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9화 (9/127)

#9

“어머 세상에, 여기서 보네요?”

베이지색 투피스 정장 차림의 중년 여성이 무척이나 달가운 목소리로 인사했다. 뒤따르던 사람들도 우선경을 알아보곤 일제히 멈춰 서서 묵례를 했다.

단체 손님의 정체는 할아버지의 갤러리를 대신 맡아 운영하는 송 대표와 직원들이었다.

송 대표는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한걸음에 다가왔다.

제법 단정하고 소탈하게 차려입었지만 특유의 강한 인상은 쉽게 숨겨지지 않는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매를 최대한 누그러트리며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소식 들었어요. 안 그래도 회장님이 걱정 많으시던데… 그래도 얼굴은 생각보다 좋아 보이네요?”

안타까워하는 목소리와 달리 아이라이너를 두껍게 바른 외꺼풀의 눈엔 흥미가 가득했다.

너 오메가 됐다며? 안타까워서 어쩌니.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뭐 계획은 있고?

표정에선 감추지 못한 속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

안부를 묻는 말에 별다른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흔한 눈인사조차 없었지만 송 대표는 크게 기분 나빠 하지도 않았다.

원래도 살가운 성격이 아닌 거 누가 모를까. 무안해하기는커녕 어깨를 한번 으쓱거렸다.

그녀는 눈앞에 서 있는 까칠한 도련님을 티 나지 않게 스캔했다. 선경의 얼굴과 몸을 면밀히 훑어대는 눈빛은 마치 예술품의 값을 매기는 감정사와 다를 게 없었다.

죽을 고비를 넘겼다더니 살이 조금 빠져 있을 뿐 오메가로 발현하기 전이나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약간 창백해 보이는 얼굴 또한 매력적으로 보일 뿐이다.

바르고 곧은 자세는 기품이 넘쳤다. 피부는 평생 상처 하나 생겨 본 적 없는 것처럼 희고 깨끗하다.

이제 고작 스무 살밖에 안 된 주제에 사람을 내려다보는 게 당연해 보였다. 온몸에서 발산되는 고급스러움은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그의 출신을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조건은 어딜 가도 쉽게 찾아볼 수 없지.

송 대표는 입꼬리가 제멋대로 올라가려는 걸 겨우 참아 눌렀다.

서화 그룹 막내 도련님.

귀하디귀한 우성 오메가.

우선경. 너를 어떻게 해야 비싸게 팔아 치울 수 있을까?

벌써 상류층 결혼 시장엔 그의 존재가 큰 이슈로 떠올랐다. 서화 그룹 우 회장이 가장 아끼는 손주가 하필 오메가가 되었으니 그와 결혼하는 누군가는 큰 몫을 챙길 수 있겠다 싶은 기대감 때문이었다.

심지어 우선경의 얼굴이야 워낙에 유명하지 않았던가. 그가 베타인 것을 못내 아쉬워했던 알파들은 뒤늦은 발현 소식을 듣고 흥분해 애가 달았다.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어 달라며 여기저기서 청탁이 쏟아지고 있었다.

일단 본인을 잘 구슬리는 게 먼저지. 송 대표는 조심스럽게 우선경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은 옷을 괜히 털어 주며 따뜻한 조언을 건넸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어요. 늦게 발현할수록 힘들다던데… 그래도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어.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괜찮은 알파 소개해 줄게요. 뭐, 남자 오메가… 알파들이 선호하는 쪽은 아니긴 하죠. 그래도 선경 씨 정도라면.”

“송 대표님.”

가차 없이 말을 끊었다. 허락도 없이 몸을 만지는 불량한 손도 내쳤다. 선경은 불쾌한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송 대표를 똑바로 쳐다보며 본분을 망각한 행동을 지적했다.

“선 지키시죠. 저희 그렇게 친한 사이 아니잖아요.”

“어머,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내가 뭘 어쨌다고?”

“저한테 신경 쓰지 말고 갤러리나 잘 챙기세요. 전시회 기획하느라 바쁘실 시기 아닙니까? 아, 어차피 아래 사람들한테 전부 맡기셔서 한가하시겠네요. 감 떨어진 지 오래됐다는 얘기는 저도 익히 들었습니다.”

“뭐라고요?”

“오늘도 할아버지께 작품 보여 주시러 오신 것 같은데. 그것도 저기 있는 김큐가 셀렉한 거 아닌가?”

선경이 구석에 서 있던 여자를 턱짓으로 가리키자 벽에 붙어 공손히 손을 모은 채 대기하던 큐레이터가 지레 놀라 고개를 들었다.

노려보는 송 대표에게 자신은 누구한테도 얘기한 적 없다며 항변하는데 그 모습이 되레 입증하는 꼴이 돼버렸다.

우선경은 송 대표의 방식을 진즉에 꿰뚫고 있었다. 그녀가 갤러리를 이용해 상류층 사람들과 교류하고, 필요에 따라 그들을 연결해 주는 커넥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다양한 전시회를 기획하고 총괄하는 데 바빠야 할 사람은 정작 갤러리 운영에 관심이 없었고, 늘 작품을 이용한 돈세탁과 접대, 집안끼리의 성혼에만 정성을 쏟았다.

라움 갤러리가 아직도 업계에서 탑 티어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건 그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유능했기 때문이지 결코 송 대표의 능력 덕분이 아니었다.

선경은 한 발짝 더 앞으로 걸어갔다. 이미 충분히 가까웠던 거리는 서로의 몸이 닿을 만큼 격차가 줄어들었다.

송 대표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선경 역시 똑같이 어깨를 붙잡았다. 살짝 고개를 숙여 귓가에 입술을 붙이곤, 누가 듣지 못하도록 작게 속삭였다.

