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5화 (5/127)

#5

“아 저런, 깼어? 그냥 계속 기절해 있지. 어차피 험한 꼴 당할 텐데.”

“…….”

“너무 억울해하진 마요. 사람 인생이 다 그런 거지 뭐. 대신 아프지 않게 죽여 줄게요. 내가 그건 약속할게.”

“아플지 안 아플지 네가 어떻게 아냐?”

“아이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형은 꼭 그렇게 초를 쳐야겠어?”

곧 죽일 사람을 앞에 두고 나누는 대화는 저녁 메뉴를 정하는 것처럼 가벼웠다. 그것을 고스란히 듣고 있던 선경은 맥없이 눈을 감았다.

마른침을 긁어모아 힘겹게 삼켰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야 했다.

“살려… 주시면 안 돼요?”

“응?”

“돈은… 받으신 것보다 더 드릴게요. 신고도 안 할게요. 그냥… 보내만 주세요.”

애원하는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자 쓴 남자는 대답 대신 키킥,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모자와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두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그는 이렇게 벌벌 떠는데도 울지 않는 건 제법 맘에 든다며, 선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선경 씨 뭔가 착각하나 본데, 이 바닥도 나름 신뢰라는 게 있거든? 의뢰받은 게 먼저지 돈 더 준다고 홀랑 배 뒤집어 까지 않는다고. 우리들도 나름 상도가 있어.”

“…….”

희망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끝을 예감한 얼굴엔 절망이 가득 찼다.

“그만하고 얼른 시작해. 이러다 날 새겠다.”

“예에.”

바깥을 감시하던 동료의 닦달에 모자 쓴 남자는 스트레칭하며 굳은 어깨를 풀었다. 팔을 크게 돌리며 읏차, 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몸을 일으켜 선경의 배 위를 깔고 앉았다.

빠져나가려고 들썩거리는 몸을 허벅지로 단단히 누르고 힘주기 편한 자세를 잡았다.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선경의 목울대 위를 교차하듯 감쌌다. 손바닥에 감긴 목은 고작 한 줌이다. 하얗고 가늘어서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부러질 것만 같았다.

살짝 힘을 줘 눌렀다. 숨이 막히는지 선경이 남자의 손등을 긁었다. 작은 얼굴엔 벌겋게 피가 몰렸다.

“재수 없었다고 생각해요, 너무 억울하면 유언이라도 남기시든가. 뭐 할 말 있어요?”

입이 벙긋거린다. 뭐라 말하는데 그 소리가 너무 작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숨소리보다도 작은 속삭임에 집중했다.

“응? 뭐라고?… 임신? 잠깐만, 형 임신했다는데?”

“뭔 소리야,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 아이 씨발, 그랬으면 돈을 더 받았지! 두 명 분인데!”

“장난해? 난 못 해. 이거 형이 해. 나 임산부랑 애는 안 죽이는 거 알잖아.”

“지랄하지 말고 얼른 끝내, 진짜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시간 없다고!”

“그러니까 형이 하라고!”

금방이라도 목을 조를 것 같던 남자는 자신은 못 하겠다며 손을 털고 일어섰다. 형이라고 부르는 남자와 아웅다웅하며 사실 확인을 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한순간에 자유를 얻은 선경은 허겁지겁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났다. 어느새 목엔 시퍼런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바닥을 짚은 채로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너저분한 공사장은 빛 하나 들어오지 않아 온통 컴컴했다. 어설프게 짓다 만 형태라 어디가 출구인지, 어떤 형태인지 분간조차 안 됐다.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하악… 하, 흐으!”

너무 긴장돼서 무릎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발에 밟히는 느슨한 합판 바닥은 뛸 때마다 쿵쿵 소리가 나 자신이 어디로 도망가는지 알려 주는 것만 같았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볼트 나사와 녹슨 못들이 맨발에 밟혀도 아픈 줄 모르고 정신없이 뛰었다.

그렇게 앞만 보고 내달리던 발걸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속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선경은 헐떡이는 숨을 삼키며 주저앉았다.

암담했다. 온통 미로처럼 꼬여 있어 도저히 내려가는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우선경이 도망가는 것을 보고서도 청부업자들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뒤를 따르면서 여전히 형이 해라, 네가 해라 싸워대는 여유를 부렸다.

어차피 출구는 하나뿐이었다. 우선경이 도망간 길은 결국 막다른 곳과 이어진다. 물론 외벽은 뚫려 있으니 막혔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6층에서 뛰어내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느긋하게 뒤따라간 벽 끄트머리에서 망연자실하게 굳어 있는 우선경을 만날 수 있었다. 휑하게 뚫린 콘크리트 벽을 붙잡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사방에서 칼바람이 불었다. 모자 쓴 남자는 추운 날씨가 싫은지 어깨를 옹송그리며 손짓했다.

“으으, 귀때기 시려! 우선경 씨, 이리 와. 형이 해 주기로 했어.”

“…….”

“빨리 오라니까? 말 안 들으면 험한 꼴 당한다? 우리 형 성격 개더러워.”

협박에도 말을 듣지 않자 결국 청부업자들이 다가왔다. 뒷걸음질 쳐 봤지만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곳은 없었다.

