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별은 내 가슴에
나영은 계속 업무가 바빴던 김진영과 헤어진 후 곧바로 이모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보고 싶던 이모와 재회도 하고 자주 못 봐 어색한 사촌 동생들과도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는 등 즐겁고 보람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온 연락.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이서준이 드디어 볼일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온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그렇게 나영은 다시 이서준이 머물고 있는 뉴욕 숙소로 왔다.
그리고 때마침 일을 끝낸 김진영도 곧바로 이곳으로 왔기에, 정말 오랜만에 세 사람이 함께 모여 의미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밥 먹자. 나 일을 열심히 한 덕분에 너무 배고파.”
“저도 배고파요. 우리 뭐 먹을까요?”
나영의 저녁 식사 메뉴 물음에 김진영은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말했다.
“아, 이 근처에 내가 아는 가게 있어. 거기 가자. 음식을 제법 잘하는 가게야.”
이서준은 그런 김진영의 제안에 바로 물었다.
“혹시 어떤 음식 파는 곳이에요?”
“스테이크나 파스타. 정확히는 스테이크 전문점이야.”
김진영의 대답을 들은 이서준은, 진심으로 괴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형님. 오늘은 진심으로 스테이크나 파스타는 먹고 싶지 않네요. 제가 아는 누구 덕분에 요 며칠 계속 느끼한 양식 요리만 먹었거든요. 솔직히 아무리 비싼 치즈를 먹을 기회가 있어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토할 수 있을 정도예요.”
방금 이서준의 말 속에 등장한 ‘제가 아는 누구’는 당연히 애슐리 브룩이었다.
그녀는 귀여운 이서준을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며 뉴욕에 있는 맛집이란 맛집은 죄다 맛보게 해 주었는데, 그런 그녀의 따뜻한 마음 씀씀이가 오히려 이서준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거절하지 못하고 계속 따라 다녔지만, 이젠 거의 한계에 이른 시점이었기에 오늘만큼은 제발 양식은 피하고 싶었다.
“그럼 한식당으로 갈까?”
“그럼 너무 좋죠. 정말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기네요.”
이서준의 뜨거운 반응에 저녁에 먹을 음식의 장르는 결정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식사할 식당을 고민하던 김진영은 큰일이 난 표정으로 이서준을 보며 말했다.
“근데 어쩌지? 나 여기에 아는 한식당이 한 개도 없어. 난 양식이 입에 맞는 타입이라 이곳에선 항상 현지 음식만 먹었거든.”
아는 한식당이 없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뜻의 말이었다.
그러나 이서준은 그런 그의 고민을 단번에 해결할 방법을 제시했다.
“그냥 재료 사서 집에서 해 먹죠. 제가 맛있는 음식 만들어 드릴게요.”
“네가?”
“네. TV에서 못 보셨어요? 저 요리 엄청 잘해요.”
“…알겠어.”
TV로 확인한 사실이라 부인할 수 없었지만,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었기에 의심의 눈초리를 완전히 지우진 못했다.
하지만 이서준이 그렇게 하길 강력하게 주장하는 모습이었기에 그를 배려하는 김진영은 이서준의 말대로 따르기로 하였다.
저녁 식사 재료를 사기 위해 근처 한인 마트로 간 세 사람.
오랜만에 마트에 와 신이 난 김진영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이서준에게 물었다.
“음식 뭐 할 거야? 셰프님이 어떤 요리를 하실지 알려 주셔야 우리가 필요한 재료를 제대로 살 거 아니야?”
이서준은 그의 물음에 잠깐 고민하더니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배추겉절이와 닭볶음탕 어떠세요? 만들기도 쉽고, 칼칼하게 먹기 좋을 거 같긴 한데.”
이서준의 제안에 두 사람 다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좋아.”
“저도 좋아요. 그리고 너무 기대되네요. 오빠가 해 준 음식은 처음 먹어 보잖아요.”
이서준은 그런 나영의 말에 자신만만한 태도로 말했다.
“기대해도 좋아. 네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맛있을 테니까.”
“오케이. 그럼 지금부터 기대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신난 김진영이 일행의 앞에서 필요한 재료를 찾아다니고 있었고, 이서준과 나영은 그런 김진영의 뒤에서 카트를 밀며 따라가고 있었다.
카트를 밀며 이서준과 나란히 걷던 나영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머, 이렇게 다니니까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신혼부부 같잖아.’
나영은 그렇게 혼자 장밋빛 상상을 머릿속에 그리며 부지런히 이서준의 옆을 사수했다.
장보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세 사람.
모두가 배고픈 상황이었기에 이서준은 서둘러 요리를 시작했다.
밥은 즉석밥을 데워 먹으면 되는 상황이라 배추겉절이와 닭볶음탕만 하면 되었다.
다그닥 다그닥.
이서준은 엄청나게 빠른 손놀림으로 밑 재료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물로 깨끗이 씻은 배추는 어느새 딱 먹음직스러운 크기로 잘려져 소금에 절여져 있었고, 마트에서 사 온 닭은 어느새 해체되어 뼈가 다 발라진 상태로 변했다.
보조 요리사로 참여하고 있던 김진영은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며 너무 놀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와, 너 진짜였네… 어쩜 이렇게 요리를 잘해?”
이서준은 요리를 쉬지 않으며 대답했다.
“그냥 하다 보니까 늘더라고요. 형님도 계속하시다 보면 금방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예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지금의 실력을 갖추기 위해 엄청난 선업 포인트를 사용하여 아이템을 구매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살다 보면 때론 진실 대신 거짓이 필요한 순간이 있기 마련인데, 지금이 딱 그 순간이었다.
