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6년 전.
3월 중순에 전국적으로 한파가 찾아왔다. 느닷없이 영하권으로 뚝 떨어진 날씨에 사람들은 정리해 두었던 패딩을 부랴부랴 다시 꺼내 입었고, 준비 없이 나온 이들은 몸을 바싹 움츠린 채 추위를 견뎠다.
이제 막 피어날 준비를 하던 개나리와 철쭉은 도톰하게 몽우리 진 채로 얼어붙을 지경이 됐다. 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나운 날씨였다.
바깥은 꽃샘추위가 기승이건만, 저택의 이층 방은 온실처럼 그저 따뜻하고 포근하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방의 주인은 지금 몹시 예민한 상태였다. 덕분에 집안의 살림을 책임지는 고용인들은 24시간 내내 방의 온도와 습도, 냄새까지 조금의 거슬리는 부분이 없도록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전 10시가 넘은 시간, 벽에 붙어 있는 커다란 침대 위에는 여전히 이불을 뒤집어쓴 채 누워 있는 이가 있었다.
보드랍고 가벼운 침구가 잠시 버스럭거리더니 그 안에서 뽀얀 얼굴이 빼꼼 나왔다. 알람을 맞추지 않은 탓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늦잠을 잤다.
뭉그적거리며 일어나 앉은 우선경은 아직도 잠이 덜 깬 듯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고 얼굴을 비볐다. 너무 오래 자서 퉁퉁 부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손바닥에 닿은 얼굴은 부기 없이 매끈하기만 했다.
뻗친 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넘기며 목을 좌우로 꺾었다. 몸은 생각보다 가볍다.
이제 좀 컨디션이 돌아오려는 건가, 선경은 벽시계를 흘깃 쳐다보고는 침대에서 빠져나왔다.새하얀 발이 맨바닥을 밟았다. 유백색의 폴리싱 타일은 차갑기는커녕 기분 좋게 따뜻했다.
습관처럼 협탁으로 걸어갔다. 깨끗한 유리잔에 미지근한 물을 따르고 오늘치 페로몬 억제제와 비타민을 함께 삼켰다.
그대로 잠옷을 벗고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할 일이 없어 느긋하게 목욕까지 마치고 나왔다. 욕조에 한참이나 몸을 담그고 있었더니 온몸이 다 노곤했다.
선경은 늘어진 가운 끈을 적당히 여미고, 젖은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기를 수건으로 대충 닦아냈다. 잠은 이미 다 날아갔건만, 하는 짓은 죄다 게으르고 나태하기 짝이 없었다.
머리를 설렁설렁 말리며 걸어가는데 무심코 책상 위에 눈길이 닿았다.
그곳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르고 닳도록 들여다봤었던 유학 자료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영문으로 범벅된 책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경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다.
책자와 프린트물을 모두 모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이제는 미련을 떨쳐내야 했다.
옷을 갖춰 입고 방을 나왔을 땐 어느새 정오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한파가 불어닥치는 바깥 날씨와 다르게 한낮의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는 저택은 안락하고 따스하기만 하다.
우선경은 계단을 밟고 천천히 일 층으로 내려갔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응접실엔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이제 일어났어? 오늘은 기분 좀 어때?”
소파에 앉아서 뉴스를 보고 있던 첫째 우선우가 동생을 발견하곤 곰살맞게 안부를 물어왔다.
그는 리모컨을 들어 TV도 꺼버리고 동생이 있는 방향으로 아예 몸을 돌려 앉았다. 싱글싱글 웃는 표정을 보아하니 걱정하는 말과 달리 놀리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안달 난 것 같았다.
큰형의 의도를 읽은 우선경은 자리를 한 칸 띄워 앉으며 대뜸 인상을 썼다.
“뭐야, 오늘 왜 출근 안 하는데.”
“오늘 공휴일이거든. 하도 잠만 자다 보니 이제 날짜 개념도 없어졌구나?”
“우선경, 여태 잤어? 너 진짜 한량이다. 이제 정신 좀 차리고 살아. 언제까지 집구석에만 틀어박혀 지낼 거야? 아니 뭐 오메가 된 게 죽을병이라도 돼?”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두 사람 분의 잔소리가 되돌아왔다.
신랄한 질책은 둘째 누나인 우재경의 것이었다. 공휴일이란 말이 거짓이 아니었는지 회사에서 한창 일하고 있어야 할 사람들이 전부 집구석에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방에서 나오지 말 걸 그랬지. 선경은 얼굴을 가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선경이 1층으로 내려온 것을 보자마자 주방에서 일하던 광주댁이 부리나케 거실로 달려 나왔다. 안 그래도 아침도 거르고 늦잠을 자는 선경이 걱정돼 억지로 깨워 뭐라도 먹이고 싶었던 참이었다.
광주댁은 젖은 손을 서둘러 앞치마에 닦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선경의 안색부터 살폈다.
“도련님, 잘 주무셨어요? 식사하셔야죠. 닭죽 푹 고아놨는데 지금 차릴까요?”
