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추모 공연(4)
낯선 동양인의 무대.
추모 공연을 보고 있는 사람들 대다수의 머릿속에는 이 이름 모를 가수가 누구인지 알지 못해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황하는 와중에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그것은 바로 이 이름 모를 동양인 가수가 정말 대단한 실력을 지닌 가수가 분명하다는 사실이었다.
♩넌 혼자가 아니야. 내가 항상 너의 곁에 있을 테니♪
그렇게 노래의 마지막 구절을 부른 이서준은 그제야 관객석을 쳐다봤다.
깜짝 등장한 이후 노래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이제야 여유가 생긴 탓이다.
‘조용하네….’
노래가 끝이 났으니 어떤 반응이 나타날 만도 한데 이상하게 관객석은 조용했다.
아주 잠시 간의 정적.
그러나 공연장을 가득 메웠던 정적이 걷히는 데는 그리 많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와아아아.
갑자기 엄청나게 쏟아지는 함성.
원곡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킨 것 같은 편곡과 그의 멋진 노래에 빠져 있던 관객들이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환호를 보낸 것이다.
사실 지금 보여 준 이서준의 노래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인 무대였다.
“…….”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의 뜨거운 반응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는 이서준.
그는 많이 당황한 상태였다.
그런 그를 도와주기 위한 특급 도우미가 천천히 무대 위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이서준에게 환호와 박수를 보내고 있던 사람들은 무대 위로 움직이는 슈퍼스타의 등장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다시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여유로운 모습으로 자신에게 환호하는 관객들에게 손을 흔들며 무대로 걸어가는 중년의 여성.
그녀의 정체는 바로 이서준과 함께 컴백 앨범 작업 중이던 애슐리 브룩이었다.
예상치 못한 엄청난 관객들의 반응 때문에 잠깐 당황했던 이서준은, 강력한 우군의 등장에 비로소 잃었던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리허설 때 동선을 미리 짜 놓았던 대로 들고 있던 기타는 거치대에 세워 둔 후 자신 옆에 놓여 있던 피아노 앞으로 걸어갔다.
피아노 연주를 준비하는 이서준.
그리고 애슐리 브룩은 어느새 피아노 옆에 서서 여유로운 표정으로 연주를 시작하려는 이서준을 따뜻하게 바라봤다.
눈빛 교환을 통해 서로가 준비되었음을 안 이서준의 손은 드디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와아아아.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고 사람들은 다시 환호성을 내질렀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의 귀에 들리는 피아노 전주 소리가 미국 팝 역사상 최고 명곡 중 하나라고 꼽히는 ‘영원한 사랑’의 전주임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이 곡은 아주 많은 가수가 리메이크를 해서 불렀을 정도로 명곡 중 명곡이었다.
애슐리 브룩 역시 ‘영원한 사랑’이란 곡을 정규 앨범에 리메이크해서 실은 적이 있었고 콘서트와 같은 공연장에서도 많이 불렀었는데, 그녀와 함께 듀엣곡인 이 곡을 불렀던 가수 중 한 명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마이클 존슨이었다.
사람들은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중 그녀와 마이클 존슨의 듀엣 버전을 ‘영원한 사랑’을 노래한 가수 중 최고의 무대로 많이 손꼽곤 했는데, 그런 큰 의미가 담긴 곡이었기 때문에 마이클 존슨의 추모 공연에서 부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내 사랑, 내 삶에는 오직 그대뿐이죠♪
노래의 시작은 남자부터였다.
그래서 당연히 두 명 중 남자인 이서준이 먼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관객들은 다시 들은 이서준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조금 전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를 부를 때의 목소리는 최근 트렌드에 맞는 팝 스타일의 보컬을 보여 줬다고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의 보컬은 조금 전과 완전히 다른 클래식한 느낌에다가 리듬 앤 블루스가 섞인 창법으로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영원한 사랑’이란 노래 자체가 무려 1981년에 발매됐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진 곡인 관계로 이서준과 같은 젊은 가수들이 이 노래의 느낌을 제대로 살리는 것이 결코 쉬운 곡은 아니었는데, 이서준은 마치 예전의 마이클 존슨이 그랬던 것처럼 단번에 노래를 듣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버릴 정도로 노래 안에 푹 빠져서 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노래하는 이서준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쳐다보고 있던 애슐리 브룩은, 자신의 차례가 되자 그녀 역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 첫사랑. 그대는 내 모든 것이죠. 내 삶은 온통 그대뿐이죠.♩
꺄아아악.
다시 한번 공연장이 떠나갈 듯 울리는 환호성.
추모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은 미국 최고의 디바 중 한 명인 애슐리 브룩의 환상적인 목소리에 함성을 참을 수가 없었다.
노래는 계속 흘러가고 이윽고 두 사람의 아름다운 화음이 시작되는 부분이 되었다.
노래의 구성상 주 멜로디 라인을 부르는 사람은 여자 파트를 부르는 애슐리 브룩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에 따라 이서준은 그녀의 노래에 맞춰 화음을 넣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화음 구간이 특히 사랑받는 곡답게 어떻게 보면 화음을 맡은 남자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한 곡이 바로 이 곡이었는데, 이서준은 정확한 음정과 애슐리 브룩의 보이스에 절묘하게 어울리는 톤으로 노래하며 그녀의 노래를 훌륭하게 받쳐 주고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천상의 하모니.
