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영화 촬영(1)
머리를 안 감았는지 머리는 떡 져 엉망이었고, 옛날에나 유행했을 법한 굵은 뿔테 안경은 자신이 불쌍한 고시생임을 알려 주는 외모의 화룡점정이었다.
이번에 맡은 배역을 위해 완벽하게 고시원에서 공부하는 장수고시생의 모습으로 변신한 이서준은,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고시원 공동 주방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당황하기 시작했다.
“어, 내 김치 어디 갔어? 분명히 냉장실 중간 칸 안쪽에 넣어 두었는데…….”
당황한 눈동자로 냉장고 내부를 샅샅이 뒤지던 그는 이내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없어. 아껴 먹으면 한 달 정도는 거뜬히 먹을 수 있었던 내 소중한 김치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어.”
털썩.
허탈함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은 이서준.
그는 지금 완벽하게 고시생 이경수가 되어 있었다.
마치 모든 희망이 사라진 사람처럼 절망하던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주저앉았다가 서서히 일어서는 그의 얼굴에는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거대한 분노가 자리하고 있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이게 도대체 몇 번째냐고. 저번 주에는 경찰 공무원 준비하는 미영이 김치가 사라졌고, 그 전 주에도 이름표까지 써 놓은 밑반찬 통을 누가 건드렸다는 제보가 있었어. 그렇다면 이번에도 우리 행복 고시원 내에 숨어 사는 양심 불량인 절도범이 내 소중한 김치통을 손댔을 확률이 높다는 건데… 이번만은 그냥 못 넘어가. 내가 반드시 이 악질 절도범을 잡아내고야 만다. 꼭!”
마치 연쇄 살인마를 반드시 잡겠다고 다짐하는 정의로운 형사와 같은 모습이었다.
“커트! 좋았어!”
모니터로 이서준의 연기 장면을 세심히 보고 있던 감독 이진섭은, 만족한 표정으로 ‘커트’를 외쳤다.
“다음 신 가기 전에 잠시 쉽시다.”
“와아! 휴식이다!”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는 촬영으로 인해 시간적으로 많은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감독 이진섭은 다음 촬영 준비를 더 꼼꼼하게 챙기기 위해 계획에 없던 중간 휴식 시간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모든 스태프는 기분이 좋아 환호성을 질렀다.
다들 쉬기 위해 움직이던 그때, 주연 배우인 이서준은 곧바로 쉬러 가지 않고 방금 찍은 장면을 꼼꼼히 모니터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진섭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겨우 세 작품째 출연하는 햇병아리 배우인 이서준에게서 어느덧 베테랑 배우의 아우라가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니터를 마친 이서준은 자신을 보고 있던 이진섭 감독을 발견하고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 감독님. 쉬는 시간에 커피 한잔하실 정도의 시간은 있으세요?”
“아, 나? 나도 한잔 먹어야지. 예정보다 2시간이나 촬영이 빨리 끝나서 좀 여유 있게 쉬면서 해도 돼.”
“그래요? 잘됐다. 그럼 저랑 같이 가시죠. 제가 찬식이한테 말해서 좋은 커피 공급해 오겠습니다. 찬식이가 제가 커피를 좋아하니까 항상 미리 챙겨 두거든요. 근처에서 커피 잘하는 곳이 어딘지 미리 다 파악해 놨을 겁니다.”
“오, 진짜? 좋다, 가자. 우리 슈퍼스타 이서준 씨가 챙겨 주는 커피는 무조건 얻어먹어야지. 돈도 잘 버니까 감독인 내가 얻어먹어도 전혀 부담도 없어. 하하하.”
“하하하, 커피는 당연히 기본이고… 여유가 있으면 제가 맛있는 식사도 대접해 드릴게요. 우리 감독인 소고기 좋아하시니 조만간 시간 잡을까요?”
