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할리우드(2)
‘과연 이서준이 내가 원하는 수준의 연기를 보여 줄 수 있을까?’
이서준과 처음 촬영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할 수 있는 걱정이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잠시 제쳐 두고 촬영에 집중했다.
“자, 잘 들어. 여기 스태프가 큰 판넬을 들고 계속 움직일 거야. 너도 알다시피 이 판넬이 바로 네가 상대하는 몬스터인 거지. 그러니 이 판넬을 몬스터라고 생각하면서 연기해야 하는 거, 너도 잘 알고 있지?”
“네, 그럼요.”
“좋아. 그럼 시선 처리 잘해야 해.”
“네, 염려하지 마세요.”
이서준은 조시 루스의 물음에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이서준의 씩씩한 대답은 조시 루스의 마음속에 감춰 두었던 불안감이란 녀석을 모두 없애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조시 루스 감독은 이서준의 빈약한 연기 경력을 믿을 수 없었던 탓이었다.
그의 조국인 대한민국에서는, 영화와 드라마 모두에서 정상에 오른 사람이 바로 이서준이란 사실을 그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굳은 신념과 같은 지론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배우의 연기가 제대로 물이 오르기 위해서는 많은 작품에 출연해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이서준이 소문대로 천재 연기자라 해도 기복 없이 좋은 연기를 보여 주기에는 아직 출연 작품 수가 너무 적었다.
즉 작품에 따라 초보 연기자가 의외로 아주 훌륭한 연기를 펼치는 경우도 간혹 있었지만, 마벌 영화는 그런 운이 따를 만한 쉬운 영화가 아니었다.
관객들이 보기에는 그냥 화려한 CG 장면이 많고 액션 신이 다수이다 보니, 연기력이 별로 중요한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으로 그런 영화이다 보니 더욱 연기력이 필요한 영화가 바로 마벌의 영화였다.
왜냐하면, 그런 제한된 상황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 같은 것을 제대로 표현해 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기하는 배우 입장에선 이런 류의 영화가 연기하기가 더 어려운 법이었다.
조시 루스는 이러한 부분 때문에 가급적 연기 경력이 많은 배우를 주연급으로 추천하곤 했는데, 그런 전례를 깨고 거의 초보와 다를 바 없는 경력의 배우와 함께하게 된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는 어느 정도 고생할 각오로 하고 촬영에 임하고 있었다.
‘초반에는 고생할 각오를 어느 정도 하고 있지만… 빨리 적응해 주길 바라는 수밖에.’
조시 루스 감독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 갑시다. 레뒤~ 액션”
드디어 시작된 촬영.
촬영하는 장면은 뉴욕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액션 신이었다.
한낮의 뉴욕에 외계 생명체가 등장하게 된다.
그걸 발견한 ‘거미 인간’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외계 생명체와 싸우게 되는데, 생각보다 막강한 힘을 가진 외계 생명체 때문에 ‘거미 인간’은 큰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때 등장한 정령술사 ‘엘른’.
새로운 응징자들을 만든다는 사람들의 초청에 미국에 오게 된 그는, 때마침 그곳에 있던 상황이라 외계 생명체를 처치하며 위기에 처했던 ‘거미 인간’을 구하게 되는 장면이었다.
‘…잘할 수 있을까?’
조시 루스는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연기를 시작하는 이서준을 쳐다봤다.
마벌 스튜디오 영화는 영화 내용상 CG 장면이 무척 많았다.
‘응징자들’ 1부 마지막 영화 같은 경우에는 총 4천 컷 중에 CG가 들어간 컷이 3천 컷이 넘었었다.
이번 영화 역시 그와 비슷한 수준이었기에, 이서준이 찍는 첫 장면 역시 CG가 대량으로 들어가는 컷이었다.
자신의 앞에서 움직이는 판넬을 보며 이서준은 멋지게 도약했다.
등에 투명 와이어를 달고 움직이고 있는데도, 감독의 염려와는 다르게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을 곧바로 선보이는 이서준이었다.
이윽고 괴물을 대신해 움직이는 판넬을 향해 이서준이 멋지게 손을 뻗으며 외쳤다.
“아이스 피어!”
판넬이 대신하고 있는 괴물체를 향해 자신을 따르는 정령들과 함께 공격하는 장면이었다.
영화상에서는 물의 정령의 힘을 이용한 얼음 송곳으로 괴물의 몸을 공격하는 장면이었지만, 실제 촬영장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외치는 셈이라, 어떻게 보면 혼자서 쇼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부끄러운 장면이었다.
이런 촬영은 베테랑 배우들도 매우 어려워하는 장면이었는데, 걱정과 다르게 이서준은 이 역시 아주 깔끔하게 한 번에 끝내 버렸다.
“…컷!”
생각보다 너무 깔끔한 연기에 놀란 나머지 컷을 외칠 타이밍을 놓치고 만 조시 루스.
그는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컷을 외쳤다.
다행히 조금 늦게 컷을 외친 거 말고는 아무런 문제 없이 진행된 완벽한 촬영이었다.
“와, 서준 씨. 아주 좋았어. 계속 이렇게만 해 줘. 하하하.”
“아, 네, 감독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독의 격찬에 이서준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실 조시 루스가 몰랐던 것이 있었으니, 이서준은 도깨비 상점에서 얻은 아이템으로 인해 그 어느 배우보다 액션 장면에 경험이 많은 배우와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최근에 행한 아이템 업그레이드 덕분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펼치는 CG 연기도 본인의 입장에선 아무것도 없이 펼쳐진 연기가 아니었다.
아무튼, 이서준은 첫 장면만 찍었을 뿐인데, 감독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리고 조시 루스 감독이 가지고 있던 불안감은 어느새 기대감으로 변했다.
