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평소처럼 투덕거리다 보니 심란하던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선경은 뭉쳐진 이불더미 위로 편하게 기대 누웠다.
손끝에 딱딱한 전공 책이 잡혔다. 언론학개론이라고 적힌 두꺼운 책을 끌고 와 펼쳤다. 대충 훑어봐도 온통 흥미 없는 내용만 가득했다.
“학교는 재밌냐?”
“뭐, 그럭저럭? 아직은 사람들 사귀느라 정신없어.”
권무열은 원하던 대로 언론정보학과에 들어갔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한방 병원은 형 권우진이 물려받기로 했다. 덕분에 무열은 자유롭게 제 미래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는 광고 기획자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이래 봬도 머리가 좋고 성실한 편이라 고등학교 때도 상위권 성적을 놓치지 않았다. 명실상부 최고의 명문대라 언급되는 한국대도 단번에 붙은 놈이었다.
하지만 명문대생 역시 똑같은 새내기 대학생이다. 노는 걸 좋아했고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며 친목을 다지느라 학업보다 술자리와 과 모임에 더 집중했다. 시간표는 주 4일로 짰건만 5일 내내 학교를 나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3월은 미팅 성수기다. 권무열은 반드시 올봄 안에 여자 친구를 만들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 그는 건수가 생길 때마다 미팅을 나간다고 했다.
학교를 다닌 지 이제 고작 2주밖에 되지 않은 놈이 미팅은 벌써 3번이나 했다는 소리에 선경은 답이 없다는 듯 혀를 찼다.
“너 정말… 이모가 걱정할 만하다.”
“시끄러워, 공부 그거 쫌 나중에 하면 어떻다고! 나도 좀 놀아야 될 거 아냐!”
“수능 보고 안 논 사람처럼 말하네.”
“안 되겠네. 너 다음에 나랑 같이 학교 가자. 이 몸이 대학 생활이 어떤 건가 몸소 보여 주마.”
허투루 던진 말이 아닌지 권무열은 핸드폰 캘린더를 열어 보며 다음 주 수요일 어때, 아니면 금요일? 하고 날짜까지 정했다.
선경은 무열의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대학교가 어떤지 조금 궁금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갈 수 있는 상황이 못 됐다. 애꿎은 전공책만 탁, 덮었다.
“나 사람 많은 곳엔 가면 안 돼.”
“왜? 아직도 몸이 안 좋나?”
“그게 아니고. …페로몬 조절이 서툴러서.”
제 입으로 말해 놓고도 어쩐지 좀 어색했다. 아직까지도 스스로가 오메가임을 드러내는 게 쉽지 않았다. 어쩌면 부끄러운 걸지도 모른다.
발현한 지 한 달이 채 안 됐다. 달라진 몸에는 이제 겨우 익숙해지고 있었다.
페로몬을 스스로 통제하는 것이 어려워 매일 아침 억제제를 먹고 있는 상황에서 외부 활동이라니. 아직은 시기상조다.
무열은 멋쩍게 콧등을 긁었다.
“아… 그렇구나. 거기까진 미처 몰랐네. 뭐 어때, 괜찮아. 연습하면 금방 컨트롤할 수 있을 거야. 너 우성이라며. 우성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겠지.”
위로를 해 주고 싶어도 권무열 역시 베타라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는 새삼스럽게 또 한 번 제 친구가 오메가라는 것을 인지했다.
아니 대체 그놈의 페로몬이 뭐길래 애가 외출 한번 제대로 못 하냔 말이다. 무열은 괜히 한번 숨을 들이켜 봤다. 당연하지만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순 없었다.
그사이 우선경은 슬그머니 침대를 벗어났다. 옷걸이에 걸어둔 코트를 집어 들고 소매에 팔을 끼워 넣는다.
“벌써 가게?”
“피곤해. 가서 쉴래.”
여기서도 잘만 자는 놈이….
어쭙잖은 핑계를 대가며 돌아갈 채비를 하는 모습에 무열은 괜스레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우선경.”
“왜.”
“어깨 좀 펴고 다녀. 지금 당장은 미래가 깜깜해 보여도 말이야, 어? 인마 너 재벌이잖아! 일 안 해도 평생 먹고살 수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
“자신감을 가지라고, 야, 돈 많고 예쁘면 됐지. 뭘 더 바래! 내가 봤을 땐 너는 손가락만 빨고 있어도 알파들이 좋다고 달라붙을, 악!”
매서운 발길질이 날아왔다. 나름 위로랍시고 던진 말은 효과가 그리 좋지 못했다.
심란한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위용 넘치는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정갈하게 꾸며진 정원이 선경을 맞이한다.
조경사가 혼신의 힘을 다해 관리했을 잔디는 걷는 데 거슬림이 없을 만큼 바짝 깎여 있었다. 신발 밑창에 닿는 느낌도 더할 나위 없이 푹신하다.
관상용 연못과 정원의 중심을 지키는 오래된 노송나무 옆을 지났다. 이정표처럼 이어지는 디딤돌을 하염없이 보고 걷다 보면 어느새 현관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도련님!”
묵묵히 걸어가는 선경을 누군가 다급히 불렀다. 저 멀리 별채에서 머리가 희끗하게 센 남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수족과도 같은 배 집사였다.
우선경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세웠다.
“아저씨.”
“여기 계셨군요. 모셔가려고 본채로 넘어가던 참이었습니다.”
“무슨 일 있나요?”
배 집사의 주름진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자신이 부를 일이 한 가지밖에 더 있겠는가.
“회장님이 급히 찾으십니다.”
***
우씨 집안은 소위 말하는 재벌가다.
