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2화 (2/127)

#2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오며 삐- 소리 후에는 통화료가….’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동안 쉬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

내내 울리는 벨 소리가 귀찮아서라도 전화를 받든가 아니면 착신 거절이라도 하든가 할 텐데 기계적인 통화 연결음은 매번 끝까지 이어졌다.

전화를 받지 못하는 상황인 걸까. 아니면 일부러 모른 척하는 것일까.

직접 보기 전까진 알 길이 없다. 전화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선경의 발걸음은 다급해졌다.

분명 한지석은 러트 기간이었고, 그는 앞으로 4일 동안 호텔에서 지낼 것이라고 했다.

부부 사이니 응당 우선경 역시 휴가를 내고 그와 함께 발정기를 보내는 게 맞지만, 최근 들어 관계가 더욱 악화된 탓에 두 사람은 현재 남보다 못한 사이나 다름없었다. 한지석이 러트에 접어들었다는 것도 그의 비서를 통해 전달받았다.

알파와 오메가. 누군가는 신의 축복이라고도 부르는 특이형질자.

보통 알파는 강인한 신체와 명석한 두뇌, 맹수와도 같은 기민한 판단력을 가졌고, 오메가는 아름다운 외형과 예술적 감수성을 지녔다고 알려진 경우가 많았다.

두 형질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기질 덕분에 일반인인 베타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곤 한다. 하지만 이들은 선물처럼 타고난 능력과 더불어 ‘발정기’라는 시기도 감당해야 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3개월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발정기는 알파의 경우 러트, 오메가의 경우는 히트 사이클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발정기가 시작되면 내재해 있던 성욕이 강하게 피어오른다.

이성보다 본능이 더 우선시되며, 성호르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종족 번식에 대한 욕구가 넘쳐흘렀다. 오직 짝을 찾아 관계 맺는 것에만 사고가 집중된다.

이것이 짐승과 다를 것이 무언가!

특이 형질을 혐오하는 일부의 사람들은 이러한 발정기가 사람으로서 진화가 덜 된 증거라며 매도하곤 했다. 제어하기 힘든 성욕과 폭력성으로 인해 종종 발생하는 사건, 사고들도 문제 삼았다.

발정기를 보내는 방법은 명확했다.

몸에 축적된 페로몬을 마음껏 방출하며 며칠간 정신없이 성관계를 갖는 것. 아니면 독한 억제제와 수면제를 먹고 죽은 듯이 잠드는 것.

한지석이라면 틀림없이 후자의 방법을 선택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구도경이 가볍게 던지고 간 폭탄은 선경의 머릿속에서 산산조각으로 분해되고 터져나갔다.

끝까지 연결되지 않는 휴대전화를 조수석 시트 위로 내던졌다. 눈을 감으면 한지석과 스무 살의 오메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이 자꾸만 연상됐다.

사슴처럼 순하고 유약한 인상을 가진 오메가는 가진 것 하나 없는 아이였지만, 한지석을 향한 마음만큼은 분명했다. 쉽게 꺾이지 않을 만큼 크고 단단했다.

우선경은 자신도 모르게 여린 살을 씹어 물었다. 앞니에 짓눌린 아랫입술이 하얗게 질려갔다.

운전대를 붙잡은 손등 위에 잠시 이마를 얹었다. 손등에 닿는 체온이 제법 뜨끈하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속을 잠재우기 위해 그는 두 눈을 감고 후우, 길게 숨을 뱉었다.

그래, 흥분해서 좋을 건 없어. 구도경의 말처럼 이 상태로 운전했다간 괜한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던 선경은 감았던 눈을 뜨고 다시 허리를 곧게 세웠다. 안전벨트를 끌어당기고 시동을 걸었다.

곧이어 기어를 풀고 액셀을 밟자 주차 라인에 들어서 있던 진회색의 세단이 매끄럽게 바퀴를 굴리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

발렛을 맡기고 호텔 로비로 들어설 때였다.

