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윤레스토랑(4)
윤서정은 약간 민망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내가 사실 서준이가 출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혼자 결심했던 게 있었거든.”
“결심했었던 거요? 그게 뭔데요, 선생님?”
정영미도 윤서정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이서준과 이정진도 조용히 윤서정을 바라보며 그녀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수의 사랑이란 영화가 정말 좋았어. 나도 봤거든. 그리고 주인공을 맡은 서준이의 연기도 너무 좋더라고. 그래서 혼자 결심했지. 내가 주변에서 듣기론 이 친구가 가수도 하고 연기도 한다고 들었었거든. 그래서 만나면 연기만 하라고 말해야겠다. 이렇게 혼자 마음을 먹은 거야.”
윤서정의 말을 들은 정영미는 절대 안 된다는 표정으로 펄쩍 뛰며 말렸다.
“어머, 안 돼요, 선생님. 우리 서준이는 노래해야 해요. 서준이가 노래를 얼마나 잘하는지 선생님도 아까 들어 보셨잖아요.”
“하하, 나도 들어 봤지. 그래서 하는 소리야. 난 이 녀석이 이렇게 노래를 잘하는 줄은 진짜 몰랐지. 그래서 상상해 본 거야. 내가 만약 서준이 노래를 듣기 전에 진짜 이런 말을 했어 봐. 얼마나 민망하겠어? 지금 그랬다는 상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려 죽을 거 같아.”
진짜 민망한 마음이 들었는지 지금 윤서정의 낯빛은 전보다 많이 붉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너희한테 고맙다, 얘. 너희가 날 떠밀어 서준이 노래하게 안 했으면 내가 서준이 노래를 들어 볼 생각이나 했겠니? 그러니까, 천만다행이지. 더군다나 멋진 공연도 보고 망신당할 뻔한 일도 면하게 되었으니 내 입장에선 금상첨화지.”
그제야 윤서정이 갑자기 웃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한편, 윤서정의 이런 에피소드를 들은 이서준은 혼자 신기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방금 윤서정이 해 준 이야기를 들어 보니 결국 자신의 연기가 괜찮았다는 평을 해 주신 거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해 주신 분이 다른 분도 아닌 윤서정 같은 오랜 연기 경력의 베테랑 연기자가 자신의 연기를 보고 괜찮았다고 평가를 해 주신 거니까 기분이 매우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 * *
“큰일 났습니다.”
미국 촬영 둘째 날부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겨 버렸다.
여자 출연자 두 명 모두가 몸에 탈이 난 것이다.
윤서정 같은 경우에는 오랜 시간 비행기를 타고 와서 곧바로 촬영에 들어가는 빡빡한 일정 때문에 급격한 피로감을 느낀 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인 만큼 젊은 사람도 힘들다고 느낄 일정을 체력적으로 버텨 내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어린 정영미 같은 경우에는,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배탈이 나 버렸다.
그녀 역시 빡빡한 일정에 몸은 피곤했을 것이고,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 있다 보니 먹는 것들이 그녀에게 맞지 않아 문제가 생겼을 거라 추측해 보았다.
어쨌든 민감 체질인 정영미는 아직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화장실에 무려 5번이나 가고 있었다.
나정석 피디는 조연출에게 출연진 네 사람 중 두 사람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아무런 대책이 생각나질 않았다.
‘큰일이네… 오늘 촬영은 포기해야 하나?’
두 사람이 빠진 상황에서 촬영을 강행한다는 것은 거의 미친 짓이었다.
그러나 그냥 하루를 쉬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빡빡하게 짠 촬영 일자 중 하루를 그냥 버린다는 것은 나중에 방송을 편집하는 데도 큰 차질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정도의 위험한 일이었다.
그렇게 나 피디가 심각하게 고민에 빠져 있을 무렵, 갑자기 이서준이 나타나 그릇에 무엇을 담아서 윤서정의 방으로 향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솔솔.
갑자기 나정석 피디의 코를 간지럽히는 의문의 냄새.
