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놀랐잖아! 네가 여긴 왜 있어?”
“모처럼 휴강이라 보러 왔더니만 야박하기는.”
매일 붙어 다니던 고등학교 때와 달리 대학교에서는 얼굴 한번 보기가 힘들었다.
인문대와 사과대의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기도 했고 서로의 시간표가 다르다 보니 각 잡고 약속을 정하지 않는 한 학교에서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아니 뭐, 꼭 학교에서까지 볼 필요는 없잖아? 우선경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 와중에 수업이 끝난 강의실에선 사람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청강생이 학교에서 누군가와, 그것도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신기한지 너도나도 멈춰 서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과도한 관심이 불쾌해진 권무열이 버럭 짜증을 냈다.
“아니 뭐 구경났어요? 사람들이 적당히를 몰라, 그만 쳐다봐요!”
“됐어, 일단 여기서 나가자.”
우선경은 권무열의 팔을 잡아당기며 만류했다. 그는 주변을 향해 왁왁 소리를 지르면서도 선경의 손에 얌전히 끌려갔다.
통로를 지나 계단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계단 역시 강의실 앞과 별반 다를 건 없었다.
훑어대는 시선들이 암만 제게 달라붙어도 우선경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고, 권무열은 여전히 구시렁거리며 큰 눈을 부라렸다.
야차처럼 일그러져 있던 얼굴은 밖으로 나와서야 멀쩡하게 풀렸다. 무열은 질린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늘 이러냐?”
“아까 못 봤어? 동물원 원숭이가 따로 없어.”
“알 만하지. 그런데 뭐 너 좆도 신경 안 쓰잖아. 누가 쳐다보든 말든 상관이나 하냐고.”
중, 고등학교 때부터 관심받는 것엔 익숙했다. 다들 재벌 집 자식은 뭐가 어떻게 다른지 궁금했을 것이다.
아이들은 배려나 체면 따위 없었다. 대놓고 손가락질하며 쳐다봤고, 우선경을 대화 주제로 삼아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어댔다.
그런 일을 하도 겪다 보니 덕분에 얼굴에는 철면피가 둘렸다.
웬만한 시선과 헛소문에는 꿈쩍 않고 버틸 수 있을 만큼 내성이 생긴 것이다. 그때도 권무열은 눈에 쌍심지를 켜가며 귀찮은 날파리들을 내쫓았다.
“보나마나 뻔하지. 너 과 사람들이랑 한마디도 안 하지? 쟤들 네 정체는 아냐?”
“굳이 얘기할 필요가 있어? 난 너처럼 사람 사귀려고 대학 다니는 게 아니야.”
“아이고. 어련하시겠어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자발적 아싸로 다녀라. 좋네! 사고 칠 일도 없고! 야, 이 기세로 가면 3년 안에 끝낼 수도 있겠다.”
오후 1시도 안 된 이른 시간이었다. 중천에 뜬 해는 눈부시게 밝았고, 봄바람은 선들선들 불어와 기분을 달랬다.
기가 막힌 날씨에 감탄하며 권무열은 제 오른팔을 선경의 어깨에 짐 지우듯 걸쳤다.
“밥이나 먹을까? 학식 어때.”
한번 던져 본 말인데 선경의 표정이 좋지 않다.
“표정이 왜 그래. 야, 먹는 거 다 똑같아. 무시하지 마.”
“싫어. 갈 거면 너나 가.”
“까탈스럽긴. 그럼 새꺄, 뭐 먹을지 메뉴는 네가 정해.”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다. 우선경은 핸드폰을 꺼내 갈 만한 곳을 몇 곳 추렸다. 차도 가져왔으니 조금 멀리 나가도 되지 않을까?
시선은 핸드폰에 고정한 채 권무열의 스케줄을 물었다.
“오늘 수업은 끝이야?”
“어. 대신 밥 먹고 시험공부 해야… 아이씨, 맞다! 나 뭐 받아 올 거 있었는데! 우선경, 우리 중도 잠깐만 들렀다 가자.”
“중도가 어디야?”
“중앙 도서관! 금방이면 돼. 5분도 안 걸려! 후딱 다녀오자고.”
