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건물 꼬라지 하곤. 꼭 지같이 생겨먹었네.”
해가 다 저문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서도 저 혼자 농롱하게 빛나는 하얀 건물은 마치 누군가를 연상케 했다.
남자는 눈앞에 보이는 갤러리 외관을 올려다보며 아니꼬운 소감을 뱉었다.
얼마 태우지 않은 담뱃대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불똥이 날아간 꽁초를 그대로 건물을 향해 던진 뒤 기대 있던 차 보닛에서 엉덩이를 일으켰다.
유리로 된 자동문은 소리도 내지 않고 부드럽게 열렸다.
저녁 9시. 모두가 떠난 갤러리는 평소보다 더 정숙하다. 전시 공간은 이중 삼중으로 보안이 잠겨 있어 들어갈 수 없었지만 애초부터 그쪽에는 볼일이 없었다.
남자는 휘파람을 불며 춤추듯이 걸어갔다. 검지에 반지처럼 끼워진 차 키 고리가 발걸음에 맞춰 짤랑짤랑 흔들렸다.
경비를 돌던 보안업체 직원이 수상한 방문객을 발견하고 다가오려다 멈춰 섰다. 남자를 알아보곤 모자를 벗으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남자는 적당히 손을 흔들어 인사를 받아 준 뒤 길게 이어진 통로를 지나 계단을 밟았다. 경박한 구둣발은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는 3층의 대표실로 향했다.
똑똑.
성의 없는 노크가 이어졌다.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멋대로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남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꽤나 인상적인 느낌의 사무실이었다.
짙은 남청색으로 코팅된 에폭시 바닥은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닷물 같았다. 그 위로는 결벽에 가까운 새하얀 벽이 끝없이 이어졌다.
천장은 투명한 강화유리로 마감돼 있어 새까만 밤하늘이 고스란히 내비친다. 누군가의 취향이 듬뿍 담겨 있는 업무 공간은 이 또한 갤러리에서 전시하는 작품 같았다.
늦은 시간까지 남아 홀로 일을 보고 있었던 젊은 갤러리 주인은 남자를 보곤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면서 주름진 미간을 엄지로 꾹꾹 짚은 우선경은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불쾌한 표정을 지우고 하던 일에 다시 몰두한다. 그는 투명 인간이라도 대하듯이, 제 앞에 있는 존재를 못 본 척 무시했다.
“한 이사 러트라며. 너 여기 있어도 괜찮은 거야?”
허락도 없이 쳐들어온 불청객은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이죽거렸다.
걱정을 담은 말과 다르게,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촌 동생을 쳐다보는 눈빛은 뱀처럼 희번덕거렸다.
지금 구도경은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구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돌아올 날 선 반응을 기대하며 메마른 입술에 침을 적셨다.
“…….”
하지만 기대와 달리 우선경은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선 아무 값어치도 없는 저급한 도발을 상대하는 것보다 당장 내일모레 있을 전시회의 도록을 살펴보는 게 더 중요했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코팅된 페이지를 넘겼다. 종이 재질이며 잉크의 점도까지 신중하게 확인한다.
두께는 적당한지, 축소한 작품의 색감은 제대로 나왔는지, 적혀 있는 정보에 혹시 오탈자는 없는지까지도.
모든 사진과 글은 이미 그의 컨펌을 받은 뒤 실린 것이었지만 한 장, 한 장을 꼼꼼히 살폈다. 그러면서 의도가 뻔한 말엔 적당히 대꾸했다.
“형이 우리 부부 사생활에 관심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남의 발정 주기까지 꿰고 있는 건 좀 그렇네. 보통은 그걸 스토커 짓이라고 해.”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다 네 생각 해서 해 주는 말인데. 우리 잘난 우 대표가 고작 스무 살 된 오메가한테 남편 빼앗겼다는 소문이 돌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페이지를 넘기던 선경의 손이 불현듯 멈췄다.
두껍고 반질거리는 종이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그대로 눈만 치켜떴다.
길고 큰 눈매 속에 담긴 눈동자가 야멸차게 구도경을 노려봤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지금.”
“선경아. 여기서 팔자 좋게 책이나 볼 때가 아냐. 네 알파는 지금 러트가 왔고 민증에 잉크도 안 마른 파릇파릇한 애새끼랑 만나고 있다는데. 하아… 형은 정말 가슴이 아프다. 우리 선경이가 이런 취급 받을 애가 아닌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어.”
구도경은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톤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하다는 듯 왼쪽 가슴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눈썹을 축 늘어뜨린 면상은 남들이 보면 꽤나 걱정하는 것처럼 보일 법했다.
하지만 이내 가증스러운 연기는 집어치우고 면전 가득 웃음을 띠었다. 본론을 꺼낼 타이밍이다.
“한지석 체크인한 객실에 방금 오메가 남자애가 들어갔다네? 호텔 프론트에서 언급해 준 거라 확실해.”
“그걸 나한테 얘기하는 이유가 뭐야.”