사라진 식욕도 되살려 줄 것 같은 너무 맛있는 냄새에 나정석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이서준에게로 향하였다.
“서준아, 그거 뭐야?”
나정석의 물음에 이서준은 자신이 들고 온 음식의 정체를 말해 주었다.
“야채죽이에요.”
“야채죽?”
“네, 선생님이 아침 식사를 못 하셨거든요. 밥 먹는 걸 힘들어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간단하게 만들어 봤어요.”
“그래? 근데 너 요리 잘하는구나. 냄새가 끝내줘.”
“하하, 그래요? 그럼 정말 다행이네요. 선생님 코에도 그렇게 느껴지면 너무 좋을 텐데… 일단 드리고 올게요.”
“어, 그래.”
나정석에게 양해를 구한 이서준은 야채죽을 가지고 윤서정이 누워 있는 방으로 급히 가져갔다.
아무래도 식으면 맛이 반감되기에 따뜻할 때 드리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윤서정의 방으로 들어간 이서준.
그는 가지고 온 죽 그릇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선생님,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제가 만들어 봤어요.”
“아니, 뭐라고? 네가 뭘 만들어 왔다는 뜻이니?”
“네, 선생님.”
윤서정은 놀란 얼굴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이서준이 내미는 그릇을 받은 후 다시 한번 크게 놀랐다.
그릇에 담긴 죽을 봤기 때문이었다.
“이거 혹시 죽이니?”
“네, 선생님.”
“세상에나… 이걸 네가 만든 거야?”
“네. 뭐라도 드셔야 할 거 같아서… 없는 솜씨지만 최선을 다해 만들어 봤어요. 한번 드셔 보세요. 기력을 찾으시려면 식사는 반드시 하셔야죠.”
말과 행동이 너무 예쁜 이서준을 보곤 그녀는 너무 감격했다.
“어머, 고마워라….”
자신을 걱정하는 이서준의 마음이 담긴 야채죽.
그것을 본 윤서정은 고마움에 억지로 힘을 내어 숟가락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천천히 야채죽을 입으로 가져가는 윤서정.
그런 그녀의 모습을 나정석 피디와 어느새 나타난 이정진이 함께 기대에 찬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드디어 야채죽을 한 숟가락 먹은 윤서정은, 놀랍게도 곧바로 탄성을 내뱉었다.
“어머! 이거 왜 이렇게 맛있니? 정말 네가 했어?”
“하하, 네, 맞습니다, 선생님. 입에 맞으시다니 정말 듣던 중 반가운 말씀이네요. 다행이네요.”
그렇게 탄복한 후 아픈 사람답지 않게 윤서정의 숟가락은 도무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어느새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운 그녀는 만족했다는 표정으로 이서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서준아, 고마워. 그리고 내가 네 정성 때문에 억지로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 맛있었다. 너 어쩜 이렇게 음식을 잘하니? 솜씨만 놓고 보면 주방장은 서준이가 해야 맞는 거 같아.”
기분 좋게 웃으며 이서준을 칭찬하는 윤서정.
옆에서 그런 윤서정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정진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나정석 피디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 피디. 이왕 이렇게 된 거 서준이에게 주방을 맡겨 보는 건 어때?”
“네? 서준이요?”
“그래, 서준이. 저렇게 요리를 잘하니 맡겨 봐도 괜찮을 거 같은데…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대안이 없고….”
갑자기 대안으로 떠오른 이서준의 주방행.
그러나 고민은 계속되었다.
그렇게라도 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촬영을 강행할 수 있을 거 같았지만, 이서준은 게릴라 형식으로 촬영에 합류하였기에 미국으로 오기 전 받은 음식 수업에 참석을 못 하였다.
그러다 보니 현재 판매 중인 음식의 레시피를 전혀 모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다음으로 이어진 이서준의 말로 깨끗이 날아가 버렸다.
“저 어제 주방에서 요리하시는 모습 봐서 레시피는 다 외웠어요. 물론 그걸 직접 제가 할 수 있다는 보장은 못 하지만… 한번 도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서준의 말을 들은 나 피디는 반색하며 다시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네.”
