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깨비 덕분에 슈퍼스타-171화 (171/189)

171. 미국 침공(4)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케븐 파이스.

잡념을 떨쳐 버리기 위한 행동이었다.

회사 내 권력 싸움에 능통한 그를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좋은 영화를 만드는 거였다.

케븐 파이스는 그가 만드는 다음 영화의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것이 순리대로 풀려 갈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가진 그가 심혈을 기울여 진행 중인 작품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지난 10년 동안 여러 영화를 통해 아주 단단한 세계관을 구축하며 승승장구한 마벌 스튜디오지만, 기존의 영웅들이 이제 하나둘 마벌 스튜디오의 세계에서 은퇴하고 새로운 영웅들이 그들의 빈자리를 이어받으려고 하는 중요한 이때, 그 포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는 ‘상춘’이란 작품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분명 실패한 영화였다.

그래서 상춘 다음으로 등장할 마벌 스튜디오의 영화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상춘’ 다음으로 나오기로 했던 영화는 냉정하게 판단해 보면 분명 많이 약했다.

그렇게 판단한 결과 케븐 파이스는 준비된 영화의 순서를 바꾸면서까지 밀고 싶은 영화가 있었으니, 그 영화가 바로 새로운 마벌의 영웅 ‘엘른’이 등장하는 영화였다.

사실 ‘엘른’은 중요한 배역이 아니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상춘’이 적당한 수준 이상의 성과를 보여 준다면 자연스럽게 2편 제작에 들어갈 생각이었고, ‘엘른’이라는 영웅 캐릭터는 상춘의 2편에 다시 출연시킬 조연 캐릭터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마벌 스튜디오가 구상 중인 세계관에서 ‘엘른’은 그다지 큰 비중을 가진 캐릭터는 아니었단 말이다.

그러나 상춘이 개봉한 후 케븐 파이스는 기존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왜냐하면, ‘엘른’이라는 캐릭터가 너무나 마음에 든 탓이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이서준이 연기한 엘른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편집이 완료된 영화를 처음으로 보았을 때 케븐 파이스는 속으로 ‘엘른’에게 감탄을 했었다. 영화를 본 관객들 역시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인지 실패한 상춘에서 유일하게 사랑받는 역할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엘른’이었다.

제작자로서의 자신의 감, 그리고 관객들의 반응과 이서준의 가수로서의 인기 등을 종합해서 판단하면, 차기작이 중요한 지금 가장 먼저 관객들에게 선보여야 하는 영화는 바로 ‘엘른’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서준의 스케줄이야. 미국에서 콘서트 2회, 그리고 한국에서의 콘서트를 끝마쳐야 촬영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어. 그러니 난 그가 내 옆으로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엘른’의 촬영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끝내 놓고 기다리는 게 최상의 판단일 거야.’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그는, 그때부터 ‘엘른’이 출연하는 영화의 준비를 돌입했고, 실제로 오늘 짜여진 스케줄 중 50% 정도는 엘른 촬영에 관한 일정들이었다.

그는 이미 ‘엘른’ 제작에 돌입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서준이 주연을 맡게 될 영화 ‘엘른’은 실제 제작에 돌입한 상황이라 볼 수 있었다.

* * *

웅성웅성.

콘서트 시작 5분 전.

콘서트를 찾은 이서준의 팬들은 잠시 뒤 시작될 이서준의 콘서트에 관한 기대감으로 인해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

“으~ 떨려.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서준 오빠가 나오겠지?”

“히히, 그렇게 생각하니까 가슴이 떨려 미칠 거 같아.”

이서준이란 가수에게 완전히 반해 콘서트장을 찾아 준 10대 팬들은, 손꼽아 기다리던 공연이 이제 막 시작한다는 설렘에 흥분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10대 팬들만이 공연장을 찾아 준 것은 아니었다.

이서준의 팬 중 10대가 가장 많은 비율을 나타내는 팬층인 건 분명 맞았지만, 20대와 30대로 보이는 팬들도 공연 시작을 기다리는 팬 중에서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의외로 남자 팬들의 모습도 많이 보였다.

그렇게 팬들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콘서트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던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거대한 콘서트장을 울려 퍼졌다.

“내가 왔다, NY!”

꺄아아악.

갑자기 들리는 이서준의 목소리에 그의 등장을 기다리던 관객들의 함성이 엄청나게 터져 나왔다.

번쩍.

그리고 관객석 한가운데를 비추는 핀 조명.

그곳에는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기다리던 남자, 이서준이 서 있었다.

꺄아아악.

다시 한번 크게 울리는 커다란 함성.

관객들의 환호성을 들은 이서준은, 팬들의 반응이 마음에 든 듯 눈을 찡긋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꺄아아악.

마치 끼를 부르는 듯한 매혹적인 그의 모습에 관객들은 다시 한번 엄청난 함성을 질러 댔고, 이서준은 그 소리를 들으며 이미 메고 있던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가 연주하는 곡은 이번에 드디어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른 그의 미국 데뷔곡 ‘악마의 유혹’이었다.

꺄아아악.

관객들은 당연한 말이지만, 이서준의 연주에 다신 한번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 * *

“수고하셨습니다!”

공연을 마친 이서준은 대기실로 돌아오면서 만나는 스태프 모두에게 큰 소리로 인사했다.

그리고 마지막 스태프에게도 감사 인사를 전한 그는, 드디어 대기실 의자에 앉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무려 2시간 30분 동안의 공연에 혼신의 힘을 쏟아부었기에, 온몸에 힘이 빠진 그는 의자에 널브러지듯 앉을 수밖에 없었다.

스윽.

힘들어 보이는 이서준을 향해 말없이 물을 건네는 따뜻한 손길.

