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4화 (4/127)

#4

배 집사가 다시 돌아온 건 고작 삼십 분 정도가 흐른 뒤였다.

술을 마시고 싶다는 우선경의 요청에 같은 호텔 1층에 있는 라운지로 데려갔다. 특별히 부탁해 사람들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자리를 얻었다.

그곳에서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갖도록 해 주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제법 괜찮았다.

가끔씩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곤 했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감정을 추스르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됐어요. 그만 가죠.’

‘여기 잠시만 계세요. 차 가지고 나오겠습니다.’

주차된 차를 가지고 호텔 입구까지 끌고 나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층에 도착한 배 집사는 우선경에게 여러 번 전화를 걸었다.

연결이 안 되자 결국 직접 데리러 왔는데 그가 발견한 것은 입도 대지 않은 위스키 잔과 테이블 위에 덜렁 남겨져 진동하고 있는 선경의 핸드폰뿐이었다.

빈자리를 보는 순간 배 집사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라운지를 관리하는 매니저를 찾아가 다급하게 물었다.

“우 대표님 언제 나가셨습니까!”

“네? 어… 자리 비우신 지는 좀 되신 것 같은데, 혹시 화장실 가신 것 아닐까요?”

“확인 좀 해 주세요! 그리고 여기 CCTV 좀 봅시다!”

배 집사의 닦달에 호텔 직원들이 내부 곳곳을 뒤지며 사라진 이를 찾았다. 라운지 안은 물론이고 바깥에 있는 로비의 화장실과 휴게실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우선경을 찾을 순 없었다.

결국 경찰까지 불러 CCTV 속 동선을 추적해야 했다.

그 순간, 모두가 찾고 있는 이는 차가운 길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호텔을 빠져나온 우선경은 차도 없이 그저 맨몸으로 무작정 걸었다.

날씨는 귓바퀴가 얼어붙을 정도로 제법 쌀쌀했다. 그새 비가 내렸던 모양인지 공기와 땅에선 축축한 습기와 젖은 흙냄새가 올라왔다.

새벽 2시가 넘어가는 시간이라 거리를 오가는 사람은 드물었다.

간혹 지나가는 행인들은 대부분 술을 마시고 귀가하는 이들이었고, 취한 듯 비틀거리는 모습은 우선경과 다를 게 없었다.

아무 목적도 없이 그냥 걸었다. 빨간 불이 들어온 횡단보도도 무작정 건넜고, 방향감각을 상실한 사람처럼 이 골목 저 골목을 가리지 않고 헤매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넓은 강이 나오더라. 늘 차를 타고 지나갔던 대교 위를 직접 걸어 보는 건 처음이었다.

길게 이어진 다리 난간엔 뭐가 그리도 많이 쓰여 있는지….

아마도 극단적인 선택을 결심한 이들을 붙잡기 위해 적어놓은 문구들인 것 같았다. 오늘 하루 어땠어, 라는 표어를 눈으로 읽으며 선경은 정말 끔찍했어. 라고 중얼거렸다.

답답한 한숨을 내쉬자 새하얀 입김이 길게 쏟아졌다. 지금 상황이 아무리 감당하기 벅차다고 한들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는 아니다.

우선경은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포기할 수 없는 것들도 많았다. 딱 오늘까지만 멋대로 어긋난 뒤 내일부터는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자 마음먹었다.

꽤 길었던 다리를 건너자 동네가 바뀌었는지 주변의 분위기도 달라져 있었다. 불빛이 형형하던 번화가 대신 인적 드문 주택가가 나타났다.

너무 멀리 왔네, 슬슬 돌아갈까. 배 집사를 부르기 위해 핸드폰을 찾는데 주머니가 허전했다.

그제야 자신이 휴대전화를 라운지에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다행히 지갑은 있으니 택시라도 잡아타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정류장을 찾았다.

이미 막차가 끊긴 시간이라 버스 도착 정보를 알려 주는 안내판은 컴컴하게 불이 나가 있었다. 어둡고 조용한 벤치에 앉아 택시가 오길 기다렸다.

간간이 도로를 지나가는 차들이 보일 때마다 손을 뻗어 보았지만 대부분 손님을 태운 채로 선경을 지나쳐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얇은 코트만 입은 몸은 추위에 꽁꽁 얼어갔다. 어느새 지나가는 차들마저 줄어 도로가 한적해졌다.

“새벽부터 나와 있었는데 내 일거리를 채간 거라, 저 썅노무 새끼가!”

“그 일이 왜 자네 거여! 뭐 맡아놓기라도 했어?”

한눈에 봐도 술을 들이부은 취객들이 고성을 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근처의 일용직 근로자들인 모양이다.

적막한 길거리에서 오랜만에 듣는 사람 소리였지만 전혀 반갑지가 않았다. 선경은 티 나지 않게 취객들을 경계하며 몸을 웅크렸다.

“어? 젊은 친구네? 그쪽도 한잔했나 보지?”

취객 중 한 명이 우선경을 힐끗 쳐다보더니 말을 걸었다.

“혹시 담배 가진 거 있수?”

“안 피워요.”

“그러면 한 갑만 사 줄 수 있나?”

“…….”

“거 돈도 많아 보이는데 이 불쌍한 아저씨들 위해서 담배 한 갑만 사 달라고, 쏘주도 같이 사주면 더 좋고.”

“김 씨 저거, 또 염병 떨고 있네.”

협박에 가까운 말에 같이 있던 누군가가 면박을 주었지만 취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작 담뱃값 정도인데 어떻냐며 되레 큰소리를 쳤다.

“귓구녕이 막혔어? 너도 씨발, 내가 좆같아 보이냐? 돈 없다고 사람을 막 무시해?!”