불안한 표정으로 내내 입구만 주시하고 있던 총지배인이 우선경을 발견하자마자 허겁지겁 달려왔다. 마치 그가 올 것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프론트를 거치지 않고 곧장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우선경을 놓칠세라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그리고 구차한 변명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우 대표님. 제가 구 상무님께 쓸데없는 말을….”

“잘 아시네요. 이 정도로 입이 가벼우실 줄 몰랐습니다. 투숙객의 사적인 정보를 남에게 발설하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인지 본인이 더 잘 아실 텐데요. 뭐, 뒷감당하실 수 있으니 일을 벌이신 거겠죠.”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걸 좀 알아주셨으면….”

잘 걷고 있던 선경이 별안간 멈춰 섰다. 진땀을 흘리며 쫓아오던 지배인도 덩달아 바닥에 내다 꽂힌 듯 발걸음을 세웠다.

우선경은 몸을 반쯤 돌리더니 지배인에게 대뜸 오른손을 내밀었다. 아주 당연하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예?”

정작 지배인은 의도를 단번에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황망하게 선경의 얼굴과 쭉 뻗은 손바닥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다.

멍청하게 넋을 놓고 있다가 “카드.” 하고 꽂히는 날카로운 한마디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양복 안주머니를 뒤졌다.

허겁지겁 꺼낸 것은 관리자용 호텔 마스터키였다.

마침 로비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뻐끔 문을 열고 있었다. 그 안으로 몸을 실은 선경이 지배인에게 건네받은 카드키를 엘리베이터 하단에 태그했다. 객실 층 숫자 버튼에 은은한 빛이 들어오며 선택을 기다렸다.

하얗게 뻗은 손가락이 22층 버튼을 눌렀다. 활짝 열려 있던 문은 선경을 집어삼키듯이 닫혔다. 그를 태운 승강기가 묵직하고 부드럽게 올라갔다.

호텔의 최상층은 평소와 같았다. 몇 번이나 와 본 곳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익숙한 광경이다.

갈림길이 시작되는 복도에서 우선경은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갔다.

아무렇지 않은 척 걸었지만 푹신푹신한 카펫을 내디딜 때마다 무릎이 후들거렸고, 꽉 쥔 주먹에선 미끈거리게 땀이 찼다.

이윽고 2201호 앞에 도착했다. 선경은 그 앞에 서서 잠시 호흡을 골랐다.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하다. 숨 쉬는 게 거북했고 울렁거림은 좀처럼 해소되질 않았다. 결국 벽을 붙잡고 소리 없이 헛구역질을 했다.

생각해 보니 온종일 먹은 것이 거의 없었다. 선경은 억지로 신물을 삼켰다. 빨개진 눈가엔 생리적인 눈물이 축축이 맺혔다.

겨우 허리를 편 선경은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말아 쥐고 문을 내리쳤다.

탕탕! 주먹으로 때리는 소리는 감히 무시하지 못할 만큼 우렁찼다. 하필이면 객실도 4개뿐인 층이라 대찬 울림소리가 빈 복도를 가득 메웠다.

쾅! 쾅쾅!

멀쩡한 초인종을 놔두고 애꿎은 문을 부서져라 두드렸다.

굳은살 하나 없는 여린 주먹은 터져나갈 듯이 붉어졌다. 밤중에 벌어진 소란에 다른 객실 문이 열리며 투숙객들이 내다볼 정도였다.

몇몇은 문밖에 서 있는 우선경을 알아봤는지 저마다 귓속말을 소곤거렸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 상황에 숨죽여 몰래 훔쳐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정작 2201호의 문은 가장 마지막에 열렸다.

머리통 하나 들어가지 못할 만큼 좁은 틈이 벌어지더니 그 사이로 한지석의 딱딱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선경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 상황이 피곤하다는 듯 인상을 썼다.

한지석은 우선경을 들여보내 줄 생각이 없는지 문고리를 단단히 붙잡은 채 앞을 가로막았다.

