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할리우드(1)
커크 다웃 주니어는 이서준을 만나 즐거웠는지 그대로 헤어지는 것 대신에 그를 데리고 자신이 예약한 호텔로 향했다.
축제 장소 근처에 있는 호텔의 최고급 객실을 급하게 예약한 그는, 그곳에서 이서준과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
이서준은 그에게 마벌 스튜디오의 영화 촬영에 관한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고, 커크 다웃 주니어는 그런 이서준의 질문에다가 자신이 지금까지 배우로 활동하면서 느꼈던 중요한 경험들도 이서준에게 들려주었다.
아직 배우로서의 경험이 부족한 이서준에게는 피와 살이 될 정도의 너무나 값진 이야기였다.
이서준은 새벽까지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커크 다웃 주니어는 이제 이곳에 갑자기 찾아온 용무를 다 끝낸 모양인지 아침에 바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스타가 이곳에 나타났는데, 계속 비밀이 유지될 리가 만무했다.
커크 다웃 주니어는 호텔 측에 자신이 왔음을 절대로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였지만, 누군지 알 수 없는 호텔 직원이 아는 기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게 되었다.
그게 시발점이 되어 곧 코믹콘 축제를 취재하러 온 대부분의 기자가 그의 방문을 알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 그가 묵은 호텔 로비에는 새벽부터 엄청난 수의 취재진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진풍경이 연출되고 말았다.
바라던 대로 조용히 다닐 수 없게 되었음을 알게 된 커크 다웃 주니어는, 결국 호텔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과 공식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마련된 기자 회견장.
그렇게 커크 다웃 주니어와 기자들 간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앞서 공개된 마벌 스튜디오의 공식 보도에 따르면 이번 행사에 참여 안 하신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행사장에 나타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기자의 질문에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이를 먹으니 생각이 자주 바뀝니다. 한마디로 변덕쟁이가 되어 버린 거죠. 제가 이곳에 온 이유도 다 제 변덕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변덕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죠. 왜냐하면, 제가 변덕쟁이가 아니었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니 저를 천하의 변덕쟁이라고 기사를 쓰는 아마추어 기자님이 여기엔 없으시겠죠? 일정상 참석하기 힘들었는데, 팬들이 행사장을 많이 찾아 준 것을 뉴스로 보고 감명받아 깜짝 방문한 거라고 써 주실 거라 믿고 있습니다. 하하하.”
하하하.
오랜 시간 기자들을 상대한 온 베테랑 배우답게 그는 아주 능숙하게 농담을 섞어 인터뷰에 임하고 있었다.
“어제 만난 사람이 이서준 씨가 맞나요?”
이서준과 만났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기자답게 두 사람이 만났는지에 관해 물었다.
커크 다웃 주니어는 이번에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그의 질문에 답했다.
“네, 맞습니다. 그 친구와는 기회가 닿으면 친해지고 싶었는데… 운 좋게도 어제 그 기회가 생겼습니다. 앞으론 그를 저의 베스트 프렌드라고 소개할 참입니다.”
커크 다웃 주니어의 재치 넘치는 대답을 들은 기자는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갔다.
“특별히 만나고 싶었다고 하신 거 같은데요… 그건 그와 만나야 할 이유가 있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제 해석이 맞는가요?”
“네, 뭐… 그렇게 해석하셔도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닌 거 같네요. 왜냐하면, 그가 나오는 영화를 보고 만나면 마벌 스튜디오 영화에 관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거든요.”
그의 답변을 듣는 순간, 기자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날카로운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사람이 이서준이란 이야기는… 지금부터 새롭게 펼쳐지는 마벌 스튜디오의 세계에서 ‘그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당신과 같은 1세대 마벌 스튜디오 배우들이 전면에서 물러난 지금, 앞으로 당신을 뒤이을 배우가 바로 그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별 무리가 없을까요?”
아직 앞으로 새로운 ‘응징자들’ 시리즈가 어떤 내용으로 펼쳐질지 아무도 모르는 시기인 지금에, 기자는 다소 무리한 해석을 담아 그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커크 다웃 주니어의 입장에선 그냥 넘어가 버리면 되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는, 엉망인 질문에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내 직업이 영화 각본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 질문에는 정확한 답변을 드릴 수가 없네요. 다만 이서준이 저의 후계자가 아니냐고 물으셨는데….”
기자들은 그의 입에서 아주 중요한 기삿거리가 나올 것을 직감하고 예의 집중하며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역시 저는 잘 모릅니다. 그 사실이 궁금하신 분은 저 대신 케븐 파이스에게 이 질문을 다시 한번 해 주시면 좋을 거 같네요.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씀드릴게요. 제가 이서준 씨를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그가 연기하는 ‘엘른’에서 제가 연기한 ‘강철 인간’의 모습이 엿보였다는 점입니다.”
커크 다웃 주니어의 입에서 ‘강철 인간’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은 조금 충격이었다.
영화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며 화려하게 마벌 스튜디오의 세계관에서 은퇴한 뒤로 거의 언급한 적이 없던 단어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영화 인생 중 가장 화려했던 십수 년의 세월의 종착점이었기에 그에겐 감회가 남다른 세월이었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힘들어서 의식적으로 ‘강철 인간’에 관한 언급을 자제해 왔다고 전해지고 있었는데, 그런 그의 입에서 ‘강철 인간’이라는 단어가 먼저 나왔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무척 큰일이었다.
