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윤레스토랑(3)
이정진과 농담을 주고받던 윤서정은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갑자기 노래시키는 건 좀 아닌 거 같아. 왜냐하면, 연기자인 우리한테 어떤 사람이 갑자기 ‘저 팬입니다. 연기 좀 보여 주세요.’라고 한다면 얼마나 어이가 없겠어.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이곳에서 서준이한테 노래하라고 하는 것은 너무… 어머, 영미야. 너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니?”
지금 노래를 하라고 하는 건 너무 예의가 없는 행동이라고 말하려던 윤서정은, 크게 실망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정영미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래서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그렇게 서준이 노래가 듣고 싶어?”
“…네. 진짜 팬이에요.”
너무나 간절해 보이는 그녀의 눈빛에 마음이 흔들린 윤서정은, 곧 그녀에게 졌다는 듯한 표정과 몸동작을 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겠다, 알겠어. 영미가 저런 눈으로 부탁하는데 내가 어떻게 안 들어주니? 그래, 내가 모두를 대표해서 욕 좀 먹을게. 내가 무슨 인터넷을 자주 하는 사람도 아니고 괜찮아… 서준아.”
주방 안에 있던 의자에서 일어선 그녀는 곧바로 밖으로 걸어 나가며 홀에서 컵을 닦고 있는 이서준을 크게 불렀다.
그녀의 부름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오는 이서준.
윤서정은 그런 이서준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서준아, 오늘 식당에서 네 미국 팬도 만났고… 우리 영미도 네 진짜 팬이라고 하더라. 그러니 기왕 이렇게 된 거 간단하게 노래 한 곡 불러 줄 수 있겠어? 저기 피아노 치면서 노래해 주면 안 될까? 혹시 다른 게 필요하면 나한테 말하고. 내가 나 피디에게 부탁해서 바로 구해 줄게.”
노래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그녀.
실례인 줄 알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서준은 미안해하는 그녀가 민망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어떤 준비도 따로 하지 않은 채 그냥 앞치마를 입은 그 모습 그대로 피아노로 가서 앉는 이서준.
그는 처음 쳐 보는 피아노라 현재 조율 상태가 어떤지 전혀 몰랐기에 곧바로 간단한 연주를 통해 피아노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
그러자 홀에 세팅된 그랜드피아노에서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그것을 들은 촬영 스태프는 지금 이서준이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하는지 빠르게 눈치챘다.
그래서 곧바로 이서준이 노래할 때 필요한 마이크까지 빠르게 세팅해 주는 센스를 보여 주었다.
피아노 상태가 너무 좋다는 것을 확인하고 마이크 준비가 끝나자 그는 준비된 마이크를 통해 식사 중인 소녀에게 물었다.
“아까 경황이 없어서 못 물어봤는데, 이름이 뭐예요?”
이서준의 물음에 다시 붉어진 얼굴로 대답하는 소녀.
“에이미예요.”
“아, 에이미… 너무 예쁜 이름이네요. 오늘은 에이미를 위해 노래할게요. 왜냐하면, 에이미는 제 미국 팬 1호니까요.”
이서준의 멘트를 듣고 다시 얼굴이 붉어지며 부끄러워하는 소녀.
그러나 지금 그녀의 얼굴은 그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
감미로운 연주와 함께 드디어 시작되는 이서준의 노래.
우린 다른 곳에서 태어났죠.
그래서 사랑한다는 표현도 다 달라요.
그러나 우린 알죠.
멀리 떨어져 만나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가 서로 통했다는 사실을요.
“와….”
이서준의 노래를 들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이서준의 감미로운 노랫소리에 놀란 탓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욱 놀라게 된 이유는 지금 이서준이 부르고 있는 노래가 바로 BTC의 ‘contact’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서준이란 가수를 알게 된 계기가 된 곡이라고 설명해 주었는데, 그것 때문인지 이서준은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는 너무 좋았다.
곡을 작곡한 장본인이라서 그럴까?
너무 좋은 나머지 이 곡을 이서준이 발표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이 저절로 떠오를 정도로 멋진 노래였다.
어느새 노래의 주인공이라 볼 수 있는 에이미를 비롯한 식당 내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서준의 노래에 흠뻑 빠져 있었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이서준이 노래 부르는 모습을 영상에 담는 에이미.
아마도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저렇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이 저절로 들 정도로 이서준의 노래는 너무 좋았다.
노래에 흠뻑 빠져 빠르게 흘러간 몇 분.
이서준의 노래가 끝나자 식당 안에 있던 손님들은 물론이고 프로그램 출연진, 그리고 촬영 스태프 모두가 감동한 마음을 담아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짜 박수였다.
이서준이 부른 BTC의 ‘contact’를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윤서정도 자신의 옆에서 감격한 마음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고 있는 정영미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네가 꼭 듣고 싶다고 할 정도로 노래를 잘하긴 하네. 나도 소싯적 노래하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던 적이 있었거든. 그래서 듣는 귀는 엄청 까다로운 편인데… 서준이는 천생 가수가 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야. 저런 얘가 가수를 안 하면 누가 가수 하니, 안 그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윤서정의 말에 여전히 감탄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치는 정영미.
그녀는 이서준의 라이브를 직접 직관한 탓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얼굴에 트레이드 마크인 보조개를 진하게 만든 이정진도 조용히 혼잣말을 읊조렸다.
“서준이 콘서트 하면 한번 보러 가야겠다. 노래가 좋네. 너무 잘하기도 하고….”