“우리 송 대표님은 대체 하시는 일이 뭡니까? 알파들한테 오메가 소개나 해 주는 것 말고.”

상대가 발끈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선경은 손에 쥔 어깨를 꽉 움켜쥐고 놓아주질 않았다. 그가 목소리를 낮게 깔며 한 번 더 경고했다.

“제발 본업이나 열심히 하세요. 지금 계시는 자리가 언제까지 영원할 거라 생각합니까. 라움 갤러리 그거 송 대표님 거 아니잖아요.”

“야, 너 말 가려서 해. 이게 어디서 겁도 없이!”

“당신이야말로 적당히 해. 내가 그딴 천박한 뚜쟁이질 놀음에 같이 어울려 줄 것 같아?”

“…….”

“간 보는 것도 사람 봐가면서 하세요. 또 한 번 내 얼굴 보면서 저급한 계획 세우시면 그땐 정말로 험한 꼴 보실 겁니다.”

송 대표는 모욕감을 참느라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부릅뜬 눈으로 우선경을 노려보다 한마디 꺼낼 찰나, 안쪽의 장지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배 집사가 귀신같은 타이밍으로 나타났다. 우 회장이 들을 수도 있으니 더 이상 큰 소리를 낼 순 없었다.

“많이 기다리셨죠. 준비 끝났습니다. 두 분 모두 들어가시면 됩니다.”

할 말을 끝낸 우선경은 다시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손을 탈탈 털어내는 동작마저 여유로웠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잠잠한 표정을 지은 그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 상기된 얼굴로 분을 참던 송 대표는 입술이 잘근잘근 씹어 물며 그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어, 그래. 선경이 왔구나, 이리 와서 앉아 봐라.”

우 회장은 머리가 검을뿐더러 허리도 꼿꼿했다. 눈빛과 목소리 또한 흐트러짐 없이 분명했다. 풍채도 워낙 좋은 데다가 옷 취향까지 젊었다.

밝은 하늘색의 피케 셔츠를 입은 모습은 어딜 봐도 80세가 넘은 노인이라 보기엔 어려웠다. 최근 은퇴를 선언하고 일선에서 물러난 뒤부터는 스트레스도 없이 매일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오늘따라 우 회장은 유독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는 선경을 보자마자 달가운 듯 웃었다. 줄 맞춰 놔둔 손님용 방석 하나를 일부러 제 옆으로 당겨 놓더니 이쪽으로 와 앉으라며 비단 위를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렸다.

우 회장의 요구대로 선경이 걸어와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뒤따라 들어온 송 대표는 그새 표정을 싹 바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 회장의 눈치를 살핀 뒤 일부러 그의 시선이 잘 닿는 곳에 알아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두 사람이 모두 착석하자 우 회장은 기다렸다는 듯 옆에 놓인 그림을 가리켰다.

“송 대표가 오랜만에 좋은 걸 가지고 왔지 뭐냐. 하나 사 보려고 하는데, 네가 좀 골라 보거라.”

“선경 씨가 안목이 참 좋죠.”

“그럼, 얘가 이런 건 기가 막히게 본다고. 지난번에 골라 준 것도 값이 엄청 뛰었잖아. 앞으로는 우리 선경이가 고르는 놈으로만 사 볼까 해.”

할아버지의 이런 요청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자주 우선경을 불러 작품을 함께 봤고, 가끔은 이런 식으로 의견을 물어 즉흥적으로 미술품을 구입하곤 했다.

일종의 테스트였다. 우 회장은 자신의 손자가 얼마나 ‘보는 눈’이 있는가를 시험해 보는 걸 즐겼다.

우선경은 예술에 대해 해박한 지식은 없어도 뛰어난 심미안을 가지고 있었다. 제 눈에 예쁜 것을 고르면 신기하게도 그게 귀신같이 좋은 평가를 받았고 가치가 몇 배는 뛰어올랐다.

“…….”

선경은 무릎 위에 손을 올린 채 두 그림을 차례로 훑어봤다.

하나는 최근 호평을 받고 있는 외국 유명 작가의 미공개 작품이었고 또 하나는 아마도 신진 작가의 것 같았다.

세로가 긴 린넨 캔버스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특별한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호숫가에서 쪽배를 타고 있는 커플의 모습이었다. 다만 섬세한 붓 터치와 밀도 높은 채색에 내내 시선을 뺏겼다.

아마도 마켓에선 이름난 작가의 것이 훨씬 더 비싸게 팔릴 것이다. 원하는 고객이 많아 경쟁도 치열할 테고. 하지만 선경은 결국 이름 모를 신진 작가의 것을 골랐다.

“전 이쪽이 마음에 들어요.”

“들었지, 송 대표?”

“네, 회장님.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했어. 이만 들어가 봐. 내 조만간 한번 따로 찾겠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대기 중이던 갤러리 직원들이 들어와 조심스럽게 그림들을 옮겼다. 오늘 방문의 목적을 이뤘으니 송 대표도 일어나 정중히 인사를 올리며 물러났다.

손님들이 우르르 빠져나가자 이번에는 배 집사가 문을 열어 고용인들을 들여보냈다. 그들은 분주하게 안을 정리했고 차와 간식을 담은 다담상을 날랐다.

소란이 한바탕 지나가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배 집사마저 조용히 장지문을 닫고 나가자 방 안은 무서울 정도로 조용해졌다. 단둘이 남게 돼서야 우 회장은 비로소 사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선경아.”

“네.”

“내가 유학 못 가게 한 것이 섭섭하더냐?”

“…….”

차마 아니라는 말은 나오질 않았다.

우선경은 대신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손에 쥔 찻잔 덕분에 쓴웃음이 지어지는 입가가 가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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