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빌보드 도전(3)
나영은 어색한 모습으로 마이클 본 사장과 악수를 나눈 뒤 대화 당사자인 김진영 옆에서 조용히 앉아만 있었다.
지금 공적인 회사 일로 비즈니스 대화를 나누는 중이니 자신이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그랬기도 했지만, 두 사람 간에 영어로 대화가 이루어지는 상황이었으니 무슨 말을 하고 싶어도 자신이 끼어들 말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 이유로 조용히 앉아 커피만 마시고 있던 그 순간, 그녀의 귀가 번쩍 뜨이는 단어가 대화 중 들렸다.
“괜찮으시다면 본격적인 일 이야기는 잠시 뒤에 해도 되겠습니까? 아직 서준이 얼굴도 못 본 상태니 서준이랑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중요한 일들에 관해 의논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아, 괜찮습니다. 마침 제가 오늘과 내일 이틀간 일정이 매우 널널한 상황이니 조금 쉬시고 서준이랑 이야기도 나누신 후 그때 본격적인 일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죠.”
“하하, 감사합니다. 근데 서준이는 지금 일하고 있나요? …약간 일 중독인 사람처럼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을 것 같기도 한데… 한국에 있을 때도 항상 작업실에서 일에만 열중했던 사람이 이서준이었거든요.”
마이클 본은 이서준이 작업실에서 작업 중일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김진영을 향해 의외의 대답을 들려주었다.
“오, 이런. 평소에는 말씀처럼 작업실에 있는데, 지금은 회사에 없습니다. 오늘 중요한 사람과의 미팅이 있어 그를 만나러 외출했거든요.”
“중요한 사람요? 혹시 누굴 만나러 갔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 그야 당연하죠. 이서준은 지금 케븐 파이스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쪽에서 계속 만나자고 여러 번 연락이 왔었거든요.”
생소한 이름인 ‘케븐 파이스’란 사람을 만나러 갔다는 이야기에 김진영과 나영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이클 본 사장은 그런 그들의 표정을 보지 못했는지 점점 흥분하는 모습으로 말을 이어 갔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케븐 파이스가 만나 달라고 계속 연락이 오는 사람이라뇨… 제가 서준이를 알 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보면 볼수록 정말 대단한 연예인인 거 같아요. 하하하.”
말하다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마이클 본 사장.
그러나 그는 곧 대화 상대의 이상함을 감지한 후 웃음을 그치고 말았다.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손님의 모습을 보고서 그제야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이고, 이런… 케븐 파이스가 누군지 모르시나 보군요. 제가 자세한 설명도 안 하고 혼자 웃고만 있었습니다. 케븐 파이스는 영화 제작 회사의 사장입니다. 여러분도 아실 만한 유명한 ‘응징자들’을 기획한 영화 제작자이기도 하지요. 혹시 그래도 모르시겠습니까?”
케븐 파이스가 누군지 간단하게 설명을 했는데도 여전히 표정이 이상한 두 사람의 모습에서 마이클 본은 약간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지금 상황은 조금 전의 상황과 완전히 달랐다.
왜냐하면, 지금 두 사람의 표정이 이상해 보이는 이유는 이전과 다르게 너무 놀랐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이름만 듣고선 케븐 파이스가 누군지 전혀 몰랐었는데, 이서준이 만나러 간 사람이 무려 우리가 잘 아는 케븐 파이스라니….
마이클 본 사장의 입에서 ‘응징자들’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두 사람은 케븐 파이스가 누군지 그제야 깨닫게 되었고, 그런 대단한 사람과 이서준이 만나고 있단 사실에 다시 놀라 표정이 이상했던 거였다.
그런 속사정을 알지 못한 마이클 본은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진 케븐 파이스를 어떻게 소개해야 이들이 그를 알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진지하게 고민했다.
‘케븐 파이스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니… 어떻게 더 알기 쉽게 설명해야 할까?’
그렇게 따지고 보면 불필요한 고민 때문에 머리가 아픈 마이클 본이었다.
* * *
“크아… 이제야 끝났네.”
처리해야 할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케븐 파이스는, 기지개를 켠 후 사내 전화기의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에이미, 커피 부탁해.”
[알겠어요, 케븐.]
커피를 부탁하는 케븐 파이스의 말에 항상 밝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비서 에이미 덕분에 언제나처럼 기분이 좋아지는 그였다.
“하, 이제 커피나 한잔 마시며 기다려 볼까?”
이제 다음 스케줄은 요즘 미국 사람들 사이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던 이서준이라는 가수와의 미팅이었다.
물론 자기가 몸담은 회사는 영화를 만드는 곳이었기에 가수 이서준이 아니라 배우 이서준으로 만나는 것이었다.
그를 잠시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니 갑자기 웃음이 났다.
자기가 이렇게 많이 까여 본 적이 최근에 있었던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억을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그랬던 기억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할리우드의 기라성 같은 배우들도 자신에게 연락을 받으면 즉각적으로 반응이 오는데, 미국에서는 무명인 배우 이서준이 자신의 연락에도 계속 시간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전해 온 일은 정말 오랜만에 겪어 보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머릿속에서 보이는 이서준의 얼굴.
케븐 파이스 그 역시 팝의 황제 마이클 존슨의 팬이었기에 그의 추모 공연을 진심으로 기다렸고, 일부러 일정까지 정리해서 실시간으로 공연을 보았었다.
그때 화면 속에서 처음 본 이서준의 얼굴은 놀랍게도 자신이 애타게 찾던 배역의 얼굴과 100% 일치했다.
