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서 나가.”
그사이 지석은 제 허리를 붙든 손을 풀어내고 김현진을 욕실 밖으로 내몰았다.
“빼돌릴 생각 하지 마. 저 새끼 내가 상간죄로 집어넣을 거야!”
“그만 좀 해! 현진이랑 그런 사이 아니라고 대체 몇 번을 얘기해!”
선경이 따라 나가려 하자 그를 팔을 붙잡고 막는다. 한때 그토록 좋아했었던 나지막한 목소리는 격양된 상태로 선경에게 화를 뱉었다. 아니라고. 네가 잘못 안 거라고 도리어 윽박질렀다.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선경은 자신의 팔을 옥죄고 있는 손을 털어냈다. 앞으로 한 발짝 걸음을 옮기자 지석과의 거리가 부쩍 좁혀진다.
고개를 치켜들면 상대의 얼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그곳에 서서 눈에 보이는 한지석의 상태를 하나하나 언급하기 시작했다.
“한지석. 지금 네 꼴을 봐. 러트 막 시작돼서 눈깔은 노랗게 변하고 페로몬은 이렇게 진해. 거기다가 쟤가 너한테 발정 난 페로몬을 잔뜩 처발라 놨어. 네가 그걸 몰라? 너희가 아무 사이가 아니야? 오늘 아무 일도 안 일어났을 거라고?”
“망상 좀 적당히 해. 지겹지도 않아?”
“또 그 소리지. 나만 정신병자 만들면 모든 게 없었던 일이 되나 봐. 참 쉽다, 그치?”
“…….”
“미친 건 너야, 한지석. 정신 차려. 쟤 오메가야. 모른 척한다고 사실이 바뀌진 않아.”
지석이 빈손을 움켜쥐었다. 답답한 마음을 풀 길이 없어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며 대신 화를 삭였다.
지석의 가슴이 들썩거렸다. 숨소리가 거칠고 체취는 한층 더 진해졌다. 러트가 임박한 얼굴은 온통 열에 들떠 있으면서 선경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무기질을 보는 것처럼 차갑기만 하다. 왜 자꾸 그런 소리를 하냐는 듯 원망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선경은 도리어 묻고 싶었다.
정말로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 자신이 이토록 진저리를 치는데 김현진과의 관계를 끊어버릴 수 있는 것 아닌가.
한지석은 늘 자립하는 데 도움을 주려는 것뿐이다, 보육원 시절부터 오랫동안 후원했던 아이다, 라며 김현진을 감쌌다.
둘의 인연은 꽤나 오래되었다고 들었다.
비록 현진이 오메가로 발현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봐온 사이라 성적인 감정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동생과 다름없다 하지만 그건 한지석의 생각일 뿐이고. 과연 상대도 그럴까?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하는 후원자와 수혜자는 자꾸 선을 넘으려고 했다. 그게 선경의 눈엔 또렷이 보였다.
서로를 노려보며 기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멀리 떨어져서 이들을 지켜보던 김현진이 대뜸 입을 열었다.
“제가 이사님 좋아해요.”
“현진아, 너 그만 입 다물어.”
“오늘 좋아한다고 고백했어요. 러트인 거 알고 일부러 찾아온 것도 맞아요. 그러면 안 돼요? 두 분 결혼만 하셨을 뿐이지 사실 남과 다를 거 없잖아요.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러트 보내고 싶은 게… 그렇게 잘못된 거예요?”
충동적으로 내뱉은 고해성사가 선경의 등 뒤로 와르르 쏟아졌다.
“좋아하는 사람과, 러트를 보낸다고.”
선경은 들었던 말을 똑같이 따라 말했다. 어린 오메가가 있는 방향으로 살짝 몸을 비틀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한지석도 널 좋아한대?”
“좋아하게 될 거예요, 제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언제 벌벌 떨었냐는 듯 꽤나 당찬 대답이 돌아왔다.
사슴처럼 연약하고 말라비틀어져 보이던 오메가는 이제 우선경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제 의사를 밝혔다.