“뭐겠어. 하나뿐인 사촌 동생 걱정되니까 그러는 거지.”
사촌 같은 소리 하네. 진심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간사한 말에 선경은 코웃음을 쳤다.
구도경은 본래 멀고 먼 친척으로, 남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으나 알파로 발현한 뒤 고모에게 양자로 입양된 케이스였다.
피는 거의 섞이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했는데, 신기하게도 욕심 많은 성격은 고모를 쏙 빼닮았다.
제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호시탐탐 선경의 몫을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새끼의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이번에도 본인을 자극할 목적으로 이야기를 꺼낸 게 분명했다.
“…….”
하지만 이게 구도경의 뻔한 개수작임을 알면서도, 우선경은 좀처럼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표정 관리에는 도가 터서 크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던 페이지는 이미 꾸깃꾸깃한 주름이 잡힌 지 오래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두꺼운 커버를 덮었다. 손에 쥔 도록을 테이블 위에 던지듯이 내려놓자 그걸 본 구도경이 양 손바닥을 짝짝 부딪치며 경박스럽게 웃었다.
“얼른 가 봐야지. 둘이 붙어먹기 전에 막아야 될 거 아냐. 시간 별로 없어.”
“…….”
저따위 말에 일일이 반응하고 싶진 않지만 몸이 쉽게 따라 주질 않는다. 결국 못 참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우선경은 곧바로 책상 쪽으로 걸어가 차 키부터 집어 들었다. 책상 위에 무질서하게 늘어놓았던 서류들을 정리할 겨를도 없이 급하게 나갈 준비를 했다.
평소보다 다급해 보이는 행동에 구도경 역시 잽싸게 일어나 그 곁으로 다가갔다. 코트를 집어 드는 선경을 가로막으며 은근한 호의를 내보였다.
“호텔까지 데려다줄까?”
“비켜.”
“이 상태로 운전했다가 사고 나면 어떡해. 우리 귀하신 도련님.”
구도경의 느긋한 시선이 우선경의 얼굴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으며 내려왔다.
태어날 때부터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나온 재벌가 도련님은 확실히 태가 다르다. 똑같이 좋은 것을 입고 먹고, 관리를 받아도 유독 우선경만 귀티가 흘렀다.
부럽게 씨발. 심지어 우성 오메가 아닌가.
도경을 노려보는 쌀쌀맞은 낯짝조차 공들여 빚어 놓은 예술품 같았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를 넘겨 주기 위해 손을 뻗자, 이를 알아챈 선경이 고개를 뒤로 빼버린다.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것마냥 다가오는 손을 매섭게 쳐냈다.
“건드리지 마.”
“까탈스럽긴.”
“할 일 끝냈으면 가. 어차피 목적은 나 들쑤시는 거 아니었어?”
“뭐 그렇긴 하지.”
구도경은 개의치 않은 듯 내쳐진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뾰족하게 날 세우는 것도 모자라 거부감을 보이는 태도에는 이미 익숙하다. 바쁘신 분 먼저 지나가라는 듯 여유롭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다.
선경은 얇은 코트를 움켜쥐고 그 앞을 지나갔다.
거칠고 신경질이 묻은 발걸음에 에폭시 바닥이 삐끗삐끗 예민한 잡음을 냈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찰나, 잠시 발길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이대로 퇴장하는 건 억울했다. 뻔질뻔질하게 차려입은 구도경을 보며 “아,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그 나이 먹고 페로몬 관리가 그렇게 안 돼?”
“뭐?”
“조절이 어려우면 병원을 좀 가 보든가. 대체 내 앞에서 뭐 하자는 거야.”
“…….”
“아무리 피가 안 섞였다 해도 명색이 가족인데 조심 좀 하지? 형 냄새 맡는 거 역겨워.”
일부러 구도경의 치부를 긁었다. 아니나 다를까 승리자처럼 희희낙락하게 웃던 얼굴이 단숨에 구겨졌다.
그는 제 모친인 고모와 함께 재벌가라는 배경을 어깨에 두르고 떵떵거리는 인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오명이 늘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멀쩡히 자식도 있는 집에 15살짜리 다 큰 남자아이가 입양됐으니 말이 돌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양자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구도경이 가진 알파라는 형질 덕분이었는데, 그는 이 점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어딜 가든지 페로몬을 있는 힘껏 드러내며 본인이 알파라는 것을 과시하는 버릇이 있었다.
본래 가족끼리는 서로의 페로몬을 인지할 수 없었지만,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구도경은 예외였다. 그래서인지 이런 실수를 지적받을 때마다 치욕스러워했다.
페로몬이라는 게 아무리 단단히 통제한다고 해도 조금씩은 흘러나올 수 있다. 입고 있는 옷이나 머무르던 곳에 흔적처럼 남겨지는 경우도 흔했다.
하지만 뭐 어쩌란 말인가. 실제로 역겨운 건 사실인데. 우선경은 목부터 얼굴까지 온통 벌겋게 달아오른 구도경을 뒤에 버려두고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