이서준의 확답까지 받은 그는 바로 돌아서서 대책을 기다리던 촬영 팀을 향해 소리쳤다.
“자, 촬영 갑시다. 오늘은 주방장 이서준 체제로 갑니다. 만약 가서 요리해 보고 안 되면 바로 철수하면 됩니다. 그 정도 촬영 분량이면 하루 장사 빠진 만큼의 분량을 어느 정도 채워 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은 무조건 식당으로 가는 겁니다.”
“자, 감독님 말 들었죠? 서둘러 주세요.”
나정석 피디의 말이 끝나자 앵무새처럼 그의 말을 반복하며 스태프를 독려하는 조연출.
오랜 시간 함께 촬영했기에 더욱 빛나는 조직력이었다.
* * *
결국 윤서정은 숙소에서 좀 더 푹 쉬는 걸로 결정이 났다.
그리고 주방은 이서준의 몫이었고, 보조는 나정석 피디의 몫이었다.
촬영 중 모습을 자주 드러내는 그였기에 대타가 없는 지금에는 그보다 좋은 적임자가 없었다.
홀은 이정진과 정영미의 몫이었다.
정영미에게도 쉬라고 모두가 권했지만, 자신까지 빠지면 오늘 장사가 너무 힘들 거라 예상한 그녀의 눈부신 투혼이었다.
그녀 역시 이서준의 야채죽을 먹고 어느 정도 기력을 찾았고, 약까지 챙겨 먹은 상황이었기에 일단 촬영에 임하였다.
주방에서 요리를 시작한 이서준.
그의 칼은 놀랍게도 정신없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걸 이렇게 써먹을 때가 생기다니….’
사람들의 관심 덕분에 시간이 지나자 저절로 쌓이는 도깨비 상점 이용권.
그래서 이서준은 재미 삼아 도깨비 상점에 들러 무언가를 산 적이 있었다.
한자가 적힌 통이라 뜻을 알 수는 없었지만 재미 삼아 질러서 산 나무 상자.
거기에는 누군가의 숟가락이 들어 있었다.
구매 후 알게 된 상자 속 숟가락은 30년 경력의 한식 요리사의 숟가락이었다.
이 숟가락으로 음식을 먹으면 저절로 음식 실력이 늘어나게 되는 신기한 숟가락이었는데, 그 후로 이서준은 자신의 집에서 식사를 할 때면 그 숟가락으로 밥을 먹었다.
별다른 생각이 있어 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요리를 잘하게 되면 좋겠다 생각했고, 그리고 가끔씩 동생 수정이한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무런 생각 없이 한 행동이 지금 미국에 와서 빛을 보게 된 상황이었다.
타닥타닥.
주방장이 공석인데도 불구하고 식당 주방에서는 경쾌한 칼질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능숙한 모습으로 요리를 해내는 이서준.
그리고 얼마 후 그의 앞에는 요리가 끝난 음식이 세팅이 되었다.
비빔밥, 불고기 덮밥, 그리고 파전과 김치전.
이서준 앞에 보기 좋게 세팅된 이 음식들은 윤레스토랑에서 판매하는 메뉴들이었다.
떨리는 심정으로 음식을 맛보는 이정진과 나정석.
음식을 먹어 본 두 사람의 눈은 동시에 커졌다.
“이야, 됐다.”
“하하, 그래 됐어.”
단박에 오케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야… 쉬고 계시는 선생님한테 죄송한 말씀이지만, 정말 맛있다. 솔직히 서준이 요리가 더 맛있는 거 같아.”
“크크, 나도 동감.”
이로써 오늘 주방을 맡을 사람은 이서준으로 결정되었다.
이서준은 정말 손이 빨랐다.
아침에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시간을 많이 지체한 터라 오늘 장사는 어제보다 늦게 시작할 줄 알았는데, 준비는 더 빨리 완료되었다.
“그럼 오픈합니다.”
너무나 다행인 상황에 이정진은 보조개가 만개한 얼굴로 가게를 오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