커크 다웃 주니어는 그런 기자들의 반응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담담하게 자신의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저는 그를 만나 이야기해 주고 싶었습니다. 제가 아주 오랜 시간 살아왔던 ‘응징자들’의 세계가 어떤 세계였는지를요.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엘른’이 내가 살아왔던 상상의 세계를 훌륭하게 이어 줄 거란 믿음도 있었습니다. 어제 이야기를 나누어 본 느낌이라면… 그렇게 생각한 제 느낌이 그리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커크 다웃 주니어의 이 인터뷰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크게 화제가 되었다.
지금까지 마벌의 세계를 이끌어 왔던 그가, 공식적으로 이서준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한 것과 같은 뉘앙스가 담긴 내용의 인터뷰를 했기 때문이었다.
커크 다웃 주니어의 인터뷰가 화제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케븐 파이스 역시 공식 활동 중 기자들과 인터뷰 시간을 가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케븐 파이스와 만난 기자들은 커크 다웃 주니어가 한 인터뷰 내용에 대해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한 질문을 받은 케븐 파이스는 미소 띤 얼굴로 다음과 같은 말을 기자들에게 던졌다.
“하하, 변덕쟁이 중년 아저씨가 한 말에 대해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것 같군요. 하하하.”
유쾌하게 인터뷰를 주도하는 그의 모습에 기자들은 역시 프로라는 생각을 하며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근데 저도 한 가지는 말하고 싶네요. 제가 ‘상춘’의 조연에 불과했던 ‘엘른’을 새로운 시리즈에 전격적으로 합류하도록 노력한 이유를 말입니다.”
케븐 파이스도 예상과 다르게 아주 파격적인 인터뷰를 이어 갔다.
“저 역시 이서준이 연기하는 ‘엘른’을 보고 새로운 세계를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우리 마벌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역사의 중심이 될 겁니다. 그러니 많은 기대와 관심 부탁드린다는 말을 안 할 수가 없네요. 하하하.”
아주 가벼운 뉘앙스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케븐 파이스 역시 이서준이 연기하는 ‘엘른’을 마벌 스튜디오에서 그려지는 다음 세계의 중심이라고 공언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커크 다웃 주니어와 케븐 파이스의 인터뷰는 전 세계 영화 팬들에게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공신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의 입에서 앞으로 전개되는 마벌 영화의 중심에는 이서준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내 언론에서는 이런 사실을 대서특필해 주었고, 국내 언론에서는 이러한 놀라운 사실에 감격하여 연일 이서준에 관한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이서준의 ‘새로운 응징자들’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마벌 영화를 찍을 때 관련 스태프들이 가장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 무엇일까?
정답은 보안이었다.
미리 대본이나 콘티가 외부로 유출되어 촬영 중인 영화의 스토리가 유출되는 일이 촬영 때 가장 큰일인 셈이었다.
마벌 스튜디오에서는 스포일러를 막기 위해 가짜 대본까지 사용했다.
본격적인 촬영에 앞서 배우들에게 가짜와 진짜가 섞인 대본을 보내는 거였다.
그리고 촬영 당일 촬영장에 나타나면, 감독이 배우들에게 다가와 진짜 촬영 내용에 관해 설명하는 것은 마벌 스튜디오 내에서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서준의 입장에선 무척 놀라운 일이었다.
“와, 진짜 이렇게 하네….”
감독의 설명을 듣고 놀라워하는 이서준을 보며 함께 촬영 중인 탐 허버트는 아주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 서준. 뭘 이 정도로 놀라고 그래요? 앞으로 이런 일이 자주 있을 테니 빨리 적응하세요.”
그의 말을 들은 이서준은 조금 놀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많다고? 그럼 대부분의 촬영을 이런 식으로 하는 거야?”
그의 이번 물음에는 갑자기 등장한 감독 조시 루스가 대답했다.
“원래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누구 덕분에 더욱 강화가 된 것이지. 그 사람이 사고만 치지 않았어도 이 정도까지는 하지 않았을 거야.”
조시 루스가 언급한 사고를 친 장본인인 탐 허버트는 찔끔하는 표정으로 그에게 항의했다.
“아니 그 이야기는 언제까지 할 겁니까? 제가 실수했다고 인정했잖아요. 그리고 다음부터는 그런 실수 안 했고요.”
그의 말을 들은 조시 루스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놀렸다.
“어느 나라 속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말이 있더군. 고장 난 시계는 계속 고장 난 시계라고. 그러니 자네가 언제 또 실수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닐까?”
“에이, 이제 안 한다니까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이서준은 얼마 전에 보았던 기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미국의 한 토크쇼에 출연한 탐 허버트가 촬영 중인 영화 내용을 아무렇지 않게 방송에서 이야기해 버린 사건이었다.
감독 조시 루스는 이 사건을 가지고 탐 허버트를 놀리고 있었다.
촬영장의 분위기는 지금 보는 것과 같이 나쁘지 않았다.
이미 대성공을 이룬 스태프들이 다시 모여 촬영하는 것이다 보니 호흡과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감독 조시 루스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걱정만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서준에 관한 걱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