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세계 무대에 도전하다(4)
이서준이 자신이 열심히 만든 도시락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 두근거렸다.
마음이 너무 두근거린 탓일까?
앞을 제대로 못 살피고 걷는 바람에 작업실에서 나오는 누군가와 크게 부딪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퍼억.
“아악!”
“아이쿠!”
꽤 세게 부딪친 덕분에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두 사람.
나영은 그대로 통로에 누워 버리고 말았고, 그녀와 부딪친 사람은 그런 그녀의 위로 쓰러졌다.
어쩌다 보니 이상야릇한 자세로 쓰러진 두 사람은 깜짝 놀라며 얼굴을 맞대고 있는 상대를 확인했다.
“오빠!”
“나영아!”
그녀와 부딪친 사람은 이서준이었다.
이서준도 하필 녹음을 끝내고 휴게실로 향하다가 마주 걸어오던 나영과 부딪쳤다.
향긋.
때마침 묘한 향기가 그녀의 코를 간지럽혔다.
아마 이서준에게서 나는 냄새일 것이다.
두근.
이상한 것은 냄새를 맡고 난 후 곧바로 심장이 뛰는 소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붉어진 얼굴.
그리고 불현듯 지금 두 사람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엄마!”
너무 놀란 나머지 크게 소리를 지르며 이서준을 밀치며 일어나는 나영.
그리고 이서준 역시 놀라는 나영 덕분에 자신들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일어선 이서준은 많이 무안해하는 얼굴로 나영에게 물었다.
“괘,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
당황한 모습으로 자신의 안부를 묻는 이서준을 보며 나영도 부끄러움에 빨갛게 변한 얼굴로 대답했다.
“으, 응, 괜찮아.”
“안 다쳤다니 다행이다. 내가 딴 데 정신이 팔려 앞을 제대로 못 살피고 걸었어. 정말 미안해.”
“나도 앞을 안 보고 걸은 건 마찬가지야. 나도 미안해, 오빠. 오빠는 안 다쳤어?”
“어, 난 멀쩡해.”
서로가 다치지 않았음에 안심하는 두 사람.
그러나 사과가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이상한 공기가 흘렀다.
평소 매우 친하게 지냈던 두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사고에 가까운 충돌로 인해 두 사람이 다소 야릇한 자세를 연출한 탓도 무척 컸지만, 그것보다 큰 이유는 이서준의 몸에서 풍겨 나오고 있는 ‘악마의 유혹’이라는 향수의 향기 때문이었다.
시곗바늘을 조금만 앞으로 돌려 보자.
두 사람의 충돌 사고가 생기기 바로 전 이서준은 노래를 녹음하고 있었다.
가사까지 일사천리로 완성이 되었기에 밤을 새워 가며 작업을 진행했다.
그래서 아침까지 진행된 녹음.
감정을 담아 2번이나 불러 보았는데, 이상하게 조금 불만족스러웠다.
뭐라 설명하긴 힘들었는데, 약 2% 정도가 부족한 느낌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런 이유로 고민하던 이서준은 주머니 속에 있던 ‘악마의 유혹’을 다시 꺼내게 되었다.
혹시라도 부족한 2%를 채워 주는 돌파구가 되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꺼낸 것이다.
향수를 조금 뿌려 보고 다시 녹음을 시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자신의 노래에서 원하는 느낌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야, 이게 되네.’
답답했던 마음이 풀리면서 힘든 작업이 더 이상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기에 녹음은 단숨에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녹음을 마친 후 조금 쉬기 위해서 휴게실로 향했고, 때마침 작업실로 오고 있던 나영과 통로에서 부딪치게 된 것이다.
이서준의 몸에 남아 있던 향기는 쓰러진 나영에게로 향하게 되었고, 그 향을 맡게 된 그녀는 이전에는 느껴 보지 못한 강한 자극을 받아 버렸다.
그래서 그녀의 몸 안에 있던 온갖 연애 세포가 이서준의 모습에 반응을 해 버리는 바람에 너무 마음이 설레 이서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나영은 갑자기 너무나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래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손만 들어 도시락통을 내밀었다.
“오빠, 이거 먹어. 아침에 먹으려고 만들다 보니 너무 많이 만들어서 조금 싸 들고 왔어. 저번에 나도 오빠 거 먹었잖아.”
“…고마워, 나영아.”
이서준 역시 매우 어색한 모습으로 나영이 건네는 도시락통을 받았다.
다시 흐르는 어색한 공기.
이번에는 이 어색함을 참아 내지 못한 나영은 도망이라는 쉬운 방법을 선택했다.
“나 그럼 갈게, 오빠. 나, 나중에 봐.”
“…그, 그래.”
그렇게 헤어진 두 사람.
나영이 도망치듯 사라져 버린 뒤, 그녀가 사라진 곳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이서준의 모습도 그다지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사실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 역시 ‘악마의 유혹’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었으니까.
‘악마의 유혹’이란 향수는 향기를 맡는 사람의 연애 감정을 극도로 민감하게 만들어 버린다.
마치 잠들어 있던 연애 세포를 일순간에 모두 깨워 버리는 것과 같은 효능을 가진 향수가 바로 ‘악마의 유혹’이었다.
그러나 이 향수를 사용할 때는 주의할 점이 있었으니, 사용자가 부작용 없이 사용하기 위해서는 ‘고요한 숲속’이라는 차를 먼저 마시고 사용해야 한다는 주의 사항이 따랐다.
