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할리우드 영화 촬영(2)
너무도 깔끔한 액션.
스미스 감독은 햇병아리 배우인 줄 알았던 이서준에게서 베테랑의 품격을 느끼는 이상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분명 초보가 맞는데… 근데 액션이 장난 아니네. 그렇다면 이 친구는 그냥 타고난 배우라는 뜻이잖아. 천생 배우로 먹고살아야 할 사람인 거지.’
그렇게 지금 스미스 감독은 머릿속에서 이서준에 관한 평가를 전면 수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하게 이서준의 액션 연기를 보고 혼란스러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리쉬 웨이였다.
‘이게 뭐야? 너무 잘하잖아. 운 좋게 잘할 수도 있는데… 이건 잘해도 너무 잘해.’
그가 이렇게 이서준의 액션 연기를 보고 크게 놀란 이유는, 그가 영화계 바닥에서 차근차근 올라온 배우였기 때문이다.
이름도 없는 엑스트라에서부터 오늘날 주인공 역을 맡기까지 안 해 본 연기가 없었고, 액션 연기도 정말 다양하게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런 이력을 가진 배우였기에 조금 전 이서준이 보여 준 액션 연기가 얼마나 완벽한 연기였는지 그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연기를 보기 전까지 이서준이 연기에 있어서만큼은 풋내기일 거라고 짐작했던 자신의 예상이 얼마나 잘못된 예상이었는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예상과 다르게 액션 연기를 너무 잘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배우가 액션 연기만 잘한다고 연기를 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생각할 때 이서준이란 한국배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조금 후에 드러날 거라고 예상했다.
왜냐하면, 모든 아시아 배우들이 가지고 있는 언어 문제가 다음 연기에서 나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자, 다음 신도 잘해 봅시다.”
스미스 감독은 순조로운 액션 촬영 덕분에 많이 신이 난 모습이었지만, 저 웃는 얼굴이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 같지는 않았다.
‘연습을 아무리 한다고 해도 절대 쉽게 바꿀 수 없는 게 하나 있지. 그건 바로 발음이야.’
자신처럼 미국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계속 살아온 사람과 비영어권 국가에서 태어나 영어를 따로 배운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발음이었다.
영어로 연기한다는 것은 영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이야기였다.
배우는 표정과 몸짓, 그리고 호흡 및 어조 등 자신의 신체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해서 자신이 맡은 역의 감정을 드러내게 되는데, 만약 배우의 발음이 이상할 경우에는 그 발음 하나 때문에 다른 모든 것들이 다 묻히게 된다.
즉 발음이 신경 쓰여 다른 것들은 보이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지금까지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한 동양인 배우들 중 크게 성공한 사람이 없었다.
지금 눈앞에서 싱글싱글 웃으며 꼴 보기 싫은 짓만 골라 하는 저 기생오라비 같은 녀석도 이제 곧 자신의 배우로서의 한계를 촬영장에서 드러낼 것이 분명했다.
액션 다음으로 이어질 신은 ‘엘른’에게 붙잡힌 ‘상춘’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는 내용이 담긴 장면이었다.
어떻게 보면 액션이 없는 순수 연기만 필요한 신이라고 볼 수 있었다.
“자, 촬영 바로 들어갈게요. 레뒤~ 액션!”
드디어 다시 시작된 촬영.
배우들은 감독의 목소리에 맞춰 연기 모드로 돌입했다.
국정원 취조실 안의 상춘.
그는 수갑을 찬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런 그를 취조하기 위해 맞은편에 앉은 국정원 직원.
그는 서류를 훑어보며 상춘에게 물었다.
“이름 상춘. 홍콩 트라이어스 중 최고 우두머리 푸 만춘의 양아들. 맞나?”
“…….”
상춘은 국정원 직원의 물음에도 묵묵부답일 뿐이었다.
국정원 직원은 취조 상대의 이런 반응을 워낙 자주 보았기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취조를 이어 갔다.
“이번에 한국에 들어온 이유는 요인 암살 때문으로 보이는데… 그게 맞나?”
“…….”
이어진 질문에도 역시 침묵을 선택하는 상춘.
국정원 직원은 순조롭지 않은 취조 과정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덜컥.
갑자기 열리는 취조실 문.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한국의 대표 히어로인 정령전사 ‘엘른’이었다.
국정원 직원은 ‘엘른’의 등장에 놀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직접 취조하실 생각이십니까?”
그의 물음에 ‘엘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지금부터 제가 맡아서 할 테니 과장님은 잠시 빠져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과장이란 직책으로 불린 국정원 직원은 이어진 엘른의 대답에 군소리 없이 곧바로 취조실을 빠져나갔다.
이런 부분만 봐도 ‘엘른’이 한국 정부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른 사람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맞은편 의자에 앉는 ‘엘른’.
그는 잠깐 동안 말없이 ‘상춘’을 바라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싱가포르에서 네가 죽인 사람이 있었지. 그는 네가 속한 그 더러운 집단의 협박에도 절대로 고개를 숙이지 않은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하지. 그는 왜 마피아인 너희들의 위협에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을까? 난 그 이유를 알아. 왜냐하면, 그가 생각했을 때 그렇게 하는 게 옳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어.”
몸을 상춘 쪽으로 조금 더 다가간 그는, 하고 있던 말을 자연스럽게 이어 갔다.