어릴 적부터 들어오던 푸근한 목소리는 마음을 절로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었다. 엄마처럼 알뜰살뜰 보살피는 그녀의 수선에 선경은 말없이 작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여전히 식욕은 없었다. 소파에 머리를 기댄 채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별로 생각 없어.”
“어제 저녁도 조금 드셔놓고. 아이고, 이를 우짠데… 작은 얼굴이 더 조그매지셨네. 이리 매가리가 없어 가지고 어쩐대요. 과일이라도 좀 가져올게요. 그건 먹을 수 있죠?”
사실은 그것도 별로였지만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쩔쩔매는 광주댁의 면전에 대고 또다시 싫다는 말을 할 순 없었다.
선경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사이 맘이 변할세라 그녀는 재빨리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다.
식료품 창고를 뒤지고, 냉장고를 열고 닫는 소리가 심상치 않게 들려왔다. 아마도 집에 있는 과일이란 과일들은 모두 꺼내 올 요량인 것 같았다.
그 작은 소란을 지켜보던 우재경이 결국 한 소리 했다.
“그냥 밥을 먹지? 하루에 한 끼는 제대로 먹기로 했잖아.”
“아직 저녁 남았어.”
“하여간 말 한마디를 안 져.”
입으로는 신랄하게 말하면서도 가까이 다가와 선경의 얼굴에 손등을 가져다 댄다. 복숭아색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동생의 뺨은 생각보다 체온이 높진 않았다.
여전히 못마땅한 듯 인상을 쓰면서 우선경의 볼을 살짝 쥐었다가 놓아주었다. 사실 누구보다 선경의 상태를 걱정하는 건 둘째 우재경이었다.
어느새 고용인들은 우드 트레이에 먹을거리를 잔뜩 담아와 응접실로 날랐다.
따뜻하게 구운 빵과 손수 만든 과일잼, 클래식한 티팟과 찻잔까지 놓이며 아무것도 없던 소파 테이블이 순식간에 가득 채워졌다.
우재경은 고용인들의 도움을 거절하며 국화차를 세 개의 찻잔에 직접 나눠 따랐다. 뜨거운 김이 퍼지며 향긋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우선우는 앙증맞은 디저트 포크로 딸기를 찍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하게 잘 익은 과일을 볼 한쪽에 밀어 넣고 씹으면서 옆으로 비스듬히 돌아앉았다.
그는 거리를 두고 앉아 있는 막내의 얼굴을 꼼꼼하게 살폈다. 어제와 또 달라 보이는 모습이 신기한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재경에게 물었다.
“선경이 발현한 지 며칠이나 됐지? 한 3주 됐나?”
“어.”
“큰일 났다. 얘 점점 예뻐지는 거 같아. 밖에 안 나가고 잠만 자서 그런가. 피부도 뽀얗고 반질반질한 게. 재경이 너 때는 안 그랬잖아. 알파랑 오메가는 다른가?”
“오빠, 적당히 하고 눈치 챙겨. 우선경 이제 열 안 나. 컨디션 돌아오고 있다는 얘기야.”
그 말인즉, 본래의 성질머리도 되살아나고 있다는 소리였다.
재경의 말을 입증하듯 선경은 눈을 한껏 치켜뜬 채 큰형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디 한 마디만 더 해봐.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에서 속마음이 고스란히 읽혔다.
하지만 우선우는 조금 둔한 편이다.
그는 가장 빨갛고 예쁜 딸기를 골라 포크로 콕 찍었다. 그것을 막내에게 전해 주면서 나름의 위로를 건넸다.
“선경아, 아직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 괜찮아, 형이 그랬잖아. 네가 좀 늦게 발현해서 그렇지 사람들은 다들 너 오메가 될 줄 진즉부터 예상하고 있었다고. 설마 재경이처럼 알파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지? 솔직히 너 그렇게 생겼는데 알파라고 하면 그건 너무 사회적 통념에 어긋나는 일이지 않냐.”
“맞아, 그러고 보니 내 주변에서도 별로 안 놀라더라. 정말 오메가 관상이 따로 있나?”
“…….”
떠먹여 주듯 입가로 포크를 가져다 대도 꾹 다물린 선경의 입술은 열릴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말도 섞기 싫은지 손바닥으로 눈가를 반쯤 가리고 길게 숨을 뱉었다.
형, 누나 사이에 끼어 있으니 오히려 스트레스만 쌓이는 느낌이었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용인에게 자신의 코트를 가져다 달라 말하자 우선우가 대뜸 행선지를 물었다.
“너 어디 가려고?”
“무열이네.”
“야! 밖에 추워, 옷 따뜻하게 입고 가!”
형의 조언은 여전히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우선경은 고용인이 들고 온 두 개의 외투 중에서 더 마음에 드는 것을 집었다.
얇은 캐시미어 코트에 팔을 끼워 넣고, 단추를 대충 잠갔다. 어차피 권무열의 집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날씨가 춥든지 덥든지 별 상관없었다.
광주댁이 애써 차려 준 것은 결국 한 입도 대지 않았다. 배 속은 텅 비어 있었지만 식욕은 돌지 않았고, 마음은 여전히 심란했다.
우선경은 그대로 집을 나섰다.
오늘은 그가 오메가로 발현한 지 20일째 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