흐트러진 셔츠와 달아오른 뺨, 노랗게 변한 지석의 동공이 차례대로 눈에 들어왔다. 쌕쌕 입으로 내쉬는 호흡마저 가쁘다. 숨길 수 없는 러트의 증상에 기가 찼다.

헛웃음 짓던 선경은 앞을 막고 버티는 지석의 가슴팍을 세게 밀쳤다.

“비켜.”

“너 여기 오면 안 돼.”

“비키라고, 당신한텐 볼일 없어.”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간 우선경은 가장 먼저 보이는 거실을 훑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객실 안은 창문이 몇 개 열려 있다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특이점이 없어 보인다.

모든 물건과 가구들이 제자리에서 각을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허물처럼 벗어놓은 한지석의 재킷과 넥타이만 소파 위에 나뒹굴고 있었다.

문이 닫혀 있는 방이 여러 개 있었지만 무시했다. 대신 공기 중을 떠도는 낯설고 희미한 단 냄새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한지석이 급하게 앞을 막아서려 했지만 선경의 행동이 더 빨랐다. 미닫이로 된 욕실 문을 열어젖히자 아니나 다를까, 그 안에 숨어 있던 오메가가 그를 보고 퍼뜩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그 모습을 보니 실소가 터졌다. 아니 조금 화가 났다.

“내가 여러 번 경고했던 것 같은데. 너는 사람 말이 말 같지 않나 봐.”

“…….”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말라고 했지.”

“죄송… 죄송해요. 그게 저는….”

숨길 줄도 모르는 미성숙한 오메가 페로몬이 한 평 남짓한 욕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오면서 상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눈이 돌아간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생각이 날아가고 머리가 하얗게 표백되는 것 같았다.

손이 먼저 나갔다. 앵무새처럼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김현진의 멱살을 붙잡고 거칠게 끌어냈다.

낡아서 색이 바랜 하얀 티셔츠가 억센 손아귀에 볼품없이 당겨졌다.

키는 선경과 비슷한 정도였지만 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마른 탓에 현진은 힘없이 끌려 나왔다. 그래도 성인 남자라 어느 정도 버틸 힘이 있을 법도 하지만, 놀란 탓인지 죄스러운 탓인지 별반 저항을 하진 않았다.

“주제를 몰라도 정도가 있지, 니가 뭔데 여길 와!”

“…….”

“러트 온 알파랑 뒹굴고 애라도 갖고 싶었어? 그렇게 한지석이랑 자고 싶어서 몸이 달았냐고!”

묵묵히 폭언을 들으며 끌려 나오던 현진이 문턱에 걸려 바닥으로 엎어졌다. 허겁지겁 땅을 짚으며 몸을 추스르는데 우선경은 이를 봐주지 않았다. 푸석한 검은 머리채를 휘어잡고 일으키자 현진이 비명을 지르며 그 손목에 매달렸다.

일방적인 몸싸움이었다.

김현진이 입고 있던 구질구질한 티셔츠는 보기 싫게 늘어났고, 드러난 목덜미엔 빨갛게 생채기가 졌다.

단정하게 정리된 손톱은 날카로운 구석이 한 군데도 없었지만 격분한 상태로 휘둘러대니 현진의 몸 곳곳에 상처를 만들어냈다.

“우선경!”

결국 한지석이 들어와 엉망으로 뒤엉킨 두 사람을 뜯어냈다. 흥분한 선경의 팔을 붙잡고 벌어진 틈새에 제 몸을 끼워 넣었다.

“이사님….”

울먹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덜덜거리는 손이 지석의 허리춤을 붙잡았다. 한지석은 보호하듯 김현진을 제 등 뒤로 감췄다. 그 광경이 선경의 눈에 느린 화면처럼 담겼다.

“진정해, 무슨 오해 하는지 아는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뭐가 아닌데. 형은… 지금 이 상황이.”

어째서 자신이 불청객이 된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걸까.

하도 어이가 없다 보니 말문이 막혔다. 열이 치받아 눈앞이 다 아찔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