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영화 촬영(2)
[공부는 잘 돼?]
“……당연하지. 이번에는 좋은 결과가 생기려고 그러는지 공부가 너무 잘 돼. 그러니 걱정하지 마셔.”
조금 전까지 미드를 보고 놀았던 탓에 양심이 많이 찔렸지만, 자신 생각에 잠 못 드는 엄마를 위해서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그래, 다행이네. 근데 엄마는 네 몸이 더 걱정이야. 엄마가 옆에 없어서 제대로 못 챙겨 주잖아. 먹을 건 제대로 챙겨 먹는지… 네 걱정 때문에 잠이 안 온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아들의 건강보다 더 신경 쓰이는 일은 없는 법이다.
그러한 엄마의 마음이 느껴지는 말에 순간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지만, 경수는 꾹 참으며 말을 이어 갔다.
“나 잘 챙겨 먹어. 여기 고시촌 근처에 먹을 게 너무 많아. 그러니 진짜 걱정하지 마. 그리고 엄마 건강 잘 챙기고. 무릎은 좀 어때?”
[많이 좋아졌어. 걱정 안 해도 돼. 그리고 돈 필요하면 혼자 끙끙 앓지 말고 바로 전화해. 엄마가 어느 정도는 바로 보내 줄 수 있으니까 말이야.]
지병인 무릎 때문에 일도 제대로 못 하면서 무슨 돈이 있다고 보내 준다며 큰소리치실까?
자신에게 가끔 용돈이라도 보내 주기 위해 아픈 무릎을 부여잡고 일터에서 고생하실 엄마의 모습이 눈에 선한 것 같아 다시 눈물이 ‘핑’ 돌았다.
“아니야, 아직 돈 있어. 그러니 내 돈 없을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그럼 이제 끊자. 내가 내일 또 전화할게.”
[그래.]
힘들었던 엄마와의 통화가 드디어 끝이 났다.
그리고 경수는 통화가 끝났는데도 고시원으로 향하지 못하고 그대로 옥상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엄마와의 통화 끝에 찾아온 먹먹함을 극복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거 같았다.
그래서 그의 눈은 복잡한 감정을 담은 채 그저 의미 없이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커트!”
그때 들리는 이진섭 감독의 외침.
이번 신도 한 번 만에 자신이 원하던 그림이 나왔는지 이서준에게 다가오는 이진섭 감독의 얼굴은 무척 밝았다.
“아, 좋아. 더 촬영할 필요 없으니 다음 신으로 가자.”
“…네.”
감독의 말에 대답하는 이서준의 모습은 평소와 다르게 힘이 없었다.
아마 감정 연기를 한 탓일 것이다.
아직 감정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이서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우울해 보였다.
그런 이서준을 보며 안쓰러운 마음이 생긴 이진섭 감독은, 그를 향해 잠시 쉴 것을 권했다.
“이번 신도 NG 없이 바로 갔으니까, 좀 쉬어도 돼. 그러니 대기실에서 편하게 쉬면서 감정 좀 추슬러.”
감독의 자상한 배려에 이서준은 바로 감사함을 표했다.
“고맙습니다, 감독님. 그럼 연기 도와주신 김주은 선생님께 인사만 드리고 좀 쉴게요.”
“아, 그래. 선생님께 인사해. 그리고 나도 방금 촬영한 신 모니터하고 나서 인사하러 간다고 설명 좀 해 드리고.”
“네.”
이진섭 감독과 이야기를 마친 이서준은, 곧바로 배우 대기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전화로 자신이 연기하는 걸 도와준 원로 연기자 김주은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도착한 대기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사람들에겐 ‘국민 엄마’라는 타이틀로 잘 알려진 김주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를 본 이서준은 감사함이 듬뿍 담긴 얼굴로 다가가 다정하게 손까지 잡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촬영이 없으신데도 이렇게 현장까지 와 주셔서 제 연기까지 도와주시니… 정말 감동했어요. 제가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해서 촬영에 차질 없게 잘할게요.”
김주은은 예의 바른 모습으로 인사를 건네는 이서준의 마주 잡은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해 주니 내가 더 고마워, 서준아. 내가 솔직히 너 만나기 전까지는 걱정이 많았는데… 실제로 너랑 연기해 보니 너무 좋다. 그래서 나도 너한테 너무 고마워.”
