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세계의 중심에 서다(1)
탐 허버트는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나영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반응이 너무 웃겼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당신 너무 귀엽네요. 서준이 왜 당신을 좋아하는지 알겠어요. 하하하.”
탐 허버트는 그렇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계속 웃었고, 당황한 나영은 그런 그를 보며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때마침 화장실을 다녀온 이서준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 물었다.
“나영이 너 표정이 왜 그래? 그리고 얘는 뭐가 그리 재미있다고 이렇게 크게 웃고 있는 거야?”
탐 허버트는 돌아온 이서준을 보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서준과 이 여성분 사이가 심상치 않아 보여서 내가 너 없을 때 살짝 떠봤거든. 근데 우리 숙녀분께서 어찌나 순진한지 내 말에 놀라 표정을 숨기지 못하시더라고.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웃음이 터졌지 뭐야. 서준, 네가 이분을 왜 좋아하는지 바로 알 수 있는 순간이었어. 하하하.”
그제야 자신이 잠시 화장실 간 사이, 눈치 빠른 탐 허버트가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남들에게 두 사람 사이를 들키면, 골치 아픈 일들이 많이 생기기에 조금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면,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최근 많이 가까워진 탐 허버트가 알게 되는 건 그리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도 같았다.
‘뭐, 아무 상관 없어. 어차피 탐이랑은 너무 친해져서 나영을 제대로 소개해 줘도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야.’
그렇게 마음먹은 이서준은 걱정하는 모습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 나영에게 탐 허버트가 방금 한 말에 대해 알려 주었다.
나영은 이서준의 말을 듣고 매우 미안해하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오빠. 내가 표정을 감추지 못했나 봐요.”
이서준은 그런 그녀를 다독였다.
“아니야. 괜찮아. 지금 탐은 솔로니까 다정한 우리 보고 배 아플 거야. 이번에 제대로 놀려 먹고 괴롭히자.”
나영은 이서준의 편한 농담 덕분에 조금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다시 서너 잔의 술잔이 오가는 사이 이서준은 탐 허버트에게 정식으로 소개해 줬다.
그는 그녀의 정체가 이서준의 여자 친구란 사실을 확인하고는 미국에서 자신이 본 이서준의 일상생활을 나영에게 설명해 주었다.
“나영 씨, 서준 형은 미국에서 너무 재미없게 살았어요. 영화 촬영이 없는 날은 어디 나가지도 않고 집에만 있더라고요. 거의 숙소에서 나오지 않아 내가 형을 만나려면 매번 형 숙소로 직접 찾아가서 봐야 했다니까요. 뭐, 그 덕분에 한국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 좋았던 점도 있었지만요.”
제3자에게 듣는 이서준의 모습은 나영에게 무척 흥미로웠다.
“그 정도로 집 밖으로 안 나갔어요?”
“네, 정말 그랬다니깐요. 그래서 한때는 오해도 했어요. 예쁜 여자가 만나자고 신호를 줘도 아무런 반응을 안 하더라고요. 그리고 파티 같은 데는 전혀 참여할 생각도 안 하고요. 혹시라도 파티장에 등장했으면, 참석한 미녀들에게 완전히 둘러싸여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 텐데도 말이에요.”
나영은 남자 친구의 미국 생활을 듣고 흐뭇했다.
자신과 떨어져 지내는 순간 다른 이성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기에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속으로 크게 안심했다.
항상 여자들에게 크게 인기 있는 이서준 때문에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방금 탐 허버트가 어떤 오해를 했었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근데, 탐이 조금 전 오해를 하셨다고 했는데… 무슨 오해를 했어요?”
탐 허버트는 나영의 물음에 솔직하게 답변했다.
“솔직히 여자보다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었어요. 미국에는 그런 경우 대부분 여자보다 남자를 좋아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근데 오늘 확실히 아니란 걸 알게 되었네요. 이렇게 예쁜 여자 친구가 있었으니 그동안 다른 여자에게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는 걸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한 셈이잖아요.”
나영은 그가 한 말을 이서준을 통해 듣고는 볼이 붉어졌다.
과한 칭찬에 부끄러웠던 것이다.
오랜만에 갖는 막걸리 파전 파티가 마무리될 무렵 나영은 문득 궁금해졌는지 탐 허버트에게 물었다.
“근데 이번 영화는 어때요? 서준 오빠는 첫 출연에 가깝지만, 탐은 여러 번 출연했으니 어느 정도 감이 올 게 분명하잖아요.”
탐은 나영의 물음에 ‘씨익’하고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그녀에게 보였다.
“정말 최고예요. 내가 지금까지 찍은 마벌 영화 중 이번이 최고 영화라고 자신할 수 있어요.”
나영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자신 있어 하는 그의 모습에 약간 놀랐다.
개봉 전에는 어느 배우든 진심으로 걱정하기 마련인데, 그의 얼굴에서는 어떠한 불안감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 * *
이서준 때문에 대한민국 전체가 다시 흥분하고 있었다.
한국인 배우가, 그것도 다른 영화도 아니고 최근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응징자들’ 시리즈에 출연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알려진 바에 따르면 조연도 아니고 주연급으로 출연 분량이 많다고 전해졌기에 그 기대감은 정식 개봉에 앞서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이 이서준으로 인해 시끄러워질 무렵, 이웃 나라의 시선은 대한민국과 너무 달랐다.