쑥스러움 때문에 본인 역시 매우 감동했다는 말을 대놓고 하지는 못하는 그였다.
앵콜, 앵콜, 앵콜.
멋진 노래를 들었기에 지금 이곳이 콘서트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앵콜’이 나오고 있었다.
이서준 역시 즐거운 마음으로 노래했고, 더군다나 여기 있는 모두가 자신의 노래를 좋았다고 표현해 주고 있었기에 기분이 더욱 좋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앵콜 요청에 따라 한 곡을 더 부를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에이미의 부모님을 향해 물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혹시 좋아하는 가수가 있으세요?”
그의 물음에 에이미의 아버지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우리 부부는 마이클 존슨의 오래된 팬이에요. 그의 콘서트에 참석했던 게 우리에게 정말 행복했던 순간 중의 하나였죠.”
마이클 존슨.
이서준의 입장에도 매우 큰 의미를 지닌 사람의 이름이었다.
왜냐하면, 이서준이 음악에 빠진 계기가 된 사람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서준은 곧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
“오!”
피아노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환해지는 에이미 부모님의 얼굴.
그들은 이서준이 지금 연주하는 곡이 어떤 곡인지 단박에 알아챘다.
“…내가 식당에서 이 명곡을 다시 듣게 되다니….”
지금 이서준이 연주하는 곡은 하늘나라에서 쉬고 있을 팝의 황제 마이클 존슨의 ‘빌리에게’였다.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곡이라 칭해질 정도의 명곡이었기에 전주만 들어도 누구나 알 만큼 모든 사람에게 널리 알려진 곡이었다.
이서준이 마이클 존슨의 수많은 곡 중 가장 먼저 들었던 곡이 바로 이 곡이었다.
처음 이 곡을 듣고 받았던 충격은 지금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어쩌면 그랬기에 이 곡을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레 연주했는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이서준의 노래에 자연스럽게 박자를 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시 놀라는 사람들.
이서준은 마이클 존슨의 ‘빌리에게’를 자신만의 감성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원곡과 비슷하면서도 지금 스타일의 덧대어지는 ‘빌리에게’는 서서히 이서준만의 ‘빌리에게’로 변하고 있었다.
연주만으로도 사람들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던 이서준.
그리고 그가 드디어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치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예쁜 여자였지.
그래서 나는 그녀를 본 순간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고 말았어.
1983년에 발표된 이 곡이 뉴욕 시내 한복판에 있는 식당에서 새롭게 탄생하고 있었다.
원곡에 담겨 있는 그루브가 그대로 살아 있는 이서준의 ‘빌리에게’.
치밀어 오르는 흥을 참지 못한 에이미의 부모님은 의자에서 일어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춤을 잘 추는 것은 아니지만, 진심으로 치밀어 오르는 흥대로 몸을 흔들고 있었기에 그 모습 그대로 너무나 자연스럽고 멋져 보였다.
이서준 역시 신이 났다.
그래서 무려 8분 동안이나 노래를 부르고 나서야 즉흥 공연을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다.
짝짝짝.
다시 우레와 같이 터지는 박수.
이서준은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서서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는 모든 이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 모습을 본 나정석 피디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와, 이거 대박 장면 나왔다. 대박이 나왔어….”
무려 15년이 넘는 경력의 나정석 피디는 지금 이 장면이 얼마나 시청자들에게 사랑을 받을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이서준을 출연한 윤레스토랑 미국 편 시청률이 얼마나 높게 나올지 본인 스스로도 기대가 생길 정도였다.
그래서 속으로 만세를 100번 정도 부르며 즐거워했다.
한편, 이서준이 ‘빌리에게’를 부른 장면을 고스란히 자신의 스마트폰에 담은 에이미.
그녀는 자신의 단짝 친구에게 이 장면을 보여 줄 생각에 벌써부터 흥분되기 시작했다.
에이미는 이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무심코 보낸 이 영상 때문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촬영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출연진은 간단하게 라면을 끓여 먹었다.
“우리 서준이가 라면도 잘 끓이네. 요리도 할 수 있어?”
정영미의 물음에 이서준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간단한 음식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시장에서 함께 일하시는 바람에 여동생 식사를 제가 많이 챙겼거든요. 그래서 잘은 못해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우연히 듣게 된 이서준의 가정사에 윤서정은 조금 놀라며 물었다.
“부모님이 시장에서 일하셨니?”
“네.”
“그럼 부유하게 큰 편은 아니야?”
“사랑은 듬뿍 받았는데, 집이 부유한 편은 아니었어요.”
“그래? 너 생긴 걸 보면 매우 귀하게 컸을 거 같은데… 하긴 오늘 일하는 걸 보니 일 좀 해 봤겠더라. 일하는 솜씨를 생각해 보면 지금 네 말이 이해가 가네. 혹시 부모님은 지금 뭐 하시니?”
“여전히 시장에서 일하세요. 아버지, 어머니는 거기가 좋으시대요.”
“그래? 널 보면 네 부모님이 얼마나 훌륭한 분이신지 짐작이 되긴 해.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한번 뵙고 싶기도 하네.”
“하하, 어머니가 들으시면 정말 좋아하시겠네요. 선생님 팬이거든요.”
“그래?”
고작 하루 같이 일했을 뿐인데, 너무나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도란도란 사담을 나누던 중 윤서정은 문득 생각이 났는지 이서준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 네가 출연한 영화 봤어. 제목이 경수의 사랑 맞지?”
“네, 선생님.”
조금 웃긴 에피소드가 생각났는지 윤서정은 정영미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