김주은의 이야기를 들은 이서준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걱정이요? 무슨 걱정을 하셨어요?”
김주은은 이서준의 물음에 원래 그에게 가지고 있었던 선입견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실 내가 최근에 지금 가수 활동을 활발히 하는 애와 연기한 적이 있었거든. 걔도 사실 열심히 하긴 했지만, 주연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연기를 하기엔 내공이 많이 부족하더라고. 그래서 함께 연기해야 하는 나도 많이 힘들었어. 근데 이번 작품에도 가수인 네가 주연이라고 해서 솔직히 마음에 안 들더라. 그래서 처음에 제의 왔을 때는 바로 출연 안 하겠다고도 했고.”
이서준은 자신도 몰랐던 김주은 선생님의 캐스팅 비화를 들으니 호기심이 생겼다.
“진짜요? 처음에는 안 하신다고 하셨어요?”
김주은은 이서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응, 그랬어. 근데 이 감독이 정말 끈덕지더라. 자기가 보기엔 이번 영화의 주인공 엄마 역할은 무조건 내가 해야 한다면서 하루에 몇 번씩 전화가 오더라고. 솔직히 우리 같은 배우야 감독이 내가 필요하단 말을 해 주면 제일 기분이 좋거든. 제대로 인정받는 셈이잖아. 그래서 어느 정도 고생할 각오하고 출연하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어. 근데, 웬걸? 우리 서준이는 내 예상과 다르게 천성이 연기자야. 연기로 밥 먹고 산 지 30년이 넘은 내가 함께 연기하다 보면 저절로 긴장하게 될 정도로 연기를 잘하니까. 그래서 내가 요즘 기분이 너무 좋아.”
결국, 자신이 연기를 잘하고 있다는 대선배의 칭찬이 담긴 말인지라 이서준은 쑥스러워하며 다시 김주은에게 인사를 건넸다.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김주은 인사를 건네는 이서준을 흐뭇하게 쳐다보며 그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서준아, 근데 날 부르는 호칭을 계속 선생님이라고 할 거야?”
“네? 호칭이요? …그럼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혹시 자신이 실수한 것 같은 분위기에 이서준은 다시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물었다.
김주은은 그런 이서준이 귀여운지 정말 다정한 눈빛으로 다시 말했다.
“영화 속에서는 우리가 모자지간이니 촬영할 때만이라도 그냥 엄마라고 해. 나도 서준이랑 연기하다 보니 진짜 아들같이 느껴지니까.”
“…네? 엄마요?”
“왜, 싫어?”
“아뇨, 너무 좋죠.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솔직히 저도 너무 좋습니다. 그럼 허락하셨으니 이렇게 부를게요. 엄마.”
“호호, 그렇지. 우리 서준이가 엄마라고 해 주니 기분이 너무 좋네. 호호호. 이렇게 잘생긴 아들 생긴 거 기념하는 뜻에서 내가 맛있는 거 사 줘야겠다. 차라도 먹을까?”
“그럴까요, 엄마? 하하하.”
어느새 진짜 모자지간처럼 돈독해진 두 사람.
호칭을 바꿔서 그런지 더욱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었다.
김주은과 편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이서준의 속마음은 무척 흐뭇했다.
평소에도 존경하는 선배 연기자가 이렇게 자신을 살갑게 대해 준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연기를 제일 잘한다는 평가를 받는 김주은이었기에 그 누구보다 기뻤다.
* * *
연극판에 미치면 답도 없다는 옛말이 있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보게 된 연극 한 편 덕분에 인생이 완전히 달라진 세 남자는 어떻게 보면 이 말에 가장 어울리는 예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정말 오랜만에 삼겹살집에 오붓하게 모여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소주 한 잔을 시원하게 들이켠 병수가 옆에 앉은 친구에게 물었다.
“너 요즘은 알바 안 해도 먹고살 만하지?”
고등학교 친구이자 같은 극단에서 함께 고생한 오래된 친구의 물음에 무명 배우인 호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아직 그 정도는 아니야. 얼마 전에 우리 집사람이 아기 낳은 거 그새 잊었냐? 아기가 생겼으니 돈 벌 수 있을 때 무조건 많이 벌어야 해. 그래서 시간 여유 생길 때마다 새벽 택배 배송 일 아직도 하고 있다.”
