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7화 (7/127)

#7

이제 세상은 성별이 아닌 알파와 오메가, 그리고 베타. 크게 세 가지 분류로 사람들을 구분 짓기 시작했다.

과거에도 알파와 오메가라는 특수 형질이 존재하긴 했지만, 그 수가 워낙 적었다. 또한 동물처럼 발정기를 겪는다는 이유로 진화가 덜 된 짐승 취급을 받아왔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들이 가진 형질의 우수성이 부각되기 시작했고 점차 선망의 대상이 되어갔다.

남다른 신체 조건과 뛰어난 판단력, 명석한 두뇌를 갖춘 알파는 사회 각계각층을 이끌어가는 리더로서 두각을 나타냈고, 아름다운 외형과 풍부한 감수성을 지닌 오메가는 주로 예술계에서 명성을 떨쳤다.

태어났을 때는 모두 똑같은 인간일지라도 2차 성징이 나타나는 시기가 되면 자연스럽게 형질이 나뉘곤 한다.

대부분은 베타였고, 알파와 오메가로 발현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이런 희소성까지 더해지다 보니 특수 형질을 가진 이들에 대한 부러움과 관심은 날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선경은 알파와 오메가들에게 딱히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자신은 베타였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거였으니까.

평범한 인생이었으면 몰라도 재벌가 막내아들로 태어난 데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것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누군가를 부러워한다거나 열등감을 느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2월 말, 우선경은 느닷없이 오메가로 발현하고 말았다.

입학을 위한 모든 절차를 마치고, 런던에서 살 집까지 마련해 둔 상황에, 심지어 출국을 이틀 앞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국제면허증을 발급받고 돌아오는 길에 쓰러진 선경은 일주일간 생사를 넘나들며 죽을 듯이 앓았다. 일명 발현열이라고 불리는 고열은 하루에도 몇 번씩 40도 가까이 오르길 반복했다.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숨이 꼴딱꼴딱 넘어갈 지경인데 남자 오메가는 몸에 없던 자궁까지 만들어내야 했다. 내장기관이 뒤틀리는 통증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온몸은 물론이고 입고 있는 옷, 침구까지 식은땀으로 푹 젖었고, 마르지 않는 눈물에 여린 눈가는 벌겋게 짓물렀다.

탈수가 올까 봐 수액을 쉬지 않고 투여했는데 덕분에 오른팔은 기이할 정도로 퉁퉁 붓고 멍으로 얼룩덜룩해졌다. 가끔씩 정신이 들었을 때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아무나 붙잡고 살려 달라 빌었다.

가족들은 이러다 막내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 앓았다. 집에 의료진을 24시간 상주시켜 놓고, 돌아가면서 그의 곁을 지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8일째가 되던 날, 우선경은 겨우 고비를 넘기고 완전히 의식을 되찾았다.

그 뒤로 2주 동안은 꼼짝없이 집에만 머물며 건강을 회복하고 있었다. 달라진 몸에도 적응해야 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도 해야 했다.

컨디션은 제법 좋아졌지만 미래에 대한 고민은 아직도 해답을 찾지 못했다. 선경의 마음이 심란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오메가라는 형질은 우선경의 인생에 많은 부분을 바꿔놓았다.

유학은 없던 일이 되어버렸고, 꿈꾸던 것은 포기해야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집안에서 정해 주는 알파와 계획에도 없는 결혼을 해야 될 수도 있었다.

우선경은 앞으로 자신이 남자를 만나야 하고, 임신도 할 수 있는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적응할 수 있을까. 20년 동안을 베타로 살아왔는데 말이다.

고급 단독주택들이 줄줄이 늘어선 성북동 일대는 부촌으로 유명한 동네였다. 이 집은 어느 회장님 댁, 저 집은 누구 장관님 댁. 어떤 집이든 이름만 대도 알 법한 사람들이 살았다.

어느 이름난 무속인은 옛날부터 이 동네가 유독 잘 풀리는 기운이 넘쳐흐른다고도 했다. 그런 이유 탓인지, 대부분은 최소 2, 30년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았다.

목적지인 권무열의 집은 바로 앞집이었다.

서로 대문을 마주하고 있는 권씨와 우씨 집안 역시 한곳에서 3대째 살아오고 있었다.

함께 산 세월만 몇십 년이다. 유구한 역사와 함께 두 집안은 서로의 가족사를 꿰뚫고 있을 만큼 가깝게 지냈다.

특히나 권무열과 우선경은 같은 해에 태어난 탓에 거의 형제처럼 자랐다.

핏덩어리 시절부터 함께 쪽쪽이를 공유한 거로도 모자라 유치원, 초중고까지 같이 붙어 다녔으니 이보다 더 절친한 사이는 없다고 봐야 했다.

선경은 무척이나 익숙하게 남의 집 현관문을 열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데 멀리서 반가운 얼굴이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얼마나 급했으면 오른손엔 기름기가 반지르르 묻어 있는 분홍색 뒤집개가 그대로 쥐어져 있었다. 그 모습에 내내 우울하던 선경의 얼굴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이모, 저 왔어요.”

“어머, 선경아! 어서 와! 이제 좀 나아졌니? 돌아다녀도 괜찮은 거야?”

“괜찮아요.”

“어쩜 좋아. 애가 그냥 살이 쪽 빠졌네. 이렇게 말라서 어떡한다니…. 안 그래도 보약 한 첩 해 먹여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진맥 받게 조만간 병원에 좀 들러. 아저씨한테 얘기해 놓을게, 응?”

“네, 그럴게요.”

