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코믹콘 축제(2)
이서준은 정말 많은 사람과 인사하고 대화를 나눴다.
나중에는 악수를 너무 많이 한 나머지 팔이 조금 저릴 정도였으니,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과 악수를 한 것인지 잘 알 수 있었다.
인사를 나눌 사람들과 거의 다 인사를 나누었다는 생각이 들 무렵, 이서준은 조용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파티장 구석 편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파티장 구석에 자리한 바를 발견한 그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바텐더를 향해 다가갔다.
바텐터 역시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서준을 발견한 후 웃는 얼굴로 물었다.
“음료를 준비해 드릴까요?”
이서준은 그의 친절한 물음에 고마움을 담아 부탁했다.
“아, 감사합니다. 혹시 샴페인이 있나요?”
바텐더는 이서준의 물음에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물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바로 준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잠시 뒤.
샴페인을 들고 온 바텐더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이서준에게 고급 샴페인이 든 잔을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전하며 그가 건네는 잔을 받았다.
그리고 이곳의 음주 문화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다른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잔에 담긴 샴페인의 향기부터 맡았다.
그러자 코끝을 파고드는 산뜻한 샴페인의 향기가 느껴졌고, 잠시 맡은 냄새만으로도 지금 자신이 들고 있는 샴페인이 매우 고가의 술이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술잔에 입을 대고 한 모금 마셔 보는 이서준.
그는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샴페인의 움직임을 느끼며 맛을 음미했다.
술이 한 모금 몸속으로 들어가니 힘든 하루를 보냈음을 느끼며 한숨이 새어 나왔다.
“휴~”
무척 피곤한 하루였다.
의외로 모르는 사람들과 만나 인사를 나누는 것은 그렇게 많이 힘들지 않았다.
체력적으론 자신이 있는 편이었기에 오늘 하루 정도 그랬다고 피로감을 느낄 정도가 아닌 강철 체력의 이서준이었다.
그런 이서준을 힘들게 하는 건 다름 아니라 파티장에 자신에게 접근하는 여성들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대한민국과 다르게 보다 개방적인 문화를 가진 미국이다 보니,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것은 이쪽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모습인 거 같았다.
더군다나 파티장 같은 즐겁고 흥분된 장소에서는 그런 일들이 더욱 빈번하게 발생하곤 하였는데, 파티장에 등장한 이서준을 보고 이성적인 신호를 보내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어떻게 보면 너무 노골적이어서 자신을 당황하게 만드는 여자들도 무척 많았는데, 그래서 더욱 힘들었다.
파티장에서 만난 여자들과 일에 관한 교류를 제외하고 어떠한 사적 교류도 할 마음이 없던 그였기에, 어떤 여성이 접근해 온다면 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지 않는 선에서 거절의 뜻을 표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피로감은 육체적 피로감이 아니라 거의 다 정신적 피로도라고 할 수 있었다.
술을 조금씩 들이켜며 동시에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는 이서준.
다행스럽게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뭐 해? 우리 서준 씨?
시차를 생각하면 매우 이른 시간일 텐데 이른 시간부터 자신을 생각하며 보내온 메시지라 보자마자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 코믹콘 축제 뒤풀이 파티 중이야. 그리고 현재는 구석에 몰래 숨어 있고.
-왜? 우리 서준 씨 왜 구석에 숨어 있어?
-사람들 많이 만나서 악수했더니 손목이 아프네.
-그래? 어쩌지. 내가 ‘호’해 줄 수도 없공. 이힝~
마치 나영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메시지였기에 보고 있던 이서준의 얼굴에는 자연스럽게 행복감이 듬뿍 담긴 미소가 피어올랐다.
-근데, 사람들이 오빠 보고 너무 좋아하지?
-음… 아주 조금?
-헤헤. 여자도 있어?
-음… 그것도 아주 조금?
-응? 한눈 안 팔았지?
-응. 내 눈은 항상 너에게 향해 있어.
-뭐야? 너무 느끼행. 크크. 그래도 잘했으니 나중에 보면 칭찬해 줄게.
-오, 약속했다.
이서준이 나영에게 자신의 진심을 고백한 후, 진솔한 대화 끝에 두 사람은 정식으로 교제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연락을 주고받으며 예쁜 사랑을 키워 나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교제를 결정하자마자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사실에 두 사람은 괴로워했다.
이서준은 영화 때문에 미국에서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고, 쓰리타임즈 역시 이서준이 준 곡으로 새로운 컴백 앨범을 준비하는 중이었으니, 두 사람 모두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녹음에 들어갔는지 계속 오던 메시지가 끊겨 버렸다.
그래서 이서준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스마트폰에 저장되어 있던 나영의 사진을 보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밝은 미소로 웃고 있는 나영의 모습에 조금 전 느꼈던 피로감이 스르르 사라지는 것 같았다.
혼자 나영의 사진을 보며 웃고 있던 그때, 이서준의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티장에도 숨어 있는 파파라치가 제법 많으니 몰래 사귀고 있는 애인의 사진은 조금 더 조심스럽게 보는 게 좋을 거 같네만….”
순간 놀라 번쩍 들려지는 이서준의 얼굴.
그는 자신에게 말을 던진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곤 경악했다.
“헉! 당신은?”
의문의 남자는 놀라는 이서준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으며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는 이서준과 함께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파티장 안쪽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으며 구석으로 피한 두 사람은, 그제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날 보고 놀라는 걸 보니 굳이 내가 누군지 설명할 필요는 없을 거 같군. 안 그런가?”
의문의 사내가 건넨 농담 섞인 인사에 이서준은 격하게 동의하며 반가워했다.