‘와, 이서준의 연기가 이 정도인 것은 어떻게 알았지? 이 정도면 아주 순조롭게 촬영을 진행할 수 있겠어.’
그는 속으로 케븐 파이스의 선견지명에 무척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오늘 촬영이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될 거란 기대감에 기분 좋은 표정으로 촬영장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이서준 역시 혼자 속으로 많이 놀라고 있었다.
그도 오늘 최근 업그레이드된 ‘도깨비 안경’의 능력을 처음으로 사용해 본 탓에 속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진짜 눈으로 다 보면서 연기하니까 너무 편했어.’
지금 촬영장에 있는 그 누구도 볼 수 없었지만, 이서준의 눈에는 자신과 싸우는 외계 생명체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정령의 기운도 생생하게 느끼며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최근 아이템 업그레이드를 통해 ‘도깨비 안경’이 진화했기 때문이었다.
‘도깨비 안경’이 진화한 결과 기존에 없던 새로운 기능이 생겼는데, 그것은 바로 상상하는 것을 실제로 볼 수 있게 해 주는 기능이었다.
자신의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3D 그래픽 기술을 얻은 것과 다를 바 없는 능력이었는데, 원하는 장면을 실제로 눈으로 보면서 연기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래서 그런 아이템의 도움으로 전보다 더욱 훌륭한 연기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좋았어. 제대로 가 보자고.’
다음 장면 촬영에 앞서 혼자서 각오를 다지는 이서준이었다.
* * *
“오늘 이서준 씨가 ‘새로운 응징자들’에 함께 출연한 할리우드 배우들과 함께 귀국했습니다. 이서준 씨는 최근 영화 ‘새로운 응징자들’의 촬영을 끝내고, 유럽에 있는 팬들의 애타는 바람에 유럽 10개국 콘서트를 성황리에 열었는데요, 영화 개봉일에 맞춰 전격적으로 귀국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귀국에는 혼자가 아니라 특별히 함께 출연한 유명 배우들과 함께 귀국하게 되었는데요, 미리 알려진 바와 같이 ‘거미 인간’으로 열연을 펼친 탐 허버트도 이서준 씨와 함께 공항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뉴스 앵커의 말처럼 이서준은 할리우드에서의 영화 촬영이 끝나고 유럽 투어에 들어갔었다.
생각보다 넓고 두꺼운 팬층이 생기는 바람에 콘서트를 열어 달라는 현지 팬들의 바람을 JYK에서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유럽 투어는 초기 계획과 다르게 계속 이어지고 말았다.
원래는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독일 3개국에서만 콘서트를 열 계획이었는데, 다른 국가 팬들의 성화에 콘서트를 열 국가를 확대한 탓이었다.
그렇게 3달 정도의 긴 투어를 마칠 때가 되니, 어느새 영화 개봉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마벌 스튜디오에서는 이서준 때문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이번에도 한국에서 가장 먼저 개봉하겠다는 선언을 하였다.
그래서 주연 배우가 직접 홍보하는 행사도 한국에서 가장 먼저 잡게 되었다.
“와, 이거 뭐예요? 너무 맛있어. 생긴 건 완전 팬케이크 같이 생겼는데….”
이서준은 호들갑을 떨며 말하는 탐 허버트의 모습을 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 왜 여기까지 따라와서는….’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이서준이 이렇게 탐 허버트를 보고 한숨을 내쉬는 이유는 어렵게 만든 데이트 시간에 그가 눈치 없게 따라나섰기 때문이었다.
홍보 일정이 매우 촘촘하게 짜진 덕분에 유럽 투어를 끝내고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왔지만, 여자 친구 나영과 만날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전쟁 중에도 아기가 생긴다는 말처럼, 좋아하는 사람과 만날 시간을 만들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눈치껏 시간을 만들어 힘든 와중에도 둘만의 데이트를 하려고 했다.
늦은 시각 숙소에서 도망쳐 나오는 도중, 하필 만난 사람이 바로 이 눈치 없는 동생이었다.
탐 허버트는 이러한 이서준의 마음도 모르고 그에게 철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어느덧 약속 시각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어쩌다 달라붙은 껌딱지가 도저히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한술 더 떠, 어디서 들었는지 한국식 팬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조르는 탐 허버트 때문에 이서준은 골목길 안쪽에 있는 허름한 파전집을 급하게 섭외해야 했다.
이런 생각지 못한 변수의 등장으로 진심으로 보고 싶던 나영은 얼떨떨한 모습으로 이곳으로 오게 되면서 지금 이 자리가 탄생했다.
나영과 오붓하게 데이트할 당초의 계획을 깡그리 망쳐 버린 탐 허버트는, 그런 이서준의 마음도 모르고 신나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이거 쌀로 만든 와인이지? 나 이 술 너무 먹어 보고 싶었어. 나한테 한국 음식을 소개해 준 사람이 한국식 팬케이크와 한국식 쌀 와인은 최고의 콤비라고 말해 주었거든.”
“그래? 그럼 많이 먹어.”
“하하, 좋아. 그럼 내가 다 먹는다.”
“…그래.”
신난 탐 허버트와 다르게 이서준은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였고, 그런 두 사람 사이에 낀 나영은 복잡한 마음이 담긴 시선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뒤, 이서준이 화장실로 가자 두 사람만 테이블에 남게 되었다.
가게를 통째로 빌린 상황이었기에 파전집 안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
나영은 영어에 자신이 없는 상황이라 당황해하며 자신 앞에 놓인 막걸리만 홀짝거리며 마시고 있었다.
그런 나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탐 허버트.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영에게 물었다.
“두 사람 사귀죠?”
방금 정도의 영어는 나영도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화들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