이서준을 본 후 진심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가능한 방법을 총동원하여 이서준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조사 결과를 보고 다행스럽게 느낀 점은 그가 한국에서 드라마와 영화 같은 작품에 출연 중인 배우라는 사실이었다.
평소 한국 영화감독 중 세계적인 수준의 감독들의 영화는 반드시 찾아보는 편이었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이서준이 출연했다고 하는 영화와 드라마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받은 충격.
이건 정말 가히 충격적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이서준의 연기는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 역시 현장에서 활동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기에 이서준이 드라마에서 보여 준 액션 연기가 실제 어느 수준의 액션 연기였는지 어느 정도 짐작되는 바가 있었는데, 자신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이서준의 멋진 액션 연기에 자신도 모르게 박수 치며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본 영화에서는 그가 진정한 배우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서준의 발군의 연기력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언어가 달라 완벽하게 그의 연기를 파악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의 연기가 흔히 볼 수 있는 정도의 평범한 연기가 아니란 사실을 파악하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때부터 연락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서준 쪽에서는 계속 죄송하다는 답변만 날아왔다.
지금 미국에서 일하고 있는 상황이니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웬일인지 이서준은 케븐 파이스의 연락을 계속 피하기만 했다.
그래서 오해도 조금 쌓였지만, 나중에 사정을 알고 보니 애슐리 브룩의 막판 음반 작업에 작은 문제가 생겨 그걸 해결하느라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는 숨은 내막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최근에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만날 약속을 잡게 되었다.
이서준의 일정이 매우 바빠 보여서 케븐 파이스가 일부러 이서준이 일하고 있는 회사로 가겠다는 뜻을 전달했는데, 이서준은 너무 미안해서 그렇게 할 수가 없다며 본인이 직업 마벌 스튜디오가 있는 이곳을 방문하겠다는 뜻을 전해 왔기에 지금 그를 회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음….”
오늘따라 커피 향이 무척 좋았다.
외국으로 출장 간 김에 구입해 온 커피였는데, 오늘 처음 먹어 본 소감이 제법 괜찮았다.
“오늘 퇴근할 때 집에 좀 가지고 가야겠군.”
사랑하는 아내가 좋아할 만한 향기였기에 회사에 사 둔 커피 중 일부는 집으로 들고 갈 생각이었다.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하던 그때, 갑자기 조용했던 자신의 스마트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발신자를 확인한 케븐 파이스의 얼굴은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왜냐하면, 진심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싫은 사람의 전화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받지 않기도 힘든 관계인 사람의 전화였기에 그는 마지못해 자신의 전화기를 들어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여보세요?”
[날세.]
목소리에 담겨 있는 고집.
이 남자와 통화할 때마다 느끼는 사실이지만, 목소리와 말투만으로 자신의 성격을 이렇게 잘 드러내는 사람도 쉽게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 아이작. 웬일로 전화를 다 주셨어요?”
속마음을 숨기고 비즈니스적인 목소리로 전화를 건 목적을 물었다.
그러자 조금 전과 같은 느낌의 목소리로 용건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저번에 내가 해 준 충고를 왜 아직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지 묻고 싶어서 말이야.]
“충고요?”
[그래. 내가 저번에 큰돈을 벌 수 있는 아주 손쉬운 방법을 자네에게 알려 주지 않았나? 설마 내 천금과 같은 진심 어린 충고를 벌써 잊은 건가?]
이제야 그가 왜 자기에게 갑자기 전화를 걸었는지, 그 목적이 짐작되었다.
그래서 그로 인해 좋았던 기분이 급격히 나빠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전화기 너머로는 그런 케븐 파이스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지 아이작 서머터의 불편한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장진 웨이 회장과 만날 일정은 도대체 언제 잡을 건가? 그분이 얼마나 바쁜 분인지 자네도 모르는 건 아닐 텐데 말이야….]
아이작 서머터의 이야기에 케븐 파이스도 정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잘되었네요. 그분 일정이 바쁘신데 제가 시간을 빼먹어서야 되겠어요?”
[……자네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목소리만으로도 지금 그가 얼마나 언짢아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젠 그의 눈치를 봐야 할 자신이 아니었기에 케븐 파이스도 당당한 목소리로 그가 자꾸 잊어버리는 두 사람의 공적인 관계를 다시 알려 주었다.
“아이작, 자꾸 잊어버리시는 거 같은데요… 당신은 저의 상관이 아니세요. 제가 대표로 있는 마벌 스튜디오는 당신의 마벌 엔터테인먼트의 산하 회사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제 결정에 대해 불편하시더라도 참으세요. 제가 할 일은 제가 결정하고, 또 제가 책임집니다. 아시겠어요?”
[…….]
마치 지금 눈앞에 화가 나 부들거리는 아이작 서머터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잠깐 침묵을 지키던 아이작은 화를 참는 목소리로 경고했다.
[지금의 기세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내 두고 보겠네. 만약 지금과 같은 성공이 자네를 지켜 주지 못할 순간이 오면 내 반드시 지금 나에게 한 말을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지.]
“…기대하겠습니다.”
뚝.
일방적으로 끊어진 전화.
케븐 파이스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스마트폰을 잠시 쳐다보았다.
그때, 사내 전화기로 기다리던 사람이 드디어 나타났음을 알게 되었다.
[사장님. 이서준 씨가 오셨습니다.]
“안으로 안내해 줘.”
드디어 기다리던 사람이 자신의 사무실로 와 주었기에 조금 전과 다르게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