가까운 일본 같은 경우에는 마벌 스튜디오의 ‘새로운 응징자들’ 개봉에 주목하면서도 특이하게 이서준이 주연으로 출연한다는 소식은 의도적으로 빼거나 축소해서 보도했다.
그리고 한 연예 정보 프로그램에서는 고정 패널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하였다.
“글쎄요… 마벌 영화에 한국 배우가 출연하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저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이 특히 마벌의 영화를 좋아하니 흥행을 위해서 억지로 한국 배우를 출연시킨 것에 불과하거든요. 만일 우리 일본에서의 성적이 더 좋았다면, 과연 그가 그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을까요?”
이서준의 출연 의미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는 말이었다.
이처럼 일본은 일부러 축소 외면하거나 고의적으로 의미를 퇴색시키는 식의 방법으로 보도했다.
일본의 이런 뉴스를 접한 한국 팬들은, 그들의 이해하기 힘든 뉴스 보도 행태에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반응은 일본보다 더욱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서준이 마벌 스튜디오의 새로운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한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상춘에 조연으로 출연한 이서준이 갑자기 주연으로… 과연 이것이 가능한 상황인가?’
‘상춘을 통해 돈을 번 할리우드, 혹시 일부러 엉망으로?’
‘미국과 한국이 손잡아 중국 소재 영화에 흠집을….’
이런 식의 음모론까지 내세우며 이서준의 활약에 불만을 표시했던 것이다.
정식 개봉 날이 되자 이런 일본과 중국의 반응 덕분에 더욱 화제가 된 보도진들이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이토록 관심을 받는 새 영화가 진짜 어떤 모습일지가 너무 궁금했던 것이다.
사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지금, 영화가 재밌고 잘 만들어졌으면 이 모든 억지와 같은 뉴스들은 단숨에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관심이 실제 영화가 어떨까에 모여 있었기에 취재 열기가 더욱 타오르게 되었다.
이서준을 비롯한 주연 배우들은 첫 상영을 앞두고 다 함께 서울에 있는 대형 영화관에 모이게 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관객들과 함께 처음으로 관객들에게 소개되는 순간을 함께할 계획이었다.
사실 본인들도 촬영만 했지 실제 편집까지 끝낸 상영본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떨리는 마음으로 영화관 좌석에 앉아 있었다.
드디어 시작된 영화.
영화는 마벌 스튜디오의 영화답게 시작부터 화려한 액션으로 인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기존의 영웅은 물론이고 은퇴한 영웅들의 뒤를 잇는 새로운 영웅들까지 쉴 새 없이 등장하면서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특히 그들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이서준이 연기한 엘른이었다.
당초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보다 엘른은 훨씬 더 영화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출연 분량은 모든 배역 중 가장 많은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중심에 엘른이 있다는 사실을 모든 관객에게 확실히 못을 박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의 스토리 전개였다.
결국, 엘른과 거미 인간의 멋진 활약으로 새로운 외계 종족의 침입을 물리치며 영화가 끝이 났다.
그리고 극장에 있던 모든 관객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 극장 안에서 함께 영화를 봤던 주연 배우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행동이었다.
“와아, 대박이네. 어떻게 저렇게 재밌지?”
“맞아, 동감이야. 다음 이야기는 언제 나오는지 혹시 공식 오피셜 뜬 거 있어? 나 다음 이야기 벌써 기대하고 있어. 얼른 시간이 지나가 그때가 되었으면 좋겠다.”
관객들의 반응은 정말 최고였다.
* * *
케븐 파이스는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중요 임원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최근 이렇게 마음 편하게 회의에 참석했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였다.
그런 그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바로 아이작 서머터였다.
한때 그는 요즘 최고의 주가를 자랑하는 마벌 스튜디오의 수장이었다.
그러나 케븐 파이스 등의 신진 세력이 성장하면서 자신은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밀려 은퇴를 목전에 두고 말았다.
본인의 의지 없이 남의 손에 이끌려 회사 내 권력을 잃고 싶지 않았던 그는, 오랜 시간 회사에서 보낸 노하우를 총동원하여 다시 마벌 스튜디오를 자신의 밑으로 데려오려 노력하였다.
그런 노력의 어느덧 10년이 넘어가고, 앞선 주역들의 은퇴 덕분에 새로운 기회가 생기나 하고 기대를 했었다.
그러나 최근 들려오는 마벌 스튜디오 소식들은 그런 마음을 가진 그의 의지를 무너뜨릴 정도였다.
“지금 전 세계에서 다시 광풍이 불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마벌의 바람이 말입니다.”
기분 좋은 미소를 띤 얼굴로 설명하는 케븐 파이스의 뒤쪽 스크린에서는 얼마 전에 개봉한 ‘새로운 응징자들’의 성적을 정리해서 보여 주고 있었다.
“한국은 물론 일본, 그리고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는 물론이고요, 유럽에서도 난리가 났습니다. 이 모든 국가 영화 순위에서 개봉 첫 주부터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질주하고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미국 내의 반응 역시 최고라는 것입니다. 이대로 인기가 계속 이어진다면, 역대 마벌 영화 중 최고 수익을 올린 영화는 이번에 개봉한 ‘새로운 응징자들’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케븐 파이스의 호언장담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다.
역대 영화 3위에 오른 ‘응징자들 마지막 이야기’보다도 개봉 2주 동안의 성적이 훨씬 좋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