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경수의 사랑(2)
그러나 그녀에게 직접 들어 보니 작업 과정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의견 충돌 정도의 문제가 아닌 거 같았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애슐리는 까칠한 편이긴 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을 진행하기 위해 없는 말을 만들어서 할 정도로 삐뚤어진 사람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자신의 책상 의자에 앉아 있는 애슐리를 향해 마이클이 물었다.
“진짜 문제가 뭐야?”
그의 진지한 물음에 애슐리 역시 조금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음악적으로 교감이 전혀 안 돼. 그 녀석들 머릿속에 있는 사람은 지금의 내가 아니라 15년 전의 나야. 지금의 난 그때와 너무 다르다고. 그때의 음악이 아니라 지금 내 나이에 어울리는 음악을 해야 하는데, 그 녀석들은 과거의 내가 했던 음악을 반복하고 싶어만 해.”
“…….”
애슐리의 대답을 들은 마이클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만약 지금 애슐리가 말한 대로라면 그건 정말 큰 문제였다.
프로듀서와 아티스트가 바라보는 그림이 완전히 다르다는 뜻이었기에, 진짜 그녀의 의견대로 팀을 새롭게 꾸려야 되지 않을까 하는 중대한 결정을 위한 깊은 숙고를 해야만 했다.
마이클이 잠깐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애슐리는 마이클의 의자에 앉아 고민 중인 그를 기다려 주었다.
자신의 오랜 친구인 마이클이라면 분명히 현명한 판단을 내려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녀는 조용히 그가 고민하게 내버려 두었다.
덕분에 무료해진 그녀는 자연스럽게 마이클의 책상을 둘러보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그가 보고 있던 모니터 화면도 눈에 들어왔다.
마이클이 보고 있던 모니터에는 웬 동양인 남자가 방송에 출연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장면이 떠 있었다.
그 모습에 호기심이 동한 애슐리는 마이클이 사용하던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일시 정지된 영상을 다시 재생시켰다.
‘어! 이거 내 노래잖아.’
영상 속 남자, 아니 동양인 가수는 놀랍게도 자신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애슐리는 마침 보게 된 영상의 주인공이 자신의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에 놀라 계속해서 영상을 보게 되었고, 이윽고 그 남자의 목소리에 반해 버렸다.
그는 아주 매력적인 보이스를 가진 가수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편곡한 자기 노래를 듣고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녀를 가장 많이 놀라게 만들었던 부분을 한 가지만 꼽으라면 그녀는 주저 없이 편곡이라고 답할 것이다.
‘내 노래를 이렇게 부르다니…….’
스르륵.
노래를 듣다 보니 저절로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다시 한번 진심으로 놀랐다.
‘내가 남의 노래를 듣고 소름이 돋다니… 이게 도대체 얼마 만에 생긴 일이지?’
누군가의 노래를 듣고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한 것은 생각해 보니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단언컨대 최근에는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영상이 끝나고도 그 여운이 계속 마음에 남아 있을 무렵, 마이클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의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애슐리. 그냥 팀을 다시 짜도록 해. 좋은 결과물을 얻으려면 작업 과정이 만족스러워야 하는 법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네 팀은 빵점짜리 팀일 뿐이지. 그러니 팀을 깨는 거에 대해 아쉬워할 필요가 전혀 없겠어.”
고민하던 큰 결정을 내리는 제임스.
그러나 어느새 그녀의 머리에서는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마이클, 이 남자 도대체 누구야?”
그녀의 뜬금없는 물음에 마이클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누구?”
“이 영상 속에서 노래하는 남자가 누구냐고? 나 오기 전에 네가 보고 있었으면 누군지 잘 알 거 아냐.”
그제야 그녀가 누구를 물어보는지 알아들은 그는, 그녀가 궁금해하던 사실에 대해 알려 주기 시작했다.
“아, 그 친구는 한국의 유명한 가수야. 그리고 훌륭한 작곡가이기도 하지. 그리고 그 영상은 그 친구가 한국의 TV 프로그램에서 노래한 유명한 영상이고. 아, 그러고 보니 지금 그 친구가 부르는 노래가 네 노래구나. 편곡 좋지?”
“응, 마음에 들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애슐리.
이서준에게서 눈을 못 떼던 그녀는, 이윽고 큰 결심을 한 듯한 표정으로 마이클에게 부탁했다.
“마이클, 나 이 친구 만나 보고 싶어. 가능하지?”
“뭐?”
마이클 본은 왠지 모를 불길한 기분을 느끼며 애슐리를 바라봤다.
* * *
영화 ‘경수의 사랑’의 촬영은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영화 내용상 특별한 세트를 만들 필요가 없었고, 섭외가 힘든 장소에서 촬영을 진행할 일도 전혀 없었다.
영화를 구성하는 주된 내용 자체가 우리의 삶을 담은 드라마적인 요소가 많은 영화였기에 그저 배우들의 연기만 제대로 만들어지면 마치 물 흘러가듯 부드럽게 촬영을 진행할 수 있는 영화였다.
그리고 ‘경수의 사랑’ 촬영 팀은 배우들이 연기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가진 팀이었다.
우선 배우들 간의 사이도 너무 좋았고, 촬영 스태프도 배우들이 연기에 집중하기 위한 최적의 환경을 만드는 것에 각고의 노력을 다 쏟아부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촬영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추가 편집도 빠르게 끝났다.
원체 대본이 잘 나왔었고, 이진섭 감독의 신 구성이 군더더기 없이 매우 깔끔했기 때문에 편집에도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생각보다 빨리 마무리된 영화.
결국, 영화 제작사에서는 개봉 일자를 원래 계획보다 앞당기게 되었다.