이서준은 그 손길을 느끼고는 반가운 얼굴로 물을 받았다.

“사장님, 고마워요.”

“마시고 좀 쉬어.”

지친 그를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곁을 지키는 사람은 이서준의 매니저이자 현재 레이블 사장을 맡고 있는 조상구였다.

정말 콘서트에 모든 힘을 쏟아부은 탓인지 의자에 앉아 있는 이서준의 뺨에는 연신 땀이 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조상구 사장은 재빨리 수건을 찾아와 이서준에게 다시 건넸다.

“땀도 좀 닦아. 그리고 오늘 진짜로 고생했어.”

“아, 고맙습니다.”

자신이 건넨 수건으로 땀을 닦는 이서준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조상구는, 문득 생각이 났는지 이런 말을 건넸다.

“예전에 내가 처음으로 매니저 일을 시작할 때… 파란 하늘을 쳐다보며 어떤 다짐을 외쳤는지 알아?”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이서준은 진심으로 궁금한 듯 물었다.

“글쎄요… 어떤 다짐을 하셨는데요?”

조상구는 이서준의 물음에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맡은 가수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겠다는 다짐을 외쳤어.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모르고 떠들었던 셈이지. 근데 재밌는 건… 오늘 네가 내 허황된 다짐을 현실로 만들어 준 셈이야. 내 말도 안 되는 다짐을 말이야.”

이서준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조상구를 쳐다봤다.

방금 그의 말 속에 생각지도 못한 진심이 담겨 있단 사실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조상구는 깜짝 놀라 자신을 쳐다보는 이서준을 향해 웃으며 다시 말했다.

“왜 그렇게 놀란 눈으로 쳐다봐?”

“아니 우리 사장님이 진짜로 감동하신 거 같아서요.”

“후후, 진짜 감동한 거 맞아. 나 아까 네 콘서트 보면서 혼자 계속 벅찬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어. 말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른 사람들이 너를 보며 환호를 보내는 장면을 보고 있으니 어찌나 큰 감동이 밀려오던지… 암튼 난 이제 이 일 그만두어도 여한이 없을 거 같아.”

이서준은 조상구의 ‘그만두어도 여한이 없을 거 같아.’라는 말에 다시 깜짝 놀라며 그를 만류했다.

“아니, 사장님. 아니 형. 설마 진짜로 그만두겠다는 말씀은 아니죠?”

“하하, 혹시 내가 그만둘까 걱정돼?”

“네, 진심으로요. 저 진짜 형 없으면 힘들어요. 그러니 그만둔다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아 주세요.”

“하하,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말이네. 방금 내 말은 그냥 말이 그렇다는 뜻이야. 그러니 내가 그만둘 일 없어. 그리고 솔직히 지금 내가 어떻게 그만두냐? 네가 얼마나 더 대단한 스타가 될지 너무 궁금한데 말이야. 네 미래가 궁금해서라도 어디 가지 않고 딱 네 옆에 붙어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어.”

조상구의 대답을 듣고 그제야 안심하는 이서준.

조상구는 그런 이서준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흐뭇한 미소를 띤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오늘 정식으로 오퍼가 들어왔어.”

“오퍼요? 무슨 오퍼요?”

“마벌 스튜디오에서 온 오퍼.”

“…혹시 엘른 때문에요?”

“맞아. 엘른이 중심이 된 새로운 ‘응징자들’을 제작할 생각이라고 하더라. 설명대로라면 네가 새로운 ‘응징자들’의 주역이 되는 셈이지.”

조상구의 설명을 들은 이서준은 많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새로운 응징자들요? ‘엘른’의 솔로 영화를 먼저 찍는 거 아니었어요? 전 분명 케븐에게 그렇게 들었었는데….”

“원래라면 그게 맞지. 근데 케븐이 생각이 바뀌었나 봐. 차라리 새로운 응징자들이 필요한 시점이니 새로 나타난 영웅들이 마음을 합쳐 새로운 응징자들을 구성하는 스토리가 더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야. 엘른 솔로 영화는 그다음으로 제작할 계획이라 말했고.”

“그렇구나….”

케븐 파이스의 계속된 출연 요청 때문에 자신이 마벌 스튜디오에서 새로 만들어지는 영화에 출연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판이 커지는 것 같아 조금은 당혹스러운 이서준이었다.

그런 이서준을 보며 조상구는 다시 물었다.

“근데… 진짜 괜찮겠어?”

“뭐가요?”

“한국에서의 콘서트 말이야. 미국에서의 콘서트를 마치고 곧바로 한국으로 넘어가 다시 콘서트를 할 계획이잖아. 근데 마벌 쪽 계획대로라면 넌 쉬지도 못하고 바로 미국으로 되돌아와 곧바로 영화 촬영에 투입돼야 해. 네 입장에선 정말 힘든 일정이라 할 수 있지. 그래서 말인데… 이런 상황이면 차라리 한국 콘서트를 다음으로 미루는 게 어떨까?”

이서준은 조상구의 제안에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뇨, 한국 공연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할 거예요. 팬들에게 약속했잖아요. 그리고 솔직하게 한국팬들 너무 보고 싶어요. 쉬는 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환호하는 팬들의 모습을 보면 힘이 날 거 같기도 해요. 그러니 연기 대신 방금 말씀하신 일정대로 가는 걸로 해요.”

“…그래 알겠어.”

조상구는 연기를 반대하는 이서준에게 다시 한번 한국 콘서트를 미루자는 의견을 말하려고 했지만, 곧바로 포기해 버렸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서준이라면 절대로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임을 깨달은 탓이었다.

평소 부드러운 이미지와 다르게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사람이 이서준이란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조상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