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레전드를 만나다(3)
“제가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이서준은 애슐리의 물음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 네. 괜찮습니다.”
이서준의 대답을 들은 그녀는 조금 진지하게 변한 얼굴로 물었다.
“서준 씨는 제 음악이 어떤 음악이라고 생각하세요?”
이서준은 순간 당황했다.
이제까지 밝은 분위기에서 아주 가벼운 내용으로 대화 중이었기 때문에 갑자기 이렇게 어렵고 포괄적인 질문이 나오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왜 이런 질문을 내게 하는 거지?’
이서준은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여러 가지 면에서 이상했다.
대한민국 내에선 유명하다고는 하지만, 세계적인 스타인 그녀와 비교했을 때는 아시아 변방 국가 내 유명 음악인일 뿐인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다니….
물론 대답하는 것은 생각 외로 어렵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그녀의 음악과 함께했기에 그저 편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 난감했다.
분위기상 그런 편안한 답변을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대답을 피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표정이 부담스러웠다.
‘네 대답을 반드시 들어야겠어.’라는 말이 그녀의 얼굴에 그대로 쓰여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기 때문에 어떻게든 대답은 해야만 할 거 같았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다고 느낀 이서준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이렇게 물었다.
“애슐리 브룩의 음악을 제가 어떻게 함부로 평가할 수 있을까요? 아직 정식으로 음악을 시작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제가 함부로 언급할 만한 이야기는 아닌 거 같은데… 그런데도 꼭 제 대답을 듣고 싶으세요?”
그의 물음에 애슐리 브룩은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네. 사실 이 질문을 당신에게 하고 싶어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탈 마음까지 먹었으니까요. 아, 그렇다고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말아 줬으면 좋겠네요. 전 원래 즉흥적인 편이에요. 궁금한 게 있거나 흥미가 동하는 것이 있으면 그냥 여러 생각하지 않고 일단 저질러 버리는 편이거든요. 아마 그런 성격이 아니었으면 지금 이곳에 혼자 나타나지도 않았을 거고요.”
그녀의 대답을 들은 이서준은 다시 잠깐 고민하더니 그녀의 진지한 물음에 대한 답을 말하기 위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빌보드 1위를 차지한 곡이 무려 15곡이나 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히트곡을 가지고 있죠. 이 기록은 음악 역사상 가장 큰 업적을 남겼다고도 할 수 있는 ‘비틀스’ 다음으로 역대 2위인 기록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최고 고음이 무려 5옥타브 시까지 올라가는 살인적인 가창력을 가진 여자 가수의 대명사이기도 하고요. 이런 음악 역사에 남길 업적을 쌓은 당신의 음악을 말 몇 마디로 표현한다? 이게 과연 가능할까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1990년 말부터 2000년 초반까지의 소울 뮤직의 대명사인 당신의 음악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 그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죠. 그래서 전 그냥 제가 느끼는 애슐리 브룩을 당신의 노래 중 한 곡으로 표현해 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싶네요. 지금부터 제가 부를 이 노래는 당신의 노래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말한 이서준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홀 한쪽 편에 놓여 있는 피아노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이서준은 애슐리 브룩이 보는 앞에서 그녀의 노래를 부르려고 하는 것일까?
사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왜 그녀가 자신을 찾아 왔는지 은연중에 느끼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근 그녀를 둘러싼 논란에 관해서는 이서준 역시 익히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가장 마지막으로 발매한 최근 앨범을 그녀의 가장 최악의 앨범으로 손꼽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가 봐도 이전의 명반과는 다른 엉망인 앨범이었으니까….
사실 그전부터 그녀를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있었다.
원체 고음이 강한 그녀이다 보니 따라 부르기가 힘들 정도의 어려운 곡들이 많았고, 그런 노래들을 라이브로 소화해야 했던 그녀의 성대는 수백 번, 수만 번이 넘어가도록 가창을 하면서 서서히 망가져 갔다.
그래서 찾아온 3번의 성대 결절.
그런 시련을 겪은 후부터 그녀의 목소리는 예전과 비교해서 많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과거의 그녀와 현재의 그녀를 계속 비교하기 시작했고, 이젠 열광보다는 비난을 많이 받아야 하는 처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아마 그러한 이유로 인해 자신을 찾은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순간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것 역시 과한 억측에 가까워 보이긴 했지만, 그나마 가장 그럴듯한 가정이었다.
만약 이런 이유가 아니라면, 조금 전의 질문을 자신에게 할 까닭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으니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를 찾아온 건가?’
조금 전 대화 중에 자신이 나오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노래를 커버한 사람 중에서 이서준의 노래가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다는 말도 들었었다.
그래서 노래를 불러 주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은 애슐리 키즈 중 한 명인 사람이다.
마이클 존슨과 애슐리 브룩, 그리고 윗니 휴스턴의 음악은 음악인 이서준의 꿈을 만들어 준 가장 큰 요소였다.
그래서 그녀의 음악 중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그녀에게 대답 대신 불러 주고 싶었다.
* * *
나정석을 비롯한 제작진과 출연진들의 시선은 온통 이서준과 애슐리 브룩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테이블로 향해 있었다.