“소고기? 이야, 나야 무조건 ‘콜’이지. 말만 해. 없는 시간도 내가 무조건 만들어서 나간다.”
오늘도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던 감독과 주연 배우는, 함께 커피를 마시기 위해 임시 대기실로 움직였다.
이동 중 촬영장 근처 한쪽 편에서 많은 사람이 몰려 있는 것을 본 그들은, 조금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말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뭉쳐 있죠? 보통 쉴 때는 흩어져서 쉬는 게 일반적인 모습이잖아요.”
“그건 그렇지. 뭐 전체 전달 사항을 전달하거나 이런 것도 없을 텐데, 도대체 왜 모여 있지?”
사람들이 모인 이유를 궁금해하던 그들에게 커피를 든 음향 감독이 웃으며 다가와 말했다.
“서준아, 고맙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인사를 건네는 음향 감독.
그 때문에 이서준은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네? 저한테 고맙다고요?”
“그래, 너한테 무척 고맙지. 왜냐하면, 이렇게 따뜻한 커피와 맛있는 도시락을 너 때문에 먹을 수 있는 거잖아.”
음향 감독의 말에 깜짝 놀라는 이서준.
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눈에 사람들 사이에 떡하니 자리 잡은 커피차가 보였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니 커피차가 분명했고, 거기에는 ‘서준 오빠, 촬영 열심히 하세요. ―나영이가 쏩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도 붙어 있었다.
“아, 나영이가 보냈구나…….”
누가 보냈는지 이제야 알게 된 이서준은, 자기는 한 번도 저런 걸 챙겨 주지 못했는데, 동생한테 먼저 챙김을 받았다는 사실에 크게 부끄러웠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시선이 옆으로 옮겨졌는데, 이번에는 엄청난 수의 도시락이 배달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도 배달된 도시락이 얼마나 좋은 품질의 고가의 도시락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포장부터 세팅된 음식까지 완벽함을 느끼게 하는 도시락이었다.
거기서 발견한 이름 하나.
도시락을 보낸 사람은 바로 이세린이었다.
“세린 누나도 보냈어? 와, 이거 갑자기 왜들 그런데?”
많이 놀란 나머지 약간 멍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런 고마운 선물을 받고 그냥 조용히 입 닦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얼른 매니저에게 맡겨 뒀던 전화기를 찾은 이서준은, 곧바로 커피차를 보낸 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영과 통화가 끝나면 바로 이세린에게 전화를 할 생각이었다.
* * *
[네 덕분에 내가 촬영장에서 제대로 체면치레했어. 사람들이 모두 나보고 고맙다고 난리더라. 친한 오라버니 챙겨 주는 예쁜 동생 덕분에 내 어깨에 그냥 제대로 팍하고 힘이 들어간 거지. 하하하.]
자신의 커피차 선물에 좋아하는 이서준의 목소리를 들으니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에이,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니 그만 이야기해. 그래도 오빠가 좋아하는 목소리 들으니까 보낸 보람은 있네.”
[대단한 거 맞아. 그리고 나 미리 선언한다. 나중에 너 일할 때 내가 제대로 보여 줄 거야. 그러니 미리 각오하고 있어. 가장 친한 오빠가 얼마나 동생을 챙겨 주는지 제대로 보여 줄 생각이니까. 알겠지?]
“후후, 알겠어. 각오 단단히 하고 있을게. 나도 챙겨 주는 오빠 덕분에 어깨 팡 해 보자.”
[그래, 알겠어. 쉬는 시간 동안 도시락 보내 준 세린 누나한테도 전화해야 하니 이만 끊을게. 나중에 또 통화하자. 알겠지?]
“…응, 알겠어. 촬영 잘해, 오빠.”
뚝.
이서준과의 통화는 끝났지만, 그 여운은 계속되었다.
커피차 한 번 보내 줬다고 이렇게까지 좋아하다니…….