우선경은 종아리에 겨우 닿는 난간에 바짝 붙어 서서 다시 한번 까마득한 지상을 내려다봤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제 정말 끝이다.

마음을 정하자 떨리던 다리에 거짓말처럼 힘이 들어간다. 우선경은 고개를 바로 돌렸다. 거센 바람에 새까만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누가 시켰어?”

“응?”

“나 죽이라고 시킨 게 누구냐고.”

아까와는 다르게 단호해진 태도가 의외였는지 청부업자들은 서로 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형이라고 불리던 남자가 앞으로 성큼 걸어 나오더니 그 앞에 바짝 다가섰다.

“미쳤다고 그걸 알려 줘?”

“소원 하나 정도는 들어줄 수 있잖아. 이대로 죽으면 너무 억울해서 눈도 못 감을 것 같거든.”

남자의 서늘한 눈빛에선 못마땅한 기색이 보였다.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면서 당사자에게 의뢰인을 알려 주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 어떤 경우도 예외를 둔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임신을 했다는 우선경이 조금은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 속의 애까지 한 번에 저승 문턱을 밟는 마당에 그 정도는 알려 줘도 되지 않을까?

남자는 고개를 들어 우선경을 마주 봤다. 빌어먹을 오메가는 아까부터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

그래, 어쩌면 저 천사처럼 고귀하게 생긴 얼굴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없던 죄책감마저 생길 지경이다.

“…라고 알지?”

결국 청부업자가 입을 열었다. 하, 이름을 들은 선경은 기가 막힌지 잠시 말을 잃었다가 이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 사람이었구나.”

하얗게 질린 얼굴엔 허탈함과 초연함이 뒤섞였다. 선경은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안쪽의 터진 입술에서 핏물이 질금 나왔다. 한지석 때문에 생겼던 상처가 도로 찢어진 듯했다.

아릿한 통증과 함께 한지석이, 제 알파가 이 순간 너무 보고 싶어졌다.

뒤로 발을 디뎠다. 한 뼘 크기 정도 되는 난간을 밟고 그 위로 올라섰다.

돌발 행동을 감지한 청부업자가 팔을 낚아채려는 순간, 우선경은 한발 앞서 외벽 너머로 뛰어내렸다.

“이런 씨바알!”

“형! 어떻게 해!”

당황한 청부업자들이 난간을 짚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어두운 데다 높이가 있어 제대로 보이진 않았다. 아래로 몸을 던진 우선경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내려가서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이 꼬일 대로 꼬이려는지, 멀리서 경광등 불빛이 번져오는 게 보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경찰이 생각보다 빨리 위치를 찾았다.

최소 1km. 금방 도착할 만한 거리였다.

결국 본인들 안위가 우선이었던 청부업자들은 우선경의 생사 확인을 포기하고 현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바닥으로 추락한 선경은 숨을 헐떡거렸다. 누운 자세 그대로 하늘을 바라봤다. 비가 다시 내리고 있었다. 마치 정신을 차리라는 듯이 얼굴 위로 차가운 물기가 후드득 떨어졌다.

온몸이 으스러진 것만 같았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도 끔찍한 고통들이 쓰나미처럼 연달아 덮쳐왔다.

목 뒤에서부터 땅이 축축이 젖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어느새 손이 놓여 있는 자리까지 뜨끈한 핏물이 번져갔다. 지독하게 춥고 아팠다.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하지만 어디선가 희미하게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선경의 귀에도 들려왔다.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사이렌 소리는 점차 분명해지고 있었고, 여러 대의 차바퀴 소리도 섞여 있었다.

마음이 놓이면서 힘이 풀렸다. 고개가 기력 없이 옆으로 꺾였다.

오른손은 이미 움직이지 않았다. 내 몸 같지 않은 왼팔을 겨우 들어 올렸다. 납작한 뱃가죽을 더듬는 손가락이 덜덜 떨린다.

미안해, 내가… 또 끝까지 품어 주지 못해서.

아이를 지웠다고 생각하는 한지석은 나중에 소식을 듣고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형, 그래도 난 최선을 다했어.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하필이면 마지막으로 봤던 한지석의 차가운 얼굴이 떠올랐다.

고여 있던 눈물이 뺨 아래로 후드득 떨어진다. 다시 눈을 뜬 선경은 몸을 경련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되는데. 너무 지치고 힘들었다.

죽음이 가까워지면 지난 삶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했던가. 거짓말처럼 몽롱해진 눈앞에 기억 조각들이 떠올랐다.

그곳에는 한지석과 처음 만났던 순간들도 있었다.

서로가 없으면 안 될 것처럼 미쳐 있던 시절도 분명 있었다.

우리는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하필이면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이 너무 아쉬웠다.

뺨에 그려진 축축한 궤적을 타고 눈물이 떨어졌다. 느리게 깜빡이던 눈꺼풀이 어느 순간 반쯤 뜨인 채 움직임을 멈췄다. 눅눅하게 젖어 있던 선경의 동공도 하늘과 같은 먹색으로 빛을 잃었다.

그리고 얼마 뒤, 구급차와 경찰차가 연이어 도착하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피로 젖은 바닥이 온통 진창이다.

빗줄기는 한층 거세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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