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10화 (10/127)

#10

“그래도 오메가가 된 이상 외국에 나가 살게 할 순 없어. 정 원한다면 일찍 결혼을 해서 나가든가.”

“네, 알고 있어요.”

“송 대표가 하는 말은 신경 쓸 것 없다. 아무리 이 바닥이 집안만 보고 결혼시킨다지만 설마 내가 너를 아무 놈한테나 보낼까. 내 허락 없이는 절대 안 되는 일이야. 쓸데없이 기 싸움 하지도 말고, 그냥 무시하도록 해.”

할아버지가 거기까지 알고 계실 줄은 몰랐다. 놀란 선경은 표정을 숨기는 것도 잊고 눈을 끔뻑였다. 토끼 눈을 뜨고 있는 손주가 귀여운지 우 회장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가 아직 더 할 말이 남았다는 게 생각나 큼큼, 목청을 가다듬었다.

“공부도 꼭 외국 물을 먹어야 되는 건 아니지. 네가 하도 섭섭해하는 것 같길래 내가 손써 둔 게 있다.”

우 회장은 창가 앞에 놓인 낮은 자개장으로 손을 뻗었다. 문갑을 열더니 그 안에서 하얗고 두툼한 서류 봉투를 끄집어냈다.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고 선경의 무릎 앞으로 슬쩍 밀어 보냈다.

“한국에도 미술사학과라는 것이 있더구나, 네가 가고 싶어 했던 곳만큼은 아니더라도 배울 만한 것들이 있을 게야.”

선경은 봉투를 열어 보았다. 안에 담긴 것은 몇 권의 얇은 책들과 서류들이었다.

가장 앞에 있는 책자의 앞표지엔 대학교 로고와 익숙한 조형물이 박혀 있다. 한국대학교 입학 안내서였다.

지금은 3월이다. 신입생 추가 합격은 물론이고 입학 절차가 끝난 지도 한참이 지났다. 이미 수업은 2주차가 진행 중이었다. 심지어 우선경은 수능도 보지 않았다. 대학교를 다닐 수 있는 방법이 없을 텐데… 대체 뭘 어떻게 배운다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안내서 뒤에 있는 서류를 천천히 읽어가던 선경은 ‘청강생’이라 쓰인 것을 발견하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강생이요? 그냥 가서 강의만 들으라구요?”

“원래는 건물 좀 지어 주고 자리 하나 만들어 볼까 했는데 요즘은 기부 입학이 안 된다지 뭐냐. 대신 돈만 내면 수업은 들을 수 있게 해 준다고 해서 4년 치 전공 수업을 싹 다 결제해 뒀지.”

‘청강생’은 정확히 말하면 정식 학부생이 아니었다. 돈을 내고 강의를 듣는 건 가능했지만 학사 학위를 받을 순 없었다.

대신 종강 시 교육 이수증이 나왔다. 물론 취업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요즘처럼 자격과 스펙이 중시되는 사회에선 별다른 이점이 없는 제도였다.

“한국대에서 공부 마치도록 해. 미술사학과 전공 모두 듣고 온다면 갤러리 너한테 바로 내어주마.”

“할아버지!”

“사업하는 데엔 학벌이고 나이고 일절 신경 쓸 거 없어. 어차피 다 능력이야. 그냥 10년 걸릴 거 빨리 받게 됐다고 생각해라.”

“…….”

상상도 못 했던 제안에는 대신 두 가지 조건이 붙었다.

학교를 얌전히 다닐 것.

어떤 구설수에도 오르지 않고 무사히 전공과목을 이수할 것.

“문제 생기면 그날로 학교 그만두고, 갤러리도 영영 못 받을 줄 알어!”

우선경은 뭐라 말을 잊지 못했다. 제 앞날을 할아버지가 결정해 주실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다.

기쁨과 황당함이 뒤섞인 얼굴로 손에 들린 서류만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의 반응을 살피던 우 회장은 여유롭게 찻잔을 들며 물었다.