자신의 마음이 들통날 정도로 티가 나지 않을 수 있다면 뭐라도 지금 당장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로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신경 쓰이는 부분도 있었다.
통화 마지막에 이서준의 입에서 이세린이 도시락을 보내 줬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이상하게 그 말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워낙 친한 사이인 두 사람 관계를 생각해 보면, 도시락 선물 정도는 자연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지만, 여자의 직감이란 놈으로 바라봤을 때는 결단코, 단순한 선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과도 엄청 친한 사이기 때문에 평소 이세린이 이서준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에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곧바로 이세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바로 들리는 것을 보니 이서준과의 통화는 이미 끝난 거 같았다.
[여보세요?]
“언니, 나영이에요.”
[오, 커피차 보내신 분이 먼저 전화를 주셨네. 안 그래도 내가 전화하려고 했는데… 우리 마음이 통했나 봐. 호호호.]
여리여리하게 생긴 외모와 다르게 실제 성격은 매우 털털하고 대범한 이세린답게 빼고 재는 거 없이 그냥 먼저 용건을 꺼내는 그녀였다.
그런 이세린 덕분에 나영도 한결 편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솔직한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언니도 서준 오빠랑 제대로 만나 볼 마음이 있어요?”
[…괜찮은 남자잖아. 너무 괜찮아서 탈일 정도로. 나도 외롭나 봐. 자꾸 서준이가 남자로 보이네. 너는 언제부터야?]
“나? 음…… 그리 오래되진 않았어요.”
[호호, 먼저 좋아한 건 나니까 네가 후발 주자구나. 그럼 조금은 언니에게 양보해야지, 안 그래?]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리고 상대가 너무 세서 여유가 없어요. 그러니 언니가 이해해 줘요.”
[너 의리 없다. 언제는 언니가 최고라고 하더니. 남자 앞에서는 안면몰수하는 거야? 근데, 내가 세다고 해 주니까 미워할 수는 없네. 호호호.]
“진심으로 언니 너무 세. 내가 어떻게 이겨?”
[그럼 포기?]
“아니 그건 아니고. 마음먹은 대로 되면 처음부터 시작도 안 했겠지. 언니가 호감이 있다는 건 예전부터 알았잖아. 내 마음인데… 내 마음대로 안 돼, 언니.”
[…그건 그렇지. 우리 서로 파이팅하자. 혹시 잘되는 사람 생기면 진심으로 축복해 주고. 어때?]
“언니, 당연한 소리를 왜 해? 만약 언니 말고 다른 여자면 내가 진심으로 이렇게 말 못 하지만, 언니는 내가 바로 이해한다. 언니도 그렇지?”
[응, 나도 그래. 그럼 조만간에 한번 모여서 이서준을 안주 삼아 술 한잔할까? 전력 탐색 겸 말이야.]
“좋지요. 그럼 시간 톡으로 잡아요, 언니.”
[그래.]
적과의 통화가 마무리되었다.
막강한 상대의 등장에 힘이 빠지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워낙 친한 언니이기에 같은 마음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마음이 편해지는 장점도 있었다.
그렇게 이서준 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침대에 누우며 노래를 틀었다.
어제 많이 못 잔 관계로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녀의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이서준의 노래였다.
* * *
엄마와 통화하는 신.
원래는 상대방의 목소리 없이 그냥 연기해야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 내 엄마 역할을 맡아 주신 김주은 선생님께서 일부러 옆에서 대사를 쳐 주신다고 근처 빈방에서 전화기를 들고 계셨다.
그래서 한결 편하게 감정이 잡혀서 빠르게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
어느덧 고시생 생활 3년 차에 들어선 이경수는 2평도 안 되는 개인 공간만이 허락되는 행복 고시원에서 이곳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별것 아닌 김치 한 통에 그 난리를 피우며 눈물 콧물까지 다 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언제나 자신을 생각하는 부모님과의 통화는 힘들었다.
부모님의 기대와 비교해서 너무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