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윤레스토랑(1)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된 김진영은, 황급히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전화기를 들며 자신을 바라보는 직원에게 말했다.
“여기서 땡겨 받을게.”
“네.”
그의 말을 들은 그녀는 전화 연결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사무실 전화기를 이용하여 대기 중인 전화를 돌리는 김진영.
다행히 전화가 끊기지 않았는지 곧바로 그의 귀에 낯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미스터 본. JYK입니다.”
상대 역시 김진영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것인지 반가워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반갑습니다, 미스터 킴. 제가 부탁할 게 있어 이렇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혹시 지금 전화 통화를 하시기에 불편한 상황은 아닌가요?]
“아, 아닙니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하하, 다행이군요. 미스터 킴, 혹시 애슐리 브록을 아시나요?]
“애슐리 브록이요? 당연히 알죠. 저 역시 그녀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 중 하나이니까요.”
경영자이기 이전에 작곡가이자 가수인 김진영이 수많은 음악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레전드 가수 애슐리 브룩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하, 애슐리가 이 말을 전해 들었다면 매우 기뻐할 만한 답변이시네요. 제가 오늘 미스터 킴에게 전화를 드린 이유가 바로 애슐리 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한국의 JYK에 소속된 한 가수이자 작곡가인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하거든요.]
JYK 소속 사람 중에 레전드 애슐리가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
김진영은 그 사람이 누군지 짐작되지 않아 매우 궁금해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군가요?”
[그 사람은 바로 이서준입니다.]
“아, 이서준….”
예상 못 한 답변에 김진영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통화 중인 마이클 본은 그런 반응을 예상했는지 개의치 않고 대화를 이어 갔다.
[애슐리가 우연히 이서준 씨가 자신의 노래를 편곡해서 부르는 방송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그 영상을 보자마자 무엇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서준 씨에게 곧바로 관심을 가지더군요. 그리고 그가 한국의 스타인 이서준 씨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저에게 진지하게 부탁했습니다. 이서준 씨를 만나게 도와달라고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미스터 킴과 통화를 하게 되었고요.]
“아, 그러시군요….”
그제야 마이클 본이라는 거대 음반사 대표가 자신에게 전화를 건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애슐리는 이서준 씨를 만날 수 있다면 본인이 직접 한국으로 가겠다는 마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서준 씨만 괜찮으시다면 좋은 음악적 친구로서 만남을 추진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의견을 전달해 봅니다.]
김진영은 이 사실을 이서준이 듣는다면 매우 좋아할 거라 확신했다.
왜냐하면, 이서준이 애슐리 브룩의 광팬이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듣기로 자신의 용돈으로 가장 처음에 산 가수의 앨범이 애슐리 브룩이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애슐리 브룩이 직접 한국으로 오겠다고 했다는 말이 의외였다.
자신이 직,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그녀는 무척 자존심이 강한 편이어서 동료 가수들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쉽게 말해 매우 까탈스럽다고 전해 들은 그녀가 이서준을 만나기 위해 이 먼 나라까지 온다?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서준이 지금 미국에 있네. 그렇다면 애슐리 브룩과 만나기 너무 좋은 상황이잖아….’
그 생각이 머리에 떠오른 김진영은 곧바로 마이클 본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미스터 본이 전화 주신 이 시점에 서준이는 미국에 있네요. 하늘도 두 사람의 만남을 원하는 것일까요? 하하하.”
마이클 본은 김진영의 농담 속에 담겨 있는 이서준의 지금 현재 위치를 듣고 깜짝 놀랐다.
[네? 미국이요? 아니 이서준 씨가 지금 미국에 있습니까?]
“한국 예능 프로그램 촬영차 뉴욕으로 갔습니다. 아마 지금쯤 공항에 도착했을 거 같네요.”
[오, 그렇습니까?]
이서준이 미국에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알게 된 마이클 본의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밝고 경쾌하게 변하고 있었다.
* * *
갑작스럽게 끌려온 미국.
나는 비행기 안에서 나정석 피디님의 진심 어린 사과를 몇 번이나 거듭해서 받아야만 했다.
원래라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우격다짐 식으로 게스트를 섭외하진 않는데, 이번에는 상황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며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사과했다.
너무나 미안해하는 나 피디님을 보며 내가 오히려 민망해질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거듭 사과하는 나정식 피디님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제 사과 그만하셔도 돼요. 상황 충분히 이해했어요. 그리고 이렇게 저랑 눈 마주칠 때마다 사과하시면 제가 불편해요. 미국에서 촬영 열심히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편하게 대해 주세요.”
내 말을 들은 나 피디님은 고맙다는 말을 끝으로 더는 사과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신기한 점은 상황을 받아들이니 마음도 편해졌다는 것이다.
이게 내 입장에선 참 좋은 점이었다.
사실 최근에 뜨거웠던 열애설 덕분에 아무리 노력해도 도통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는데, 머나먼 타국인 미국으로 향하게 되니 이상하게도 쉽게 마음이 편해지는 신기한 현상을 겪었다.
그리고 과거 나정석 피디님의 프로그램에서 지금 내가 당한 납치 비슷한 장면과 유사한 상황을 TV로 보면서 재밌게 봤는데, 이번에 내가 그런 납치를 당하는 입장이 되어 보니 의외로 상상만 하던 TV 속 상황이 진짜 현실에 나타난 것 같아 무척 재미있었다.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다 보니 비행시간은 무척 길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비행기 안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그 덕분에 출연진하고도 금방 친해졌다.