“이거 받고 가던 길 가세요.”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남자에게선 담배 쩐내와 지독한 술 냄새가 풍겼다. 엮이는 것보다 몇 푼 쥐여 주고 보내는 게 더 나을 듯해 선경은 지갑 안에서 오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건넸다.

“…….”

뜻밖의 고액권을 받은 남자는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행색이 번드르르한 게 돈 깨나 있어 보이는 놈이구나 싶었는데, 이렇게나 쉽게 뜯어낼 줄은 몰랐다.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이 우선경이 쥐고 있던 지갑으로 향했다. 두툼해 보이는 갈색 반지갑 속이 어찌나 궁금한지 모른다.

일행들에게 돌아가더니 뭐라 수군거렸다. 우선경이 있는 쪽을 힐끗힐끗 돌아보는 게 어쩐지 좋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자리에 계속 머무를 수가 없었다.

우선경은 조용히 벤치에서 일어났다. 볼일이 있는 것처럼 코트 깃을 여미며 정류장을 벗어났다. 여전히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택시가 야속하기만 했다.

요즘 세상에 공중전화는 사라진 지 오래다.

주위를 둘러보던 선경의 눈에 불 켜진 24시간 편의점이 들어왔다.

그래, 저기 들어가서 직원에게 핸드폰을 빌리자. 딱딱하게 굳어 있던 선경의 얼굴이 조금 편안하게 풀렸다.

깡!

그때 어디선가 병 깨지는 소리가 났다.

조용한 밤거리에 그 소리가 어찌나 크게 들리는지 모른다.

연달아 들려오는 웃음소리 때문일까, 누가 일부러 깨트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불안한 마음에 뒤를 돌아보지 않고 냅다 걸었다.

발걸음은 점점 빨라져 갔다. 어두운 길거리에서 유일하게 빛이 나는 편의점을 바라보며 거의 뛰다시피 걸어가는데 누군가 뒤에서 선경의 목깃을 낚아챘다.

저항할 새도 없이 좁은 골목 사이로 끌려들어 갔다.

“흐으… 읍!”

“오메가가 밤거리를 혼자 돌아다니고 그래요. 겁도 없이.”

입을 틀어막은 가죽장갑에선 쇠 냄새가 났다. 억센 힘이 입과 코를 동시에 짓눌렀다. 선경은 발작하듯 몸을 뒤틀었다.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장갑을 긁으며 몸부림치자 상대는 코를 막은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대신 입술을 압박하는 힘은 더 세졌다. 아래턱이 부서질 듯 죄어왔다.

“쉬, 가만히 있어요. 우선경 씨.”

뒤에 바짝 붙어 선 남자가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낯선 목소리에 섬찟함이 등골을 훑고 지나간다. 정체 모를 남자는 웃으며 선경의 굳은 뺨을 칼등으로 톡톡 내리쳤다.

“대충 감 오죠? 소리 질렀다간 그 예쁜 얼굴 다 찢어놓을 거니까 눈치 챙겨요. 우리 얌전히 갑시다.”

***

주변은 온통 분진과 흙먼지로 가득했다. 곳곳엔 시멘트 포대와 철근들이 쌓여 있었고, 인부들이 쓰다 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낡은 목장갑과 끈 떨어진 안전모도 심심치 않게 굴러다녔다. 마감이 덜 된 외벽은 구멍이 사방으로 뚫려 있어 시린 바람이 오갔다.

공사가 중단된 아파트 신축 현장은 우선경을 처리할 장소로 특별히 골라 둔 곳이었다.

원래는 자살로 보이도록 작업할 계획이었지만 중간에 일이 꼬였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바닥에 늘어져 있는 우선경의 옷가지를 뒤졌다.

단추가 떨어져 나가도록 일부러 셔츠를 잡아 뜯었고, 신발도 한쪽 벗겨 구석으로 집어던졌다.

코트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열어 봤다. 내용물에는 그닥 관심 없는지 반응은 심드렁했다.

“소지품은? 다 털어?”

“적당히 비싼 것만 골라. 카드랑 수표는 버리고 현금만 빼가. 아, 시계도 가져가고.”

“반지는? 이거 결혼반지 같아 보이는데.”

“반지도 빼고…. 하 시발! 그러니까 왜 보이는 곳을 때려서! 쉽게 갈 수 있었는데 네 등신 같은 짓 때문에 번거롭게 됐잖아!”

“거 미안하다고 몇 번 말해, 지금 평소보다 말 잘 듣는 거 안 보이냐.”

곱게 자란 도련님의 반항은 생각보다 격렬했다.

우선경은 얼굴 옆으로 겨누어진 칼날을 보고도 드세게 발버둥 쳤고,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입을 막고 있는 손에서 조금이라도 힘을 뺏다간 온 동네가 소란을 알게 될 것 같았다. 급한 마음에 때려서 기절을 시켰는데, 하필이면 얼굴 쪽에 또렷이 상처가 남아버렸다. 누가 봐도 폭행의 흔적이었다.

덕분에 자살로 위장하는 것은 어렵게 됐다.

청부업자들은 조금 번거롭지만 목을 졸라 교살하는 방식으로 노선을 틀었다.

적당히 금품을 갈취하고, 반항한 흔적까지 더하면 강도를 당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모자 쓴 남자가 구시렁거리며 선경의 왼쪽 팔을 잡았다. 축축 늘어지는 손목에서 갈색의 얇은 시곗줄을 끌러냈다.

겸사겸사 약지에 끼인 반지도 잡았다. 살살 돌려가며 반쯤 뽑아내고 있는데 미동 없던 손마디가 움찔대더니 주먹을 움켜쥔다.

선경이 찢어진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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