그래.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약한 척 가식을 떨어대는 것보다 차라리 이렇게 나오는 게 낫다.
선경은 깊게 숨을 고르며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제대로 상대해 주기 위해 아예 그 앞으로 몸을 돌렸다.
“아니, 넌 절대 못 가져. 나랑 결혼했어. 내 거라고.”
“한 이사님은 물건이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마세요.”
“상관없어. 내가 버리기 전엔 넌 손도 못 대.”
“당신이랑 있는 게 괴롭다고 했어요. 저라면 절대 그렇게…!”
현진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선경의 손이 하얀 뺨을 매섭게 내리쳤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때린 손바닥이 우릿하게 아파올 정도였다.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지껄여 봐.”
“…이러니까 싫어하시는 거예요! 이미 끝났다는 거 당신만 모르고 있잖아!”
바닥으로 주저앉은 현진은 오히려 아득바득 쏘아붙였다.
짝, 짝! 고개를 바로 들 새도 없이 연달아 손찌검이 이어졌다.
살면서 누군가를 이토록 때려 본 적이 없었다.
폭력을 쓰는 건 짐승이 하는 짓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도덕과 신념 같은 거 눈이 돌아간 상태에선 다 허세에 불과했다.
“그만해.”
“이거 놔!”
“우 대표님! 진정하세요!”
어디선가 지석의 수행비서까지 나타나 함께 선경을 뜯어말렸다. 애초부터 호텔 방 안엔 세 사람이 같이 있었던 것 같았지만 그런 것은 이미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 비서가 얻어맞는 김현진을 수습해 대피시킬 동안 한지석은 선경을 붙잡았다. 그의 만류에 더욱 신경이 곤두섰다.
이 순간만큼은 자신을 말리는 한지석이 끔찍하게 싫었다.
두 팔을 얽매는 손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자 억센 손길이 그를 더욱 강하게 붙들었다.
“우선경!”
“이거 놔! 비켜!”
“제발 그만하라고!”
퍼억!
고성과 몸싸움이 오가던 거친 힘겨루기는 선경의 얼굴이 돌아가는 순간 멈췄다. 주먹에 얻어맞은 선경이 휘청거리며 뒷걸음쳤다.
때린 지석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붙잡아 당기려던 게 방향이 잘못돼 얼굴에 맞아버렸다. 하필이면 러트가 와서 힘 조절도 잘 되지 않는 상태였다.
피부가 약한 우선경은 살짝 긁히기만 해도 티가 났다. 알파에게 얻어맞은 뺨이 멀쩡할 리 없었다.
새하얗던 뺨은 퉁퉁 부어올랐고 터진 입술은 붉고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분명히 아플 텐데도 맞았다는 충격 때문인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지석은 선경의 입술 안쪽에서 피가 나는 걸 보고 놀라 다가가려다 문득 멈춰 섰다.
뻗어나가는 손을 내리고 단단히 주먹을 쥐었다. 이젠 더 이상 관여하지 않을 거다. 어금니를 악물었다.
“지긋지긋하다. 너랑 이러는 거 벌써 몇 년째야.”
“…….”
“선경아, 우리 헤어질까?”
“뭐…?”
믿기 힘든 말에 우선경은 퍼뜩, 정신을 챙겼다.
여러 번 싸웠어도, 아무리 감정의 골이 깊어지더라도 한지석은 단 한 번도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현실이 그를 갑갑하게 짓누르고, 선경과의 관계마저 삐그덕거릴지라도 삶의 버거움을 참아가며 그는 끝까지 곁에 남아 있지 않았던가. 놀란 선경은 잘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더듬더듬 말했다.
“왜… 그런 얘길 해.”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되는 건데. 이제 그만할 때도 됐잖아. 나는 그만하고 싶어.”
괴로워하는 목소리에 선경의 가슴이 요란하게 뛰었다. 정말 이대로 끝이 날까 봐 두렵고 무서웠다.
“내가 잘못했다고 사과하면 돼?”
