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미국 침공(3)
감정을 추스르던 부루노스의 눈이 다시 치켜떠지며 소리쳤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투자금을 늘리겠다고요? 제가 지금 투자금을 늘리자고 괜한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거 같습니까?”
갑자기 크게 화를 내는 그의 모습에 쿠로시노 사장은 깜짝 놀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그, 그게 아니라 저, 저는 좋은 뜻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부루노스의 화는 쿠로시노의 다급한 변명 따위에 수그러들 정도의 작은 화가 아니었다.
“그게 어떻게 좋은 뜻입니까? 가수 같지도 않은 사람들과 나를 돈으로 엮으려고 하는 게 어떻게 좋은 뜻이냐 이 말입니다. 그런 헛소리만 내뱉을 거면 그냥 당장 나가세요, 어서요!”
“아, 아니 제 말은 진짜 그런 뜻이 아니라….”
쿠로시노 사장은 여전히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부루노스의 모습에 서둘러 변명을 더해 보았지만, 화가 난 부루노스의 지시를 받은 회사 직원들로 인해 강제로 건물 밖으로 쫓겨나는 불쌍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철퍼덕.
“으악!”
경비원들에게 거칠게 밀쳐진 그는 딱딱한 아스팔트 위로 쓰러질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일순간에 처량한 몰골로 변한 그는, 당황한 모습으로 일어서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야 했다.
먼지를 털면서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다.
“…나 이런 젠장…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을 찾아봐야겠군.”
부루노스의 뜻은 확실히 알게 된 터라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가장 좋은 협력 대상이었던 부루노스와의 대화가 단절된 이상 어쩔 수 없이 다른 대상을 찾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래서 옷의 먼지를 다 털어 낸 그는 힘없는 모습으로 대기 중인 차를 향해 걸음을 옮겨야 했다.
쿠로시노 사장과의 불쾌한 만남이 있던 그 날 밤.
부루노스는 낮에 있었던 쿠로시노 사장과의 대화가 정말로 불쾌했던 까닭인지, 자신의 개인 SNS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장문의 글을 남겼다.
‘앨범을 냈다고 해서 모두 다 진정한 가수가 되는 건 아니야. 팬들이 자신들에게 환호를 보내고 있다고 해서 모두 다 가수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야.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노래를 향한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있냐는 점이지. 오늘 내 기분이 정말 엉망진창인 이유는, 노래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주제에 돈으로 나를 움직이려고 하는 짜증 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야. 지금 내 기분이 이렇게 더러운 건 바로 그놈 때문이라고. 제발 부탁인데, 나를 꼬드겨서 사람들에게 관심을 얻으려고 하는 그 얄팍한 수작이나 고민할 시간에 노래 연습이나 똑바로 해라. 바로 너희 나라 옆 나라 가수들은 얼마나 뛰어난 노력을 쏟아부은 덕분에 이런 뛰어난 실력을 가지게 되었는지 제발 두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보고 배우란 말이야. 젠장!’
팬들은 부루노스가 평소와 다르게 아주 긴 글을 적으며 현재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점으로 보아 그가 진심으로 크게 화가 났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그의 글 속의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누구인지 매우 궁금해했었는데, 부루노스의 회사에 근무 중인 직원의 댓글 덕분에 그의 글 속 주인공이 바로 일본의 엔터테인먼트 회사 사장이라는 사실까지 알아내게 되었다.
이런 작은 단서를 통한 추적 결과 언급된 이가 바로 일본의 대표 엔터테인먼트 회사 사장인 쿠로시노란 사실을 알아냈고, 그리고 그가 지금 미국에서 ‘스냅스’의 미국 진출을 돕고 있단 사실까지 밝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결론을 얻은 덕분에 부루노스가 자신의 개인 SNS를 통해 공개 저격한 대상이 일본 제니스 소속 가수인 ‘스냅스’가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추측까지 가능하게 만들었다.
인터넷상에서 이런 진실에 가까운 루머가 떠돌기 시작하자, 루머의 대상자인 일본의 제니스엔터테인먼트에서는 곧바로 자신들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라는 해명을 부랴부랴 내놓게 되었다.
그러나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한 부루노스가 다시 한번 자신의 SNS에 적힌 글에 관해 이렇게 설명하면서 사그라들던 루머는 다시 고개를 쳐들고 만다.
“여러분의 추리력에 매우 놀랐어요. 전 그냥 이렇게 글을 써서 엉망이 된 내 기분을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을 뿐이었거든요. 근데 그 정도를 넘어서서 글 속에 숨은 사실들까지 찾아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요. 여러분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에요.”
이러한 그의 추가 발언 덕분에 일본의 제니스는 다시 한번 관심의 중심에 서게 되는 곤란함을 다시 겪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언급 가수인 ‘스냅스’의 미국 진출에 관해서도 큰 관심이 생기게 되었다.
물론 미국에 새롭게 데뷔하는 그들로서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관심이 그들의 엉망진창인 실력으로 향하게 되면서 결국은 조롱거리로 전락하게 되었다.
TV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그들의 노래와 뮤직비디오, 그리고 미국에서 보인 무대들을 보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음거리가 되었기에 결국 그들의 미국 진출은 실패하게 된 것이다.
엎친 데 덮친다는 것이 바로 이런 뜻일까?
연이어 일본 언론에서는 국제적 망신 덩어리가 된 ‘스냅스’에 관한 감춰진 진실을 보도하게 된다.
미국 데뷔 앨범이 발매되고 그룹 ‘스냅스’의 타이틀곡인 ‘happy day’는 곧바로 빌보드 차트에 차트인을 하게 되었는데, 그 속에 숨은 부끄러운 진실이 공개된 것이었다.
