를 다르게 편곡한 노래 같아.”
처음에는 편곡 때문에 이서준이 연주하고 있는 곡이 무슨 곡인지 정확히 몰랐지만, 연주가 진행될수록 지금 그가 피아노로 연주하는 곡이 바로 BTC의 명곡 중 하나인 ‘봄날에’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모두가 인정하는 올해의 가요 대상 후보 두 팀.
두 팀을 가요 대상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로 보고 있는 팬들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이는 선곡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시작된 이서준의 노래.
♪보고 싶어요. 이렇게 말하니까 더 보고 싶어요.♩
분명 자신들이 알고 있던 ‘봄날에’가 분명했지만, 이서준의 목소리로 들으니 완전히 다른 곡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편곡이 너무 좋았기에 원곡을 뛰어넘는 감동이 자연스럽게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샘솟고 있었다.
핀포인트 조명이 이서준만을 비추고 있던 그때, 갑자기 그의 주변에 다섯 개의 조명이 나타나며 다섯 남자가 등장했다.
그들의 정체는 당연히 BTC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서준과 함께 노래하기 시작하는 BTC.
기존의 원곡과 많이 다른 편곡 버전을 부르는 그들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멋있게 보였다.
노래를 부르는 BTC와 열정적으로 연주하면서 함께 노래하는 이서준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감동을 주고 있었다.
두 팀의 이런 멋진 콜라보 무대 덕분에 조금 전까지 말다툼을 벌이던 문가영, 문가희 자매도 어느새 서로 손을 맞잡고 TV를 보고 있었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인 콜라보 무대가 주는 감동에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곳에 좀 더 머물러 주세요. 머물러 주세요.♪
이서준이 마지막 구절을 읊조리듯 노래하면서 노래는 끝났다.
새로운 느낌의 ‘봄날에’가 드디어 가요제의 대미를 장식한 것이다.
그리고 노래에 푹 빠져 듣고 있던 자매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올 거라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은 따뜻한 분위기의 원곡과는 다르게, 한 편의 슬픈 영화를 본 것과 같은 슬픈 감정 때문에 저절로 눈물이 흘러나온 탓이었다.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문가영은, 깜짝 놀라며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어머, 나 울었어. 흑흑, 노래가 너무 슬퍼서 그래.”
운 것은 동생 문가희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녀 역시 자신의 뺨을 손으로 닦아 내야 했다.
“그래 맞아. 너무 슬펐어. 어우, 왜 이렇게 노래를 슬프게 편곡한 거야? 이거 서준 오빠가 편곡했나?”
“아마 그랬을 듯… 아, 울어서 쪽팔린다.”
서둘러 눈물을 정리하던 그녀들은 또다시 화면에 집중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BTC의 리더인 문혁이 마이크를 잡고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가요제 무대를 준비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서준이 형이랑 친해진 일 같아요. 형은 어때요?”
문혁의 물음에 이서준 역시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그래요. K팝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있는 BTC란 팀을 평소에 크게 존경하고 있었는데, 그런 대단한 분들과 알게 된 것을 넘어서 편하게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친한 사이가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좋네요.”
“저도요, 형님.”
자신들과 친해져서 너무 좋다는 이서준의 이야기에 BTC 멤버 모두가 자기들 역시 좋다고 소리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마이크를 잡은 문혁.
이번에 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두 팀을 응원하는 팬들의 입장에는 정말 엄청나게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저희가 이번 특별 공연을 준비하면서 정말 많이 친해졌어요. 그래서 함께 연습한 날 맥주도 가볍게 한잔하면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요. 우리 이야기를 듣던 서준이 형이 갑자기 악기로 처음 듣는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했어요. 우리 이야기가 형의 머릿속에 있던 작곡 버튼을 눌러 버렸나 봐요. 그래서 어쩌다 보니 저희가 이번에 컴백할 때는 서준이 형의 곡을 가지고 컴백하게 되었습니다.”
TV를 통해 문혁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문가희와 문가영은, 엄청난 이야기에 자신들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뭐? 진짜?”
“대박…….”
그런 그녀들의 놀란 반응에도 불구하고 화면 속 문혁은 담담하게 하던 이야기를 이어 가고 있었다.
“저희가 원래 서준이 형한테 곡을 의뢰한 적이 있었어요. 근데 형이 드라마 촬영 때문에 시간이 없어 작업을 못 했는데, 어쩌다 보니 우연히 만들게 된 거죠. 정확히 10일 뒤에 음원이 정식으로 발매됩니다. 그래서 오늘 딱 1분 정도만 이번에 발표하게 될 곡을 선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안무가 완성이 안 된 상태라서 그냥 서서 부르는 점은 양해해 주세요.”
듣고 있던 사람들을 또 한 번 놀라게 하는 폭탄선언과 같은 말이었다.
문혁의 말이 끝나자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던 이서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한쪽 편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세션들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곳에 놓여 있던 일렉 기타를 집어 든 그는, 무대에서 스탠딩 마이크를 잡고 준비하고 있는 BTC에게로 눈을 돌렸다.
서로 간의 눈 맞춤으로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알게 된 이서준은 세션들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자, 하나, 둘, 셋 고!”
♪♩♩♪
그리고 곧이어 멋진 연주가 연말 가요 시상식이 열리는 실내 공연장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 * *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 가요제에서 모두가 궁금해했던 대상의 영예는 BTC에게 돌아갔다.
이서준 역시 그 누구보다 좋은 활약을 선보였지만, 세계를 호령한 BTC의 아성에는 미치지 못한 셈이다.
그러나 가요제가 열리기 전 화제를 모았던 대상 수상자에 BTC의 이름이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보다 더욱 화제가 된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약 1분 정도 선공개 된 이서준이 만든 BTC의 곡이었다.
1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노래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그 노래를 향하고 있었다.
―대박. 지렸다.
―와, 1분만 들었는데도 개좋음.
―역대급 나오나요?
―역대급 맞음. 역시 서준 오빠가 만드는 노래는 대박.
약 1분간의 노래는 영상으로 만들어져 순식간에 세계로 퍼져 나갔다.
이로써 며칠 뒤에 공개될 BTC의 노래는 엄청난 화제 몰이에 성공한 셈이었다.
자신이 만든 노래가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고 있던 그때, 이서준은 이진섭 감독과 최은희 작가와 편하게 식사하고 있었다.
“어때?”
“맛있어요. 진짜 오랜만에 삼계탕 먹는 건데… 정말 맛있네요.”
“그래? 호호, 우리 서준이가 맛있다고 하니까 내가 너무 기분 좋다. 호호호.”
최은희 작가는 이서준이 맛있게 식사하는 모습을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질투를 느꼈던 것일까?
그녀 옆에서 삼계탕을 먹고 있던 이진섭 감독이 그녀에게 서운한 듯 말했다.
“내가 맛있게 먹는 건 궁금하지 않은가 보지? 서운해, 최 작가.”
이진섭 감독의 투정에 최은희 작가는 웃으며 대답했다.
“잘 드시는 거 봤어요. 감독님께는 딱 그 정도 관심이면 충분하잖아요. 지금 잘 나가는 서준이보다 관심을 받고 싶으신 거는 아니죠?”
“끙… 됐다. 그냥 난 신경 쓰지 마세요. 차라리 그게 편하겠네.”
최은희의 관심을 원했다가 그냥 포기해 버리는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