“…….”
“형이 나한테 이러는 게… 내가 또 말 안 하고 아이 지운 것 때문에 그런 거면 그거….”
“아, 선경아. 제발!”
지석이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제 앞에서 호소하는 목소리가, 넌더리를 내는 몸짓이 선경을 자꾸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정말로 헤어, 지자고?”
“…….”
“형, 이제 나 안 사랑해?”
“우리 사이에 그런 거 없어진 지 오래됐잖아.”
아니. 난 아니야.
대답 대신 강하게 고개를 젓자 지석은 지친 듯 한숨 쉬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눈으로 말했다.
“…선경아, 넌 괜찮아?”
“…….”
“난 너랑 함께 있으면 숨 막혀. 그냥 모든 게 답답해. 가슴이 꽉 막혀서 숨을 못 쉬겠어.”
장신의 남자는 눈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간절하게 소원을 청하듯 가느다란 손목을 붙잡고 그 위에 제 이마를 얹었다.
“제발 나 좀 살려주라.”
“…….”
“숨 좀 쉬게 해주라. 이제 그만 나 좀 놔줘.”
맞닿은 지석의 양손은 버석하게 말라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되게 따뜻했었던 것 같은데.
늘 냉기가 돌았던 자신과 달리 지석의 손은 크고 온기가 가득했었다.
그 손을 뒤늦게 꽉 잡아 봤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게 꼭 한지석의 속마음 같았다.
“나는 아직 형 사랑해.”
선경은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중얼거렸다.
“그만하자.”
“사랑해, 사랑한다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 순간 복도 밖으로 내몰려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작게 열린 문틈 사이로 한지석의 얼굴이 보였다.
잠깐의 눈 맞춤을 끝으로 2201호의 객실 문은 단호하게 닫혀버렸다. 선경은 그 앞에서 맥없이 주저앉았다.
한참을 그 앞에 앉아 있었다. 이런 식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어 봤자 본인만 더 비참해 보일 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다리가 움직이질 않는다.
버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상실감도 깊어졌다. 우선경은 굳게 닫힌 객실 문을 바라보다 체념한 듯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도련님, 이제 그만 가시죠.”
보다 못한 배 집사가 옆으로 다가왔다.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남성은 쭈그려 앉은 자세가 영 어색한지 아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아주 조심스럽게 선경의 얼굴을 살폈다.
한밤중에 연락을 받고선 곧장 호텔로 달려온 참이었다. 사실은 아까 전부터 도착해 있었지만 차마 우선경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복도를 서성이며 힐끗거리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자, 결국 몸소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두었다간 좋지 못한 소문이 퍼질 게 분명했다.
“일단 자리라도 옮기시는 게 어떠실까요. 여기는 보는 눈이 많습니다.”
“…아저씨. 나 이제 어떻게 해야 돼요?”
선경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물었다. 다행히 울지는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가 어찌나 눅눅히 젖어 있는지 듣고 있는 사람마저 울적하게 만들 정도였다.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망연히 선경을 지켜보는데, 하얀 목울대가 꿀렁거리며 넘어가는 게 보였다.
차마 흘리지 못하는 눈물을 속으로 애처롭게 삼키고 있었다.
“형이, 한지석이 나랑 끝내고 싶대요.”
“도련님. 여기서 이러시지 말고 일단은….”
“나 때문에 숨이 막힌대요. 제발 살려 달라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잡아요.”
“…….”
25년간 집사 일을 맡아오면서 우선경을 오랫동안 보아온 그였다.
누구보다 선경을 잘 알았고, 잘 다룰 줄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무너져 내린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배 집사 역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일단 일어나시죠. 조용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적어도 이 복도 한복판은 벗어나야 했다.
배 집사는 우선경의 어깨를 추슬러 안았다. 자신의 상체로 최대한 보호하듯 선경의 얼굴을 가리며 바닥에서 일으켰다. 다행히 선경은 순순히 따라와 주었다. 비틀거리면서도 팔에 의지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