아들 친구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권무열의 어머니는 싫은 티 하나 내지 않는다. 오히려 두 명이나 있는 친아들보다도 선경을 더 애틋하게 대했다. 사실 그녀에겐 우선경 역시 제 새끼나 다름없었다.

늘 소녀 같은 무열의 어머니는 삼 주 전과 비교해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지만, 그녀의 눈에 비치는 선경은 많이 야위고 안쓰러웠나 보다.

다 큰 아이의 뺨을 연신 매만지고 보듬는 손은 따뜻했다. 걱정과 애정이 가득 묻어 있는 게 여실히 느껴질 정도로.

“무열이 있죠?”

하지만 친아들의 이름이 나오자 자애롭던 어머니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인상부터 구겼다. 생각만 해도 분통이 터지는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쥐고 있던 뒤집개가 덜덜 떨렸다.

“내가 진짜 그놈 새끼 때문에 못 살어! 어제도 술 처먹고 새벽에 기어들어 왔어. 너 아파서 누워 있을 때는 병간호한답시고 아예 그 집에 붙어살더니, 지금은 또 학교 신입생 환영회인지 뭔지 한다고 설치고 다녀서 얼굴 못 본 지 한참이야. 방에 있긴 할 텐데 살아는 있는지 모르겠다. 이모 대신 엉덩이 좀 세게 걷어차 줄래?”

“올라가서 한번 봐 볼게요.”

“선경아, 밥 먹을래? 이모가 갈비찜 해 줄까?”

“괜찮아요. 다음에요.”

무열의 어머니는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끄덕거렸다. 그래, 편히 놀다 가.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당부 역시 잊지 않았다.

선경은 제집만큼이나 익숙한 권무열의 집을 맘껏 휘젓고 다녔다.

복층으로 넓게 트인 거실을 가로질러 윤이 나는 원목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오래된 계단은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중간쯤 올랐을 때 선경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본래 집집마다 특유의 생활감이 깃든 냄새가 있는데 이 집에선 늘 씁쓸한 한약재 냄새가 났다. 3대째 한방 병원을 운영하는 집다웠다.

어릴 때는 무열의 집에서 나는 냄새가 쓰고 고약하다며 싫어했었는데, 이제는 약재 냄새만 맡아도 마음이 편안해질 정도로 익숙해졌다.

2층으로 올라간 선경은 나란히 놓인 두 개의 방문 중 오른쪽으로 다가갔다. 그 앞에 서자 문 너머에선 의식의 흐름대로 불러 젖히는 콧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살아는 있나 보네. 선경은 주먹 쥔 손으로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 콧노래가 뚝 끊겼다.

“뭐야, 안 하던 짓 하지 말고 그냥 들어와!”

심드렁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선경이 온 것을 알았는지 놀라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에 가로로 누워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권무열이 보였다. 전날 과음했다는 말이 사실인 듯 안색이 말이 아니다.

얼굴은 무슨 시멘트 반죽을 발라놓은 것처럼 회색빛이 돌았고 눈 밑은 거무죽죽했다. 죽다 살아난 것은 우선경인데, 정작 권무열 쪽이 더 아파 보였다.

“어이, 백수 왔능가.”

그는 선경을 보자마자 입꼬리를 씨익 들어 올렸다. 일어나기는 귀찮은지 누운 채로 손만 까딱까딱 흔드는 모습은 한량과 다를 게 없었다.

“대학교를 술 마시러 다니는 거냐? 등록금이 아깝다.”

“고졸인 새끼가 뭘 안다고. 1학년은 지금이 제일 바쁜 시기란다. 나 요즘 일주일 내내 달렸다고.”

백수니, 고졸이니 말은 이따위로 하고 있지만, 우선경이 발현으로 앓아누웠을 당시 가족만큼이나 걱정하며 옆을 지켰던 게 권무열이었다.

우씨 집안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집에도 안 가고, 학교 수업도 죄다 빠져가며 그렇게 일주일을 머물렀단다.

선경은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고 자연스럽게 침대로 올라갔다. 매트리스 위에 널려 있는 만화책과 쿠션들을 한쪽 구석으로 밀어 넣고 길게 뻗은 침대 주인의 다리를 툭툭 밀쳤다.

무열이 자연스럽게 발목을 꼬며 선경이 앉을 공간을 내어주었다. 혼자 누워 자기에도 빠듯한 슈퍼 싱글이 성인 남자 둘이 앉으면서 꽉 들어찼다.

좁은 곳에 아등바등 붙어 앉아 놓고 특별히 하는 건 없었다.

권무열은 여전히 핸드폰을 조몰락거리며 SNS를 구경했고, 선경은 혼자 팔짱 낀 채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십 분 정도가 지났을 때쯤 무열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영국 유학은 완전히 엎어진 거지?”

“응.”

“너희 할아버지는 오메가 된 게 뭐 큰일이라고 유학까지 못 가게 하시냐. 어쩌려고? 다시 재수라도 할 거야?”

“몰라,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재벌의 삶도 참 갑갑하다. 돈이 많으면 뭐 하냐고. 지 인생인데 뭐 하나 하고 싶은 대로 하지를 못하네.”

반박할 수 없는 평가에 선경은 피식, 웃어버렸다. 단순히 학업뿐인가. 결혼까지도 집에서 맺어 주는 사람과 해야 하는 게 이쪽 세계의 실태다.

“언제는 제발 양자로 받아 달라더니.”

“그건 지금도 그래. 우 회장님만 허락해 주신다면 네 동생으로도 들어갈 수 있어.”

무열은 진지하게 말했다.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리자 농담으로 흘려듣지 말라며 친구의 어깨를 붙잡고 두 번, 세 번 말했다.

선경은 웃으면서 자신에게 읍소하는 무열의 얼굴을 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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