스냅스가 곧바로 빌보드에 차트인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일본 팬들의 조직적인 성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의 제니스 엔터테인먼트는 그들이 가진 막대한 영향력을 이용해서 미국 데뷔 앨범 발매일에 맞춰 그들이 할 수 있는 힘을 여기에 집중하게 된다.
즉 일본의 여러 연예 기획사에 ‘스냅스’의 앨범 발매에 맞춰 자신들이 데리고 있는 가수들의 팬클럽을 적극 이용해서 응원을 보내라는 지령이 떨어진 것이었다.
일본의 연예계 자체가 제니스를 중심으로 가지가 뻗어 나가는 식의 기형적인 구조였기 때문에 그런 그들의 요청을 거절할 만한 배짱 좋은 사람들은 없었다.
그래서 앨범 발매일, 일본 내 모든 팬클럽에서는 제니스의 미국 데뷔곡을 무한 스트리밍하며 미국 내 라디오 프로그램을 향해 그들의 곡을 틀어 달라는 바람이 담긴 메시지를 계속해서 보내는 식의 활동을 하게 만들었다.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는 제니스의 노력으로 철저히 비밀리에 감춰져 있었는데, 최근 제니스 엔터테인먼트가 벌인 국제 망신 덕분에 참고 있던 팬 중 한 명이 공개적으로 알린 것이었다.
그들의 지시로 움직였던 한 팬클럽 회장이 자신의 개인 SNS에 그 당시 자신이 했던 일을 소상히 설명했고, 이로 인해 ‘스냅스’가 어떻게 빌보드에 차트인이 가능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일본 연예계를 지배하고 있는 제니스에 관한 비판 여론이 점점 커지게 된다.
그래서 제니스는 부정적인 여론을 되돌리기 위해 사력을 다해 노력하게 되고, 그 결과 그룹 ‘스냅스’는 조용히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 * *
여러 일정을 소화 중인 케븐 파이스는 차로 이동 중에 자신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스마트폰을 꺼내었다.
일정 사이에 잠깐 생긴 시간이라 휴식을 취해야 했지만, 반드시 통화해야 할 사람과 통화하기 위해서였다.
휴식 대신 일을 선택한 셈이었다.
띠리리링.
[여보세요?]
곧바로 들려오는 한 남자의 목소리.
케븐 파이스는 전화기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그 남자의 목소리만 듣고서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요즘 바쁘다는 말은 들었어. 잠은 좀 자면서 활동하는 거야?”
전화 속 목소리의 남자는 케븐 파이스의 걱정이 담긴 물음에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당연하죠.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무조건 자요. 그리고 스태프들이 많이 챙겨 주셔서 생각보다는 힘들지 않고요.]
“그래? 그게 정말 반가운 소리군. 아, 그리고 내일 콘서트지?”
[네, 맞아요, 케빈.]
“하하, 콘서트 표 보내 줘서 정말 고마웠어. 딸과 아내가 자네 팬인 덕분에, 자네와 친한 내가 만약 표를 구하지 못했다면 내가 어떤 원망을 들었어야 할지 정말 상상만 해도 무서울 정도였거든.”
그의 너스레 섞인 대답에 통화 상대방은 웃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그래요? 하하하, 그럼 좀 더 애를 태우며 드릴 걸 잘못했네요. 만약 그랬다면 지금보다 더 저에게 고마워하셨을 거 아니에요.]
상대의 웃음 섞인 대답에 케븐 파이스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대답 속 한 단어를 콕 집어 말했다.
“애가 탄다라? 나는 지금 충분히 자네 때문에 애가 타는 중이야. 우리 서준, 아니 우리의 엘른이 어서 스크린에 다시 등장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중이거든.”
케븐 파이스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 잠시 머뭇거리던 이서준이 이렇게 대답했다.
[…저도 그 순간을 무척 기다리고 있습니다, 케븐.]
케븐 파이스가 전화를 건 상대는 요즘 미국 내에서 엄청난 인기몰이 중인 이서준이었다.
바쁜 와중에도 마벌 스튜디오의 가장 기대작 중 하나인 ‘엘른’ 주인공의 근황을 챙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콘서트는 언제 끝나?”
[내일 뉴욕에서 하고, 일주일 후에 LA에서 공연이 있어요.]
“나도 가고 싶지만, 일정상 시간이 나지 않아 정말 속상한 기분이야. 내가 못 가는 대신 축하 꽃다발은 자네보다 큰 놈으로 보낼 테니 기대하고 있으라고.”
[네, 케븐. 콘서트 끝나고 연락 드릴게요.]
통화는 이렇게 끝이 났다.
이서준과의 통화를 마친 케븐 파이스는 빠르게 이동 중인 차의 밖을 쳐다보았다.
요즘 그는 매우 바빴다.
최근 개봉한 ‘상춘’의 실패 때문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고약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아이작 서머더는 공개적으로 자신을 비난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 가능하다면 자신을 예전처럼 본인의 품 안으로 데리고 오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만약 그게 힘들다면 자신을 회사 밖으로 쳐내는 것도 고려하고 있을 것이 분명한 고약한 심보의 능구렁이였다.
아이작 서머더라는 사람은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최근 ‘상춘’ 촬영에 안 좋은 영향을 끼쳤던 인물들이 모두 다 그의 지시를 따랐다는 사실도 알아내었다.
이런 점들만 봐도 그가 얼마나 흉계에 능한 작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왜 그 나이가 되도록 회사 내에서 정치질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늙은이야….’
이제 곧 회사 일을 하기에는 벅찬 나이가 되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만약 그라면, 다가오는 은퇴를 위해 회사 일은 다른 이에게 넘길 시간일 텐데 어찌 된 일인지 아이작 서머더는 도무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