그렇게 결정한 이유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주연 배우인 이서준의 인기 때문이었다.
지금 현재 대한민국 내에서 이서준이 단연코 최고였다.
명실상부한 최고 인기 스타 이서준이 주연인 영화였기 때문에 그의 인기가 이렇게 뜨거울 때 영화를 개봉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이서준의 첫 영화는 원래의 계획보다 훨씬 일찍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 * *
오늘도 금희는 자신의 집에 마련된 개인 스튜디오에서 방송에 열중하고 있었다.
오늘의 주제는 소통이었기에 시청자가 실시간으로 작성하는 채팅을 읽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요즘은 로퍼 신발보다 운동화를 더 많이 신는 추세야. 내가 봐도 운동화 신은 모습이 더 예쁘더라. 그러니 오빠, 로퍼 신발은 이제 더는 사지 마.”
개인방송이라서 그런지 시청자들과 가까운 지인 사이처럼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그녀의 모습은 베테랑 인터넷 방송인 그 자체였다.
시청자와 열심히 소통하며 방송하던 그때, 옆에 놓아둔 자신의 스마트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띠리링.
“어, 전화 왔네.”
전화벨 소리를 들은 금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향했다.
그리고 스마트폰 액정 화면에 뜬 발신인의 이름을 확인한 그녀의 눈이 화들짝 놀라 커졌다.
“어! 여, 여러분 미안. 나 중요한 전화라서 밖에 나가 잠시만 통화하고 올게. 기다려 줘.”
인터넷 방송이기 때문에 중요한 전화 같은 경우에는 방송 중에 받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래서 팬들도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팬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금희의 표정은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밖에 도착한 후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그녀.
“여, 여보세요?”
대단한 사람의 전화인지라 평소보다 많이 긴장해서 말까지 더듬는 그녀였다.
[안녕, 금희야. 오랜만에 연락해서 미안.]
전화를 건 주인공은 다름 아니라 이서준이었다.
“아, 아니에요. 오빠 영화 촬영한다고 바쁜 거 이미 알고 있었는데요. 오늘은 촬영이 없어요?”
저번에 이서준을 도와준 것이 계기가 되어 그때 모였던 사람들끼리 가끔 서로의 안부 정도는 묻는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꾸준히 인연을 이어 오다가 가까운 시일 전에 이서준의 제의로 함께 식사를 한 번 했었고, 그 뒤로 금희는 이서준을 오빠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렇게 전보다 가까워진 두 사람은 서로의 근황 정도는 꿰고 있었기에 이서준이 지금 영화 촬영에 한창이라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촬영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어.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전화했는데… 혹시 시간 되면 내 영화 시사회 때 올 수 있어?]
생각지도 못한 영화 시사회 초대였다.
그래서 금희는 많이 당황한 상태로 되물었다.
“영화 시사회요? 오빠 지금 저를 영화 시사회에 초대하는 거예요?”
[하하,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냥 너랑 기용이, 그리고 종철이 형하고 나르미 누나한테 시사회에 와 줄 수 있냐고 전화 돌리는 중이야. 초대권은 많이 받았는데, 너도 알다시피 네가 아는 사람이 많이 없잖아.]
이서준은 그냥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금희는 이미 크게 감동한 상태였다.
그냥 연예인도 아니고 지금 현재 대한민국 최고 스타라고 할 수 있는 이서준이 자신의 영화 시사회에 나를 초대하다니…….
이런 생각이 들어 금희는 쉽게 진정하기 힘들 정도로 감격했다.
“오빠, 저 꼭 갈게요. 시간이 없으면 억지로 만들어서라도 갈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이렇게 초대해 줘서 너무 고마워요, 오빠.”
[와 줄 거야? 정말 고마워, 금희야. 네가 와 준다고 해 줘서 너무 고맙다. 그럼 시사회 장소와 날짜, 그리고 시간은 톡으로 보내 줄게. 그리고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네, 오빠.”
이렇게 이서준과의 갑작스러운 통화를 마친 금희는,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개인 스튜디오로 돌아왔다.
전화를 받기 전과 확연히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금희를 본 시청자들은, 방금 누구와 통화했냐고 그녀에게 캐묻기 시작했고, 말을 아끼던 금희는 시청자들의 집요한 추궁에 어쩔 수 없이 이서준과 통화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 정도는 말해도 상관없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청자들의 반응은 그녀의 예상과 너무 달랐다.
― 구라치지 마셈.
― 오늘도 월클병 오지네. 바쁜 이서준이 너한테 왜 전화를 하고 있냐
― 맞음. 얘 말을 그대로 믿는 호구는 없죠?
시청자들은 금희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예전에도 금희는 이서준과 연락하고 지낸다는 사실을 시청자에게 살짝 흘리는 형식으로 자랑을 했었는데 그때도 시청자들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시청자들의 생각은 이러했다.
연예인 중에서도 제일 잘 나가는 이서준이 아무리 유명하다곤 해도 인터넷 방송이나 하고 있는 금희와 연락하고 지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진짜야! 진짜 서준 오빠가 먼저 전화한 거였어!”
그녀가 너무 억울한 나머지 강하게 항변했지만, 그런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은 계속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너무 억울해서 눈물까지 눈에 맺히는 그녀.
시청자들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연기한다고 놀렸고, 일부 시청자들은 네 말이 정말이라면 지금 바로 이서준에게 전화를 걸어 증명해 보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서 고민에 빠진 금희.
억울한 마음에 당장이라도 전화기를 들고 통화 버튼을 누르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톱스타 이서준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다 보니 쉽게 손가락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놀림이 계속 이어지자 마침내 화가 머리끝까지 난 금희는 결국 이서준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