“표정이 왜 그러냐, 내 제안이 탐탁지 않아서 그러나.”

“아니… 그게 아니고요, 놀라서요.”

원래대로라면 영국에서 대학원까지 마친 뒤 돌아와 갤러리를 물려받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발현으로 모든 게 어그러졌다 생각했는데…

뜻밖의 방법으로 선경은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게 됐다. 최소 4년. 어쩌면 그보다 빨리.

“다른 녀석들이 들으면 섭섭해하겠지만 내가 선경이 너를 제일 아끼는 거 알지? 해 주고 싶은 게 참 많아. 갤러리는 당연한 거고, 번듯한 회사도 하나 넘겨주고 싶었는데 하필 오메가가 되어서는…. 쯧! 대신 남편감은 제대로 골라 오너라. 내가 그놈한테 대신 직함 하나 파 줄 테니까.”

놈이라니, 이미 우 회장은 ‘남자’ 알파를 선경의 짝으로 염두에 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제가 남자랑 결혼하는 거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죽을 고비 넘어가며 힘들게 오메가가 됐는데 무슨 소리야! 당연히 결혼해서 애기 하나는 낳아야지!”

생각이 깨어 있으신 건지, 고지식하신 건지 도통 모르겠다.

허탈하게 웃던 선경은 어딘가 홀가분해진 기분에 숨을 길게 뱉었다. 마음에 끌어안고 있던 짐이 한 덩어리 떨어져 나간 기분이다.

***

4월 중순, 어느덧 완연한 봄이 되었다. 작은 바람에도 연분홍색 꽃비가 휘몰아치던 한국대 명물 벚나무는 어느새 꽃이 다 지고 초록색 이파리로 옷을 갈아입었다.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고 했던가. 설렘에 들떠 있던 학생들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학업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가 오고 말았다. 시험 기간은 예고도 없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카페나 학교 도서관은 늘 공부하는 학생으로 붐볐다. 특히 중앙도서관은 경쟁이 치열했다.

자리싸움에서 밀린 사람들은 공부할 곳을 찾아 떠돌곤 했는데, 요즘 따라 인문대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언제부턴가 시설이 점점 업그레이드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낡은 책상과 의자가 다음 날 새것으로 싹 바뀌어 있다든가, 누리끼리한 색을 띠었던 오래된 냉난방기가 최신식 시스템 에어컨으로 교체되어 있다는 것들 말이다.

심지어 수도 공사라는 명목으로 며칠 막아 뒀던 화장실은 깔끔하게 리모델링까지 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끌었던 건 역시 새롭게 오픈한 커피숍이었다.

무릇 교내에 있는 카페라 하면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을 가진 소규모 점포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인테리어 역시 크게 돈을 쓰지 않았고 터미널 휴게소에 있을 법하게 구색만 겨우 맞추는 정도였다. 하지만 인문대 1층엔 무려 대기업의 프랜차이즈 카페가 들어왔다.

아니 무슨 돈 많은 졸업생이 억대 기부라도 한 걸까? 겉모습은 허름한 외관 그대로인데 속 알맹이는 눈에 띄게 바뀌어 가는 게 신기했다.

깨끗하고, 쾌적하고, 편안하고! 삼박자를 고루 갖춘 인문대는 공부하기 좋은 최적의 장소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달라진 시설과 별개로 말이 나오는 게 또 하나 있었다. 바로 일주일 전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학생이 출몰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눈에 띄는 외형이라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아는 이가 없었다.

신입생도 복학생도 아닌 소속 불명의 학생이었다.

들고 다니는 전공책을 봐서는 미술사학과로 추정됐는데, 정작 그 과 학생들도 누군지 모른다고 했다. 학부생도 아닌데 꼬박꼬박 학교를 나오고 수업을 챙겨 듣는 이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나이는 제법 어려 보였지만 당최 몇 학번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골라 듣는 강의 또한 학년 구분 없이 제멋대로였다.