“그러나 무모한 판단이었지. 자신에게 입을 닦고 눈을 감고 있길 요구하는 상대는 너무나 거대한 폭력을 소유한 상대였거든. 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어. 왜냐면, 그는 불의를 보고 고개를 숙이고 눈을 돌리지 않을 용기가 있었거든. 그런 훌륭한 사람을 죽인 게 바로 너였지. 그리고 그 덕분에 아빠가 퇴근 후 자신들과 놀아 주기를 바라는 귀여운 두 딸에게 아빠를 뺏어 버린 셈이 되었지. 즉, 바로 너 때문에 두 명의 어린 생명이 아빠라는 큰 울타리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불쌍한 신세가 되었어.”
“…….”
웬일인지 말이 없는 상춘.
그의 침묵은 촬영 카메라 모니터로 연기 장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감독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외치게 만들었다.
“커트! NG!”
NG가 났음을 크게 외친 스미스 감독은 화가 난 모습 그대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상춘 역을 연기 중인 리쉬 웨이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그를 향해 따지듯 물었다.
“아니 왜 갑자기 대사를 안 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감독의 물음에 그는 많이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죄, 죄송합니다. 순간적으로 대사를 까먹었습니다.”
“아니 별로 어려운 대사도 아닌데 그걸 까먹어? …일단 알겠으니 다시 촬영 갑시다. 괜찮지?”
“아, 네, 괜찮습니다.”
리쉬 웨이의 어이없는 NG에 화를 내던 스미스 감독은, 주연 배우에게 다시 NG를 내지 말 자고 당부한 후 다시 촬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일단 조금 전 엘른의 연기는 너무 좋았어. 그러니 그건 그대로 살리고 NG 난 상춘의 대사부터 이어 가자고. 모두 알겠죠?”
“네.”
촬영장에 있던 스태프 모두가 다시 촬영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로 한창 바쁠 때, 주인공 리쉬 웨이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당황한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는 갑자기 NG를 냈을까?
나름 베테랑 경력을 가진 그가 NG를 낸 이유는 이서준의 영어 발음 때문이었다.
그는 이번 신을 촬영하면 이서준이 가진 아시아 배우로서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곧바로 드러날 거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그런 기대를 가득 안은 채 촬영에 임하고 있었는데, 이서준은 그런 자신의 예상과 너무 다르게 거의 완벽한 발음으로 자신의 대사를 치고 말았다.
그 덕분에 놀란 리쉬 웨이는 그의 대사 다음에 자신의 대사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고, 그래서 NG가 발생한 것이다.
일단 놀라는 것은 놀라는 것이고, 또다시 NG를 낼 수는 없었기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게 최우선의 일이었다.
리쉬 웨이가 대사를 놓쳐 감독에게 한 소리를 들었을 무렵 이서준은 기분이 너무 좋은 상태였다.
왜냐하면, 그토록 걱정하던 일이 어렵게 구매한 아이템 덕분에 칭찬 섞인 극찬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와, 이번 아이템도 대박이네. 그 아이템 덕분에 이렇게 칭찬까지 받고 말이야.’
본격적인 촬영이 들어가기에 앞서 이서준에게도 고민이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고민은 바로 영어 발음이었다.
지금 미국에 있다 보니 영어가 늘었다고는 하지만, 의사소통에 능숙해진 정도지 연기를 할 정도로 좋아졌다고 할 수는 없었다.
바쁜 일정상 영어 발음 연습에 매진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이서준은 자신만이 가진 비밀 무기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도깨비 안경을 통해 도깨비 상점으로 넘어간 그는, 얼마 후 자신의 고민을 해결해 줄 특별 아이템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외국어 공부 헬멧’이라는 이름의 헬멧이었다.
이 아이템은 헬멧을 쓴 채 외국어를 공부하면 해당 외국어를 아주 빠르게 습득하게 해 주는 아이템이었는데, 헬멧을 착용한 후 한 시간 정도 공부하면 1년 동안 공부한 효과가 생기게 해 주는 신기한 아이템이었다.
이서준은 헬멧을 쓴 채 공부하는 이상한 모습을 남에게 보여 줄 수는 없었기에 주로 집에서 영어 발음을 공부했다.
그렇게 10시간 정도 공부하니 진짜 놀랍게도 발음이 거의 원어민 수준으로 변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애슐리 브룩에게 연습의 결과를 보여 주었더니 그녀는 손뼉을 치면서 놀라워했다.
“아니, 어떻게 된 거야? 의외로 영어를 잘해서 대화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진짜 발음은 별로였거든. 근데 지금은 완전 미국 사람이야. 어떻게 단기간에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가 있어?”
이서준은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묻는 그녀를 향해 다음과 같은 거짓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죽어라고 공부했죠. 그리고 애슐리와 함께 지내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애슐리랑 친해지니까 실제 미국인은 어떻게 발음하는지 조금 알게 되었거든요. 그게 진짜로 많은 도움이 되었나 봐요.”
상식적으론 쉽게 믿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애슐리는 지금 이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기에 그런 간단한 거짓말에도 ‘그럼 내 덕분이란 말이네. 하하하.’라고 말하며 넘어갔다.
어쨌든 그런 숨은 사연 덕분에 이서준은 실제 촬영장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촬영에 매진할 수 있었다.
지금 그로서는 건네 듣기로 연기를 참 잘하는 배우라고 알고 있는 주연 배우 리쉬 웨이가 제발 정신을 차려 주었으면 하는 바람밖에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직접 만나 함께 연기해 본 그는 이상하게 나사 하나가 풀린 사람처럼 집중을 못 하는 듯 보였다.
주인공답게 촬영해야 할 분량이 가장 많은 그가 어서 제 페이스를 보이며 지금보다 더 순조롭게 촬영이 진행되기를 속으로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