“그거야 당연한 소리죠. 외계인이 아닌 이상 어떻게 당신을 모를 수가 있나요?”
“하하, 요즘 제일 잘 나간다고 알려진 자네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더 기분이 좋군. 이 정도면 아직 나도 괜찮은 거 맞지? 하하, 우리 정식으로 인사하세나. 나는 커크 다웃 주니어라고 하네. 서준 자네는 특별하게 날 커크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하도록 하지.”
놀랍게도 이서준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지금의 마벌 스튜디오의 역사를 만든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커크 다웃 주니어였다.
‘강철 인간’의 토머스 스탁턴 역으로 유명해진 그는, 영화 속에서 볼 수 있었던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이서준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정말 믿을 수가 없네요. 제가 당신을 실제로 만나다니….”
“나도 마찬가지일세. 내가 사랑했던 마이클 존슨의 무대에서 멋진 무대를 만들었던 자네를 직접 만나게 되다니…… 그러고 보니 우리 두 사람이 지금 같은 생각을 하고 있군. 보고 싶었던 자신의 스타를 만났다는 생각 말일세. 하하하.”
웃음소리 역시 영화 속에서 들었던 ‘강철 인간’의 웃음소리와 너무 똑같아서 그것 때문에 더욱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커크 다웃 주니어와 실제로 만난 이서준은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근데, 오늘 왜 보이지 않으셨어요? 커크가 온 걸 알면 코믹콘 축제에 참석한 사람들이 정말 좋아했을 거 같은데요.”
이서준의 말에 커크 다웃 주니어는 약간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오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 그래서 마벌에서 제안을 해 왔을 때에도 거절을 했었고….”
“그래요? 근데 지금 제 눈앞에 계시잖아요.”
“하하, 그건 그렇지. 마벌 스튜디오 스태프가 지금 이곳에 있는 나를 보면 배신감이 들지도 몰라. 그들의 거듭된 제의에 내가 계속 ‘노’라고 대답을 했었거든. 결국,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사람들도 잘 알고 있는 내 변덕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겠어.”
마벌 스튜디오에서는 커크 다웃 주니어를 초청하려 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불참 의사를 밝힌 후 왜 갑자기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을까?
그런 궁금증이 머릿속에 자리할 무렵, 본인 스스로 그것에 대해 밝혔다.
“집에 혼자 있는데 문득 외롭더군. 사실 요즘 자주 그래. 그래서 할 게 없어 SNS를 뒤져 보고 있었는데… 코믹콘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어. 모두 밝게 웃고 있더군. 그 모습을 보니 문득 예전의 추억이 날 괴롭히더군. ‘너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들과 함께 즐겁게 어울려 놀고 있었잖아.’라는 말이 머릿속에 들리면서 말이야. 그래서 그냥 충동적으로 비행기에 탔어.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전용기가 있어 이동은 수월하게 하는 편이거든.”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얻었지만, 물어볼 것은 여전히 존재했다.
“근데 왜 커크를 반길 사람들을 찾아가지 않으세요? 지금 여기에 계실 때가 아니잖아요.”
그는 이서준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에 와 보니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게 싫었어. 어차피 난 이제 은퇴한 몸이야. 돈도 제법 많이 벌었으니, 굳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필요도 없고. 그래서 혼자 숨어서 이 축제의 공기를 만끽하고 있다가 우연히 혼자 있는 자네를 본 거야. 자네와는 꼭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거든.”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니?
커크의 말이 쉽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런 이서준의 마음을 느꼈을까?
커크 다웃 주니어는 이서준을 향해 하고 싶던 말을 진솔하게 말하게 시작했다.
“자네가 연기하는 ‘엘른’을 봤네. 최근에 본 배역 중에 가장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더군. 그래서 조연인 게 너무 아쉬웠는데… 새로운 시리즈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바뀐 계획을 들었을 때, 정말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어. 앞으로는 자네와 같은 배우들이 새로운 마벌의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의외로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 말이었기에 이서준은 조금 쑥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커크 다웃 주니어에게 물었다.
“절 높게 평가해 주시는 것 같아서 고맙습니다. 근데 놀랍기도 하네요. 왜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기는 어렵거든요. 여기엔 탐 허버트나 알리샤 무크니도 와 있습니다. 새로운 마벌 스튜디오의 역사는 그런 사람들이 책임지는 게 맞지 않을까요?”
이서준의 물음에 커크는 특유의 미소를 지은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항상 역사는 의외의 곳에서 써지기 마련이지. 틀릴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자네가 연기한 ‘엘른’의 모습에서 무척 신선함을 느꼈네. 그래서 이런 확신이 들었어. 새로운 역사는 자네를 중심으로 만들어질 거 같다는 생각 말이야.”
커크 다웃 주니어라는 엄청난 배우가 자신에게 거는 기대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책임감 같은 것도 생겨 복잡한 심정이었다.
지금까지 마벌 세계를 지탱해 오던 영웅은 그런 이서준의 마음을 느꼈는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이서준을 다독였다.
“갑자기 나타난 구닥다리 배우가 자네에게 너무 스트레스를 준 것 같군. 내 이야기는 잊어도 좋네. 그러나 단 한 가지 말만 기억해 줄 수 있을까?”
이서준은 커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제가 기억할 말이 무엇인가요?”
“즐겁게 해. 우리는 많은 사람에게 꿈을 꾸게 해 주는 사람들이네. 그러니 즐겁게 해야지. 즐겁지 않으면 그건 악몽이거든. 하하하.”
자신의 뒤를 따르는 후배 영웅에게 자신의 좌우명까지 전달하며 첫 만남을 마무리하는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