어쨌든 요리를 다 마친 이서준은 식탁에 맛있어 보이는 배추겉절이와 닭볶음탕을 올렸다.
즉석밥까지 데워 와서 드디어 시작된 저녁 식사.
닭볶음탕 국물을 떠먹어 본 나영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너무 맛있어요.”
김진영은 금방 만든 배추겉절이를 한 입 베어 물고는 나영과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와, 대박… 간이 딱 맞아. 그리고 배추는 왜 이렇게 싱싱해? 진짜 어마어마한 실력이네… 너 진짜 최고다 최고.”
이서준은 두 사람의 극찬 덕분에 웃으며 식사에 임할 수 있었다.
어느새 식사를 끝낸 세 사람.
맛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배가 고파서 그런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식사는 엄청 빠르게 끝이 났다.
과식한 덕분에 가만히 앉아 있기가 힘들었던 나영은 두 사람에게 산책을 제안했다.
“배도 부른데 소화 시킬 겸 숙소 근처를 걷는 건 어때요?”
“좋아. 같이 나가자.”
흔쾌히 응하는 이서준과 달리 김진영은 약간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난 피곤해서 쉴래. 두 사람끼리 갔다 와.”
나영은 김진영의 표정이 신경 쓰였지만, 내심 기다렸던 순간이었기에 얼른 이서준의 팔을 잡아끌어 밖으로 나왔다.
어쩌다 보니 마치 데이트하듯이 거리를 거닐 게 된 두 사람.
이상하게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사라졌다.
갑자기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상한 분위기를 깨고 싶었던 이서준은 옆에서 고개를 숙이며 걷고 있는 나영에게 말했다.
“너 뉴욕 몇 번 와 봤어?”
나영은 그의 물음에 약간 붉어진 낯빛으로 답했다.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래? 그럼 뉴욕에서 유명하다는 곳 한번 가 볼래? 나도 여태까지 구경하러 다닌 적은 없었거든.”
“…좋아요.”
그렇게 합의한 두 사람은 잠깐 의논한 결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으로 가기로 했다.
그 빌딩에는 전망대가 있는데, 그곳에서 뉴욕을 바라보면 멋진 맨해튼의 정경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블로거의 글을 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떨어져 있는 기간이 길었던 만큼 궁금했던 서로의 근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빌딩 앞에 도착했다.
안내판을 읽어 본 이서준은 나영을 향해 물었다.
“전망대가 두 곳이야. 86층에도 하나 있고, 102층에도 하나 있다고 하네. 몇 층 갈까?”
나영은 그의 물음에 잠깐 고민한 후 답했다.
“기왕이면 제일 높은 데서 뉴욕을 구경해요.”
“하하, 좋아. 그럼 102층으로 가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102층 전망대.
너무 높은 층이라 무서운 마음부터 먼저 들었지만, 한눈에 들어오는 주변 풍경에 두 사람은 금방 빠지고 말았다.
“와, 빌딩이 이렇게 많구나….”
이서준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빌딩 숲을 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리고 나영은 다른 곳을 보며 비슷한 탄성을 터뜨렸다.
“와, 오빠 저기 좀 봐요. 너무 예뻐요.”
나영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유유히 흐르는 강과 그 주변의 풍경은 영화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이런 멋진 경치를 구경하던 이서준은 약간 필을 받았는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자신들처럼 뉴욕 시내를 구경하던 사람 중 등에 기타 케이스를 맨 남자가 보였고, 그를 발견한 이서준은 곧장 그쪽으로 걸어갔다.
“저기 기타를 잠시만 빌려 연주해도 될까요?”
소중하게 아끼는 기타를 빌려달라는 말에 거절하려던 남자는 이서준의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 당신… 마이클 존슨의 추모 무대의 그 사람 맞아요?”
이서준은 놀라며 묻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처음 마음과 다르게 기타를 선뜻 빌려주는 남자.
본인 역시 음악을 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런 멋진 공연을 보여 준 사람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기타를 빌린 이서준은 약간 흥분한 모습으로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
기타를 치는 이서준 근처로 어느새 모여든 구경꾼들은 잠시 후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오우 와아.
지금 이서준이 연주하고 있는 곡이 오래된 명곡인 ‘뉴욕의 영국 이방인’이란 걸 알아챘기에 나온 반응이었다.
즐거운 표정으로 연주하던 이서준은 자신 주변에 모인 사람들의 반응에 신이 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전 커피 대신에 차를 마신답니다.♪
♪토스트는 한쪽만 구워 먹죠.♩
와아.
다시 터져 나온 함성.
이서준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어느새 그에게서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노래하는 이서준의 모습을 자신의 스마트폰에 담는 사람.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멍하니 이서준만 바라보는 사람 등 제법 많은 사람이 모여 전망대는 어느새 콘서트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사람들 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나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느새 또 노래하고 있네. 저럴 때 보면 천상 노래할 팔자야. 그것도 수많은 사람의 마음에 행복을 선사하며 노래할 딴따라.’
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했지만, 꾹 참았다.
왜냐하면, 좋아하는 사람에겐 자신의 눈물을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살짝 맺힌 눈물을 서둘러 닦은 후 다시 고개를 들어 이서준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그는, 아주 즐거운 모습으로 노래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결심했다.
아직은 고백하지 않기로.
그리고 조급해하는 마음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아직은 나만의 스타로 품기엔 너무 밝은 별이었으니까.
지금은 그냥 더 많은 사람을 위해 빛날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