아직 내 연기 경력이 미천해 다른 출연진 세 분과 함께 작품을 한 적은 없어 어려웠지만, 대화를 시작하니 의외로 우리를 감싸던 어색함은 금방 사라져 버렸다.
출연진 중 최연장자인 윤서정 선생님은 나를 보며 이렇게 물었다.
“너 대학에서 연기 전공했니?”
윤서정 선생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자세히 설명드렸다.
“아닙니다. 저 공대 나왔습니다. 연기를 학교에서 배워 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 학교 어딘지 물어도 돼?”
“네. 한국대 졸업했습니다.”
“뭐? 진짜?”
“네.”
내가 한국대 출신이란 사실을 안 선생님은 잠시 놀라는 표정을 지으시더니 곧바로 짓궂은 농담을 던지셨다.
“너 의외로 재수 없는 캐릭터구나.”
“네?”
졸지에 재수 없는 사람이 된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선생님을 바라봤다.
선생님은 그런 나를 보며 그 이유를 설명하셨다.
“아니 얼굴도 잘생긴 데다 노래도 잘하고 공부도 잘했다는 뜻이잖아. 그런 남자 완전 재수 없어. 사람이 어디 부족한 부분도 있어야 사람 같지. 너처럼 그러면 인간적으로 안 보여.”
표정이 농담을 건네시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려 주고 계셨기에 나는 당황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웃으며 선생님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의 농담은 나를 뛰어넘어 내 옆에 앉은 이정진 형님에게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정진이 너도 뉴욕대 나왔지? 이번에 함께 촬영하는 남자 두 명이 다 재수 없는 스타일이네. 안 그러니 영미야?”
동의를 구하는 선생님의 말씀에 정영미 선배님은 빙그레 웃기만 하셨다.
정영미 선배님은 ‘너무 착하다.’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납치 시 동행했던 이정진 선배님도 직접 이야기를 나눠 보니 무척 유머러스한 분이라는 걸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이정진 선배님은 윤서정 선생님의 농담에 이렇게 대꾸하셨다.
“선생님, 전 서준이랑 다릅니다.”
“뭐가 달라? 네가 나온 뉴욕대도 세계적인 명문대잖아.”
“그건 맞죠. 근데 전 서준이처럼 모두 게 완벽하진 않습니다. 전 노래를 정말 못하거든요.”
“뭐? 하하하. 그럼 노래 빼고는 다 똑같니?”
“잘생긴 건 비슷하죠. 서준이 보니 제 소싯적 얼굴이 떠오르네요. 저희 닮지 않았나요?”
이정진 선배님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선생님은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 닮았어. 넌 옛날식 미남이고, 서준인 요즘 미남이야. 시대가 다른데 어떻게 미남이라고 닮았겠니?”
“…그런가요?”
이렇게 농담을 나누며 친해진 우리 네 사람.
출연진들과 많이 친해지면서 저절로 이들과 함께하는 뉴욕에서의 촬영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었다.
* * *
뉴욕에 도착한 ‘윤레스토랑’ 촬영 팀은 쌓인 여독도 풀리기 전에 곧바로 촬영에 들어가야 했다.
원체 먼 미국에서의 촬영이라 비행기를 타고 오랜 시간 이동해야 했기에 촬영 스케줄은 저절로 타이트해질 수밖에 없었다.
출연진 모두가 오랜 비행으로 피곤했지만, 빡빡한 촬영 스케줄에 따라 곧바로 촬영에 돌입하는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 줬다.
“제발 잘해 줘라… 제발….”
바쁘게 돌아가는 촬영장.
프로그램의 수장인 나정석의 시선은 처음으로 함께 촬영하는 이서준의 얼굴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네 명의 출연진 중 이서준을 뺀 나머지 세 명은 이미 검증이 된 사람들이었다.
전 시즌 촬영을 함께한 경험이 있었으니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나 피디 역시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에 대한 걱정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서준은 달랐다.
그는 이번이 처음으로 함께하는 촬영이었다.
아무리 주변에서 사람 괜찮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지만, 실제로 겪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걱정이 없을 수는 없었다.
숙소에서 도망간 코디가 미리 준비해서 제작진에게 맡겨 둔 가방에서 편한 옷을 꺼내 갈아입은 이서준은, 촬영 초반부터 매우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선생님 그거 제가 들게요. 이리 주세요.”
무거운 물건을 든 선생님 내지 선배의 모습을 보면 냉큼 달려가서 본인이 대신 들려 하였고, 해야 할 일이 생기면 딴 데 눈 돌리지 않은 채 땀까지 흘려 가며 열심히 임하였다.
요리에 쓸 밑재료를 손질한다고 너무 열심히 움직인 덕분에 땀을 물 흐르듯이 흘리는 이서준을 보며 정영미는 직접 본인의 손수건으로 닦아 주는 애정을 보였다.
“어머, 서준아. 땀 좀 닦아. 너 왜 이렇게 열심히 해? 좀 쉬어 가면서 해. 이러다 쓰러지면 어떡해?”
그리고 어느새 옆에 나타난 이정진의 손에는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들려 있었다.
그는 커피를 곧장 이서준에게 건네며 웃으며 말했다.
“그래 좀 살살해. 네가 그렇게 열심히 하면 상대적으로 내가 일 안 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나 힘드니까 보조 좀 맞춰. 알겠지?”
이정진이 이런 농담 섞인 투정을 해야 할 정도로 이서준은 맡은 바 일은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일까지 찾아다니며 열심히 촬영장을 돌아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