이런 환상적인 두 사람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황홀경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정도로 멋진 노래였다.
♩내 영원한 사랑.♪
와아아아.
짝짝짝짝.
두 사람이 마지막까지 멋진 화음으로 노래를 끝내자 곧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가 공연장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멋진 호흡을 선보였기에 매우 만족한 얼굴로 이서준을 바라보는 애슐리 브룩.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존경의 눈빛을 담아 마주 바라보는 이서준.
이런 두 사람의 모습은 공연장 카메라를 통해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보내지고 있었다.
훌륭하게 노래를 소화한 이서준을 대견스럽게 바라보던 애슐리 브룩은, 다시 고개를 돌려 환호성을 보내고 있는 관객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들의 환호에 감사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마이크를 입으로 가져간 그녀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마이클 존슨을 위해 저와 함께 노래한 가수는 한국의 유명 가수인 이서준입니다. 참고로 미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는 한국 그룹 BTC의 최근 곡을 작곡한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오늘 그가 추모 공연의 첫 무대를 장식한 이유는 바로 제니퍼 존슨의 제안 때문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미국에서는 무명에 가까운 이서준이 첫 무대를 장식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드디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원래 이서준 씨의 공연 순서는 중간쯤에 등장할 계획이었죠. 근데 이서준 씨의 리허설 무대를 본 제니퍼가 우리 모두에게 말하더군요. 이서준 씨의 노래가 첫 무대를 장식해 주면 정말 좋을 것 같다고요. 하늘에서 이 공연을 보고 있을 마이클도 그가 처음으로 노래를 불러 주는 것을 좋아할 거라는 말과 함께요. 이 말을 듣고 그녀의 제안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하하하.”
이때 센스 넘치는 무대 감독은 재빠르게 조명의 위치를 옮길 것을 주문했다.
그의 지시에 따라 순식간에 중앙 무대 밑에서 공연을 지켜보던 제니퍼 존슨을 비추는 조명.
그녀는 역시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표정으로 무대 위에서 멋진 노래를 불러 준 두 명의 가수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찬사에 미소로 답례한 애슐리 브룩은, 다시 관객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제가 부를 노래는 아직 발매 전인 제 앨범 타이틀 곡입니다. 어떻게 보면 앨범 발매 전에 계획에도 없던 선공개를 하게 되었네요. 그런데 지금 이런 생각을 하실 분들도 있을 거예요. 제가 왜 하필 추모 공연에서 이 노래를 부르려고 하냐고요.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노래를 만들게 된 계기가 바로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이클 존슨 때문이었거든요.”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이서준을 쳐다보는 애슐리 브룩.
그녀는 이서준을 바라보던 그 상태로 말을 이어 갔다.
“이 노래를 만든 사람이 바로 여기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이서준 씨예요. 그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미국인, 아니 세계인에게 사랑을 받았던 마이클 존슨은 과연 행복함을 느끼며 살았을까? 이런 질문을 시작으로 지금 제가 부를 이 곡을 작곡하게 되었다고 말했어요. 그렇게 작곡한 사연을 말한 서준 씨가 다음으로 저에게 작사를 부탁하더군요. ‘당신은 마이클의 친구였으니 그가 어떤 행복감을 느끼며 살았는지 가사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노래의 작사를 맡아 주세요.’라고 하면서요.”
그녀의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그제야 왜 그녀가 아직 정식 발표도 되지 않은 신곡을 지금 이 자리에서 부르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해가 되는 동시에 피어나는 기대감.
갑자기 생기는 기대감은 과연 마이클 존슨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갔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만들어졌다.
이번에도 서로를 마주 보며 눈으로 대화하는 두 사람.
애슐리 브룩이 노래할 준비가 되었음을 알게 된 이서준은 곧 눈을 감은 채로 차분하게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 * *
다시 소집된 이사회의.
오늘 이사회에 참석한 부사장 제이크 슈나이저의 표정은 저번과 달리 그렇게 밝지 못했다.
아니 인상을 쓰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정도로 표정이 좋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가 오늘따라 이렇게 표정이 좋지 못한 이유는 단순했다.
왜냐하면, 애슐리 브룩과 이서준의 활약 때문이었다.
굳이 구분을 해 보자면, 애슐리 브룩은 사장 마이클 본과 얽힌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멋지게 컴백을 성공한다는 것은 내심 마이클 본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자신에게는 별로 좋지 못한 뉴스였다.
더군다나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동양인 한 명.
이 정체 모를 녀석이 더 골칫덩어리였다.
갑자기 난데없이 나타나서 애슐리 브룩에게 신곡 ‘happiness’를 선사한 이놈 때문에 애슐리 브룩은 엄청난 기대와 찬사를 받고 있었다.
아직 정식 발매도 되지 않은 곡을 연신 기다리는 팬들 덕분에 애슐리 브룩의 컴백 앨범은 이미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화제성을 몰고 있었고, 그녀의 성공적 컴백 때문에 프로듀서 출신의 사장에 대한 평가가 날로 좋아지고 있었다.
거기에다 동양인도 언론과 팬들에게 엄청난 관심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마이클 본 사장의 실패를 바라는 자신의 입장에선 결코, 달갑지 않은 상황의 연속이었다.
“망할 동양인 녀석….”
그렇게 혼잣말로 동양인 방해꾼을 욕을 하고 있을 무렵, 드디어 오늘의 이사회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