두 사람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촬영 스태프는 최대한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상태로 애슐리 브룩이 대한민국 예능 프로그램에 처음으로 출연하는 역사적인 장면을 카메라에 정성스럽게 담고 있었고, 윤서정을 비롯한 다른 출연진들은 식당 안에서 식사 중인 마지막 손님들을 챙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이 주로 머무는 곳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서준과 애슐리 브룩이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테이블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대화 중인 두 사람을 쳐다보는 이정진과 나정석.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대화 주제가 궁금했던 나정석은, 자신과 비슷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이정진에게 문득 이렇게 물었다.
“형, 저 두 사람 지금 무슨 대화를 하고 있을까?”
나정석의 물음에 이정진은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으로 대답했다.
“글쎄… 나야 당연히 모르지. 근데 두 사람의 공통분모가 음악을 한다는 것이니 아마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 않을까? 에이, 나도 모르니 묻지 마. 머리 아파.”
나정석의 어려운 질문에 이정진이 장난 섞인 짜증을 부릴 무렵, 갑자기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이서준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피아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본 식당 안 사람들 사이에선 작은 동요가 생겨났다.
“어! 서준이 왜 피아노 앞으로 가지? 노래할 건가?”
이정진의 팔을 잡고 호들갑을 떠는 나정석의 말처럼 이서준은 어느새 도착한 피아노 앞 의자에 앉아 천천히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
이윽고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식당 안을 가득 메웠고, 그리고 그것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지금 이서준이 무슨 곡을 연주하는 중인지 단박에 알아챘다.
왜냐하면, 지금 그가 연주하는 곡은 바로 식당 안 테이블에 앉아 피아노 치는 이서준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애슐리 브룩의 대표곡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이 노래 애슐리 브룩의 ‘heroes’ 아니야? 맞지?”
어느새 이정진 옆에 나타난 정영미의 말에 이정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노래 맞는 거 같네.”
분명 원곡과는 크게 달랐지만, 귀를 간지럽히는 메인 멜로디 라인은 누가 들어도 이 곡이 애슐리 브룩의 ‘heroes’가 맞다는 것을 단숨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모두가 생각지도 못한 이서준의 연주를 듣고 크게 놀라고 있을 때, 사람들의 시선 중심에 있던 이서준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누구나 가슴 속에는 자신만의 영웅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죠. 우리 모두가 나만의 영웅이 있으니까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사는 분명 애슐리 브룩의 ‘heroes’가 맞았다.
그 곡 특유의 희망적인 가사가 어느새 ‘윤레스토랑’ 내부에 따뜻한 바람과 함께 물결치듯 흘러 다니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의 잔잔한 가슴 속에는 작은 파문이 일어나고 있었다.
물론 감동이라는 이름의 파문이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 중 이서준의 노래에 가장 많이 놀란 사람은 물론 애슐리 브룩 본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서준의 노래 실력과 곡 자체의 아름다움에 빠져 깜짝 감동을 느끼고 있었지만, 원곡자인 애슐리 브룩은 다른 의미에서 이서준의 노래에 흠뻑 빠져들고 있었다.
‘…너무 좋아. 어떻게 이 노래를 이런 식으로 풀어낼 생각을 했을까? 진짜 너무 좋아….’
아무래도 원곡자이다 보니 감상의 깊이가 남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서준의 노래와 피아노 연주 속에 담긴 그만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서준은 분명 노래를 통해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의 노래는 나에겐 이런 큰 힘을 주었어요.’라고 말하는 듯한 그의 노래에 흠뻑 빠져들 어 감동에 헤엄칠 무렵, 애슐릭 브룩은 다시 한번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서준이 1절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피아노로 전조를 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애슐리 브룩에게 ‘저와 함께 노래를 불러 주세요.’라고 달콤하게 속삭이는 듯한 메시지를 담은 연주였다.
이것도 일종의 직업병일까?
평생의 절반 이상을 가수로 살아온 그녀답게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고, 연주 중인 이서준의 곁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면서 그녀의 입은 이서준의 연주에 따라 열리기 시작했다.
♩끝이 없는 길이에요.♪
♪당신 혼자 세상을 마주한다는 현실이 무서울 수도 있어요.♩
분명 원곡과 많이 다르게 편곡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입을 연 그녀는 완전 자연스럽게 이서준의 편곡 버전을 따라가고 있었다.
아니, 따라간다고 하기보다는 어느새 하나가 되어 멋진 노래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노래를 부르는 애슐리 브룩은 어느새 눈을 감은 채 마음으로 들려오는 이서준의 반주에 따라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녀의 노래에 맞춰 화음을 넣는 이서준.
두 사람은 이곳이 마치 수만 명이 모인 콘서트장인 것처럼 멋진 하모니를 모두에게 선보이고 있었다.
“…이야 짱이다….”
개인적으로 노래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나정석의 입에서 이런 말이 저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두 사람의 노래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나정석은 혼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 이 순간이 그의 오랜 방송 경력에서 가장 놀라운 장면 중 하나가 될 거라는 확신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