‘악마의 유혹’의 향은 사용자와 피사용자를 구분해서 작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향기를 맡은 사람은 무조건 ‘악마의 유혹’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서준은 이 향수 덕분에 얼리엇 무크의 곡에 크게 자극받아 좋은 곡을 만들 수 있었다.
이런 ‘악마의 유혹’에 영향을 받지 않고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셔야 하는 차가 있었으니, 그 차의 이름이 ‘고요한 숲속’이라는 차인 것이다.
차를 마시면 그 어떤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고 부동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데, 이런 차의 효능 덕분에 무조건 두 아이템을 함께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도깨비 상점을 정식으로 이용할 자격이 없는 이서준에게는 그런 고급 정보를 알아낼 방법이 없었기에 잘못된 방법으로 ‘악마의 유혹’을 사용한 부작용을 겪게 된 것이다.
사실 이서준 역시 나영을 좋게 생각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일종의 호감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지금 그의 상황이 연애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었기에 잠든 것처럼 드러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악마의 유혹’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면서 당연한 말이지만 나영과의 접촉에 격한 반응이 나타났다.
심장이 빨라도 너무 심하게 빨리 뛰었다.
이렇게 빨리 뛰다가 터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싶은 걱정이 들도록 너무나 빠르게 뛰고 있었다.
다시 떠오른 조금 전 상황.
실수로 그녀와 부딪친 뒤 하필 이상한 자세로 땅바닥까지 구르면서, 지금의 심장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정하려 노력해 보았지만, 지금까지도 전혀 진정이 되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러지?’
자신의 몸이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하나.
‘내가 혹시 나영이를… 좋아하나?’
고민 끝에 이러한 결론이 도출되었다.
나영이 때문에 생긴 이상한 감정 때문에 휴게실로 가는 건 바로 포기했다.
그렇게 다시 작업실로 돌아온 이서준은 다시 한번 곰곰이 몸의 이상 현상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내가 나영이를 좋아한다고? 그럼 언제부터 좋아하게 된 거지?’
자신이 사용한 아이템의 부작용 때문이란 사실을 알 수 없었던 이서준은, 다시 한번 그녀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언제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한참 궁리한 덕분에, 자신이 최근에 이나영이란 여자가 무척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있음을 기억해 내었다.
미국에서 일할 때 나영이 김진영과 함께 자신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날 함께 저녁을 먹은 후 김진영을 쉬게 놔두고 두 사람만 산책을 나선 적이 있었는데, 무심코 걷다 보니 뉴욕의 유명한 관광지인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전망대로 향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멋진 야경을 경험한 덕분에 기분이 좋아 노래까지 불렀었는데, 노래를 부른 후 다시 후련한 마음으로 뉴욕의 야경을 감상할 때였다.
우연히 자신처럼 야경에 푹 빠져 있는 나영의 옆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그때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예쁘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때가 자신이 그녀에게 반한 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척 낯선 감정이었다.
물론 과거에도 누군가와 교제한 적은 있었지만, 대학교 다닐 때 딱 한 번 교제를 했었다.
그 뒤 다시 연애를 한 적이 없었는데, 그렇게 따지면 제법 오랜 시간 누구와 사랑을 나눈 적이 없는 셈이었다.
더군다나 그때는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누군가와 교제를 한 터라 흔히 말하는 가슴 절절한 사랑 같은 깊숙한 감정 교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런 미천한 연애 경력을 가진 이서준이었기에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에 많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꾸만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서 보았던 나영의 옆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래서 이서준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피아노 앞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피아노 의자에 앉은 이서준은 곧 눈을 감은 채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
피아노를 치는 이서준의 머릿속에는 어느새 나타난 나영이 뉴욕 시내를 즐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서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밖을 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감정을 그대로 피아노로 쏟아 내기 시작했다.
어쩌면 지금 피아노를 치고 있는 이서준은 인기 스타 이서준이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순수한 남자 이서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연주한 후 드디어 연주를 마친 이서준.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또 하나의 곡을 만들었단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다시 연주해 봐야겠다.”
이서준은 이렇게 중얼거린 후 방금 연주했던 곡을 다시 연주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정현이 이서준에게 했던 말처럼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 정도의 명곡은 아주 우연한 계기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이서준이 직접 몸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었다.
* * *
미국 워너즈 뮤직의 회의실.
그곳에는 사장 마이클 본과 부사장 제이크 슈나이저가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친목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내용이었다.
“요즘 날 이 자리에서 밀어내기 위해 바쁘게 움직인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담담한 표정으로 날 선 질문을 던지는 마이클 본 사장의 물음에 슈나이저 부사장은 미소 띤 얼굴로 답했다.
“내가 하는 일에 관심이 많으신가 보군요. 네, 맞습니다. 제가 CEO 교체 건을 이사회에 상정하기 위해 노력 중인 건 사실입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괜찮은 소식통을 가지고 계신 모양입니다. 하하하.”
자신의 질문에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하는 슈나이저 부사장의 모습에 마이클 본 사장의 눈은 조금 찌푸려졌다.
“제가 소식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사장님이 너무 설치고 다니셔서 가만히 있는 제 귀에 저절로 들리게 된 거 같습니다. 제가 알기를 원치 않으셨다면 조금 조용히 다니시지 왜 그렇게 요란을 떨며 다니셨는지 모르겠군요. 경망스럽게 말입니다.”
순간 눈 위가 파르르 떨리는 제이크 슈나이저.
방금 마이클 본 사장이 자신이 이사들을 만나고 다니는 일을 ‘경망스럽게’라는 단어로 표현한 게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