“아, 맞다. 너 아기 낳았지… 아기가 생기면 엄청나게 돈 많이 든다고 하던데… 그래도 우리 중에는 가장 유명한 너도 아직은 멀었구나.”
“한참 멀었지… 우린 언제쯤 돈 걱정 없이 마음껏 연기할 수 있을까?”
“글쎄… 그런 날이 오긴 할까?”
배고픈 연기 일을 하는 연극배우들답게 돈 이야기가 나오자 어느새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숙연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오랜만에 회포를 푸는 자리가 이렇게 처지는 분위기로 변하는 게 싫었던 주석은, 주제를 바꾸기 위해 요즘 촬영에 한창인 호진에게 물었다.
“호진이 너 요즘 영화 찍지?”
“응. 경수의 사랑 찍고 있어.”
“그거 미라클 찍었던 이진섭 감독님 작업이잖아.”
“그렇지.”
“촬영장 분위기는 어때?”
“좋아.”
어느새 영화 촬영 이야기를 주제로 다시 열심히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 세 사람이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가다 보니 어느새 이서준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너 이서준이랑 대화는 해 봤어?”
친구의 물음에 호진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 당연하지. 우리 서준이가 날 얼마나 따르는데. 나만 보면 형, 형 이러면서 졸졸 따라와.”
호진의 대답을 들은 병수는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서준이 이 자리에 없다고 친구 호진이 장난삼아 허풍을 치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게 지금 여기에 이서준 없다고 너무 지르시네. 나중에는 완전 친동생이라고 하겠다. 요즘 대한민국에서 최고 인기 있는 이서준이 내 동생이라고.”
자신의 말을 농담처럼 받아들이는 친구의 모습에 호진은 발끈하며 대답했다.
“어, 너 안 믿네? 그럼 우리 내기할까?”
갑자기 등장한 내기라는 단어에 나머지 두 사람도 귀를 쫑긋하며 물었다.
“무슨 내기?”
“내가 서준이랑 전화 통화할게. 만약 내 말이 맞으면 오늘 술값은 너희가 사. 만약 내가 말한 것처럼 나하고 서준이가 친한 사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면 내가 술을 살게. 어때? 할까?”
“좋아, 콜.”
주석의 콜 사인에 호진은 호기롭게 자신의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때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호진을 병수가 빠르게 제지하며 말했다.
“야, 나도 무명이지만 연예계 생활 10년 차다. 선 넘지 마라, 호진아. 네가 장난으로 그러다가 주연 배우가 빈정이라도 상한다면 그때부터 고달프다.”
호진은 진심으로 걱정해서 만류하는 친구 병수를 보고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나도 그 정도는 알지. 근데 서준이는 진짜라니까. 원래라면 우리 같은 무명 배우랑 잘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인기 많은 사람이 서준이가 맞지. 근데 애가 진짜 진국이야. 그냥 통화할 테니 듣고 판단해.”
기어이 통화 버튼을 누르는 호진.
그런 그의 모습을 친구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여보세요?]
전화기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
분명 이서준의 목소리가 맞았다.
목소리만 듣고 바로 긴장하는 두 명의 친구들과 달리 호진은 정말 편한 얼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우리 서준이 뭐 해? 바빠?”
[아, 호진이 형이구나. 죄송해요. 발신자 표시 못 보고 전화 받았어요. 지금 뭐 사고 있느라고요.]
“그래? 그럼 바빠서 통화 힘들겠네? 조금 이따 할까?”
[아이고, 괜찮아요, 형. 우리 호진이 형의 통화는 무슨 일을 하고 있더라도 받아야죠. 제가 형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잖아요. 근데 형도 밖이에요?]
“응, 친구들이랑 소주 한잔하고 있어.”
[어, 혹시 어디신데요?]
“홍대 앞. 왜?”
[와, 잘됐다. 홍대 앞이면 제가 잠시만 형 뵈러 가도 될까요? 드릴 게 있어서요.]
“그래? 그럼 여기로 와. 여긴…….”
주소를 말해 준 호진은 그렇게 통화를 종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