수업 때마다 출석이 불리는 걸로 봐서는 정식으로 수강하는 학생이 맞는 것 같은데… 결국 알아낸 건 ‘우선경’이라는 이름 세 글자밖에 없었고, 특이하게 전공필수 수업만 골라 듣는다는 것 정도였다.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한 미술사학과 학생들 몇몇이 총대를 메고 학과 사무실을 찾아갔다.

도대체 우선경이 누구냐고 질문하자,

‘아, 그분? 우리 과 청강생이야. 잘 챙겨드려.’

조교는 청강생을 ‘그분’이라 칭했다. 귀찮게 굴지는 말고 옆에서 은근히 챙겨 주라는 말까지 보탰다.

‘진짜 웃겨. 도련님이야 뭐야, 지가 뭐 재벌 4세라도 돼?’

정답을 말한 것도 모른 채 선발대는 투덜거리며 학과사무실을 나왔다. 여기까지 찾아왔건만 고작 얻은 건 청강생이라는 정보뿐이었다.

채워지지 않는 궁금증은 괜한 호기심과 뜬소문만 키웠다.

***

오늘은 서양미술사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강의실을 찾은 우선경은 평소처럼 가장 끝줄 구석 자리에 앉았다.

시장통처럼 떠들썩하던 강의실이 그의 등장과 함께 눈에 띄도록 잠잠해졌다. 학생들은 조용히 눈동자를 굴리며 청강생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깨끗하고 단정한 아이보리색 셔츠에 청바지, 새것 티가 나는 캔버스 운동화는 지극히 평범한 대학생의 옷차림이었지만, 손목에 무심히 채워진 시계는 그 나이대의 학생이 쉽게 살 수 없는 고가의 명품이었다.

게다가 수업이 끝나면 외제 차를 끌고 사라진다는 목격담도 수두룩했다. 주변에 앉은 학생들은 목소리를 죽여가며 저들끼리 의견을 나눴다.

“오메가 맞지?”

“그런 듯.”

“뭔지 몰라도 더럽게 잘 사는 집 자식인가 봐.”

“잘 사는 집 애들은 다 유학 가지 않냐?”

“아니 왜 청강을 하고 다니지? 저거 학위도 못 받는 거라며, 시간 낭비 아니야?”

“한국대 들어올 머리는 안 되는데 다니는 티는 내고 싶은가 보지.”

“돈지랄이네.”

예전에는 나이 지긋하시고 돈 많으신 분들이 어릴 때 못다 한 학업의 꿈을 이룬답시고 청강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고 한다. 지금에 와서는 거의 사라진 문화였다.

누가 학교에 큰 금액을 내고 학위 하나 못 따는 청강 수업을 듣겠는가. 기이한 행동에 학생들의 궁금증은 점점 더 크기를 불렸다.

뒤에서 쑥덕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가끔씩 먼저 용기 내 말을 걸어 보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소문만 무성하신 청강생님은 수업과 관련된 것이 아니면 길게 대화를 섞는 법이 없었다.

네, 아니요, 괜찮습니다, 관심 없습니다.

들을 수 있는 대답은 고작 이런 것뿐이었고 늘 강의가 끝나면 홀연히 떠나, 친해져 볼 계기조차 만들어지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중간고사 다들 잘 보시고. 다음 강의 시간에 뵐게요.”

두 시간짜리 전공 수업이 끝났다. 교수의 끝인사에 선경은 곧바로 노트북과 전공책을 덮었다.

주변에서 뭐라 말을 붙이고 싶어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지만 모른 척 무시하고 짐을 챙겨 일어났다.

누구보다 빨리 강의실을 빠져나가는데, 문밖으로 발을 내딛기 무섭게 팔이 붙잡혔다. 느닷없이 옆으로 끌려가 버린 선경은 너무 놀라 욕지거리를 뱉을 뻔했다.

상대가 권무열인 걸 확인하고서야 급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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