증조부가 소소하게 꾸려나가던 건설 회사를 우 회장, 즉 선경의 할아버지가 이어받아 본격적으로 사세를 키워나갔다.
남다른 사업 수완과 나라의 경제 성장이 맞물리면서 회사는 순식간에 성공 가도를 달렸다.
우 회장은 당시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자동차 사업과 유통업으로까지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덕분에 지금은 여러 계열사들을 거느리다 못해 전문 경영인을 둘 정도에 이르렀다.
서화 건설로 시작했던 회사는 어느새 서화 그룹이라 불리며 명실상부 누구나 아는 대기업이 된 것이다.
6남매, 8남매가 흔하던 시절이었지만 할아버지는 슬하에 아들, 딸 단 두 명의 자식만 보셨다. 그중 장남이 선경의 아버지였다.
오메가였던 어머니와 정략결혼으로 만나 가정을 이뤘고, 세 명의 아이들을 낳아 키웠다. 하지만 부부는 아이들이 채 성인이 되기도 전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삼 남매를 도맡아 키운 건 할아버지인 우 회장이었다.
첫째 우선우는 매사에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편이었고, 둘째 우재경은 머리가 좋고 절대 손해를 보지 않는 성격을 가졌다.
그리고 재경과 6살 터울로 태어난 우선경은 유독 심미안이 뛰어났는데, 우 회장은 그것을 ‘잘 팔리는 것을 볼 줄 아는 눈’이라고 평했다.
미술품을 좋아하는 취향까지 할아버지를 빼닮아 어릴 때부터 우 회장의 애정을 독차지하는 아이였다.
부모는 일찍 여의었지만 할아버지의 무한한 사랑과 관심 덕분에 아이들은 부족함 없이 올곧게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둘째 재경이 15살 나이에 알파로 발현했다. 이것은 집안을 발칵 뒤집은 대형 사건이기도 했다.
‘알파’라는 이름표 하나만 달고 있으면 무조건 인정해 주는 사회 아니었던가. 거의 경사와 마찬가지였다.
우 회장은 재경이 알파로 발현되자마자 그녀를 앞으로 자신의 뒤를 이어 갈 후계로 지목했다. 둘째든 여자든 중학생이든 그건 상관없었다. 단지 재경의 미래를 보고 투자한 것이다.
그리고 한참 뒤, 선경이 오메가로 발현했다. 그것도 발현 시기를 한참이나 지난 스무 살에. 이것은 다른 의미로 온 집안이 뒤집어지는 사건이었다.
재경이 알파가 되었을 때와는 반응이 사뭇 달랐다. 사회적으로 높은 대우를 받는 알파와 달리 오메가는 약자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오메가가 가지고 있는 외적인 아름다움에 더 관심이 많았고, 그들을 대상으로 온갖 더러운 상상을 하곤 했다.
더불어 유일하게 특이 형질을 낳을 수 있는 모체로 알려지다 보니 성범죄에 쉽게 노출되는 것도 문제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오메가의 강간, 납치, 성매매 같은 자극적인 뉴스가 보도되곤 했다.
이런 문제점들을 알고 있던 우 회장은 곧바로 선경의 유학을 취소시켰다. 귀한 손주를 혼자 해외에 보낼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할아버지의 명령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사자인 우선경 역시 싫다는 소리 한번 못 해보고 잠자코 현실을 받아들였다.
선경은 돌계단을 밟고 올라섰다. 배 집사가 열어주는 평대문을 통과해 안으로 이어지는 작은 앞마당을 지났다. 길게 이어진 낮은 담장과 먹색의 기와, 그 뒤로 창창히 뻗은 대나무가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을 반갑게 맞이했다.
본가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한옥 별채는 할아버지인 우 회장이 따로 나와 살고 있는 곳이다.
3층짜리 현대식 저택인 본채와 달리 단층의 한옥은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그득하다.
한옥에서 한번 살아 보고 싶으시다는 생각 하나로 지어진 집이었는데 꽤 마음에 드셨는지 아예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지도 벌써 3년째였다.
이 집을 설계한 건축가는 264제곱미터짜리의 한옥이 본인의 인생 최대 역작이었다고 TV에 나와 자랑하곤 했다.
그 집의 주인이 국내 굴지의 재벌 총수라는 이야기까지 더해지면서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언론에 여러 번 언급된 만큼 취재 열기도 뜨거웠지만, 한옥 별채는 단 한 번도 그 모습이 공개된 적 없었다. 본가 안에 꼭꼭 숨겨진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심지어 이곳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가족들과 우 회장이 허락한 손님들, 그리고 소수의 고용인들뿐이다.
신발을 벗고 대청마루에 오르자 드디어 우 회장이 기거하는 별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통창 너머로 훤히 들여다보이는 내실은 고즈넉한 한옥의 외관과 사뭇 느낌이 달랐다. 내부를 채운 가구와 인테리어는 어울리지 않게 현대적이다.
우선경이 온 것을 알아차린 고용인들이 분주히 창을 열어 주었다. 선경은 가볍게 인사하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얼어붙은 뺨으로 데워진 공기가 곰살갑게 달라붙었다. 갑작스럽게 추워진 날씨 탓에 별채는 온돌을 후끈하게 덥히고 있었다.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고용인에게 건네주고 잠시 집 안을 둘러보는데, 안쪽에 있는 접객용 다실에서 여러 명이 대화하는 소리가 언뜻 들려왔다.
먼저 온 손님이라도 계신가? 선경은 무심코 다실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침 손님들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
예상치 못한 만남에 선경은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다. 아… 오늘 일진이 왜 이러지. 하필이면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