싫다는 말을 꺼낼 새도 없이 얼레벌레 끌려갔다. 마침 도서관은 지척에 있었다.
중앙 도서관은 언뜻 봐선 고대 성전처럼 보였다. 그곳으로 이어지는 수십 개의 회백색 계단을 밟고 정상에 올라서면 학교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나름 뷰 맛집이건만 이곳에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들 두꺼운 전공책과 노트를 가방 속에 욱여넣고 불룩해진 백팩을 거북이 등껍질처럼 짊어진 채 건물을 드나들 뿐이다.
도서관 앞에는 공부에 지친 학생들이 잠시 숨 돌리며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놔둔 벤치가 있었다.
우선경에게 잠시 그곳에 앉아 있으라고 말하려던 권무열은 의자에 누워 있는 한 남자를 보고 돌처럼 굳어버렸다.
남자는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에서 쪽잠을 자고 있었다. 얼굴은 캡모자로 덮어놔서 보이질 않았지만 저 체격과 옷차림은 틀림없이….
“저거 우진이 형 아니야?”
눈치 빠른 우선경도 부랑자의 정체를 알아봤다.
확인 사살을 받자 무열은 질색하며 선경의 옷을 잡아끌었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가자, 우린 못 본 거야. 모르는 사람인 척해!’ 신호를 보냈다.
“권무열.”
시체처럼 누워 자고 있던 남자가 무열을 불러 세웠다. 교차된 발목이 까딱 움직였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야. 형을 봤으면서 그냥 가려고 해?”
권우진이 벤치를 짚고 비척비척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얼굴에 덮어놓았던 모자가 땅에 떨어지자 아무렇지도 않게 주워 떡 진 머리에 눌러 쓴다.
우진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했다. 누렇다 못해 꾀죄죄한 얼굴엔 피로가 가득 끼어 있었다.
권무열은 제 혈육이 창피한지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입술을 거의 붙인 상태로 재주 좋게 윽박질렀다.
“아, 진짜 쪽팔리게! 왜 여기서 거지꼴로 있어? 집에 며칠이나 안 들어간 거야?”
“네가 국가고시와 중간고사를 동시에 준비하는 본과 4학년의 마음을 알기나 해?”
“형 꼬락서니를 봐. 지금 어떤 줄 알아? 탄광에서 기어 나온 두더지 같애.”
“시끄럽고. 너 가서 커피 좀 사 와.”
권우진은 왼쪽 엉덩이를 살짝 들추더니 뒷주머니에 꽂아둔 지갑을 빼내 통째로 던졌다. 그걸 또 야무지게 받아낸 권무열은 손에 들어온 지갑을 꽉 움켜쥐었다.
불만은 많은데 차마 터트릴 수가 없어 답답한지, 씩씩거리는 숨만 내쉰다. 그리고 이내 죄 없는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권씨 형제 사이엔 확실한 서열이 존재했다. 게다가 올해 한의사 국가고시를 준비 중인 권우진은 고3 수험생보다 더 떠받들어 줘야 하는 집안 최고 상전이었다.
“한 십만 원 긁어버릴 거야.”
“하여간 말이 조온나게 많아요. 그 소리 할 동안 벌써 다녀왔겠다. 선경이는 왜 그러고 있어. 다리 아프게 서 있지 말고 여기 앉어.”
친동생과 옆집 동생을 대하는 온도가 이렇게나 다르다.
권무열은 욕이 목구멍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걸 꾹꾹 참아냈다. 대신 허공에 주먹질하며 도서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사이 선경은 우진이 내어준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앉았다.
오늘따라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했다. 권우진은 벤치 등받이에 양팔을 걸친 채 느긋이 고개를 꺾었다. 한결 나른하진 목소리로 물었다.
“선경아, 형 많이 추해 보이냐?”
“네.”
“어쩔 수 없어. 이런 식으로라도 광합성을 해 주지 않으면 정말 죽을지도 모르거든.”
한의대생의 삶이란 이런 거야. 한탄에 가까운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그 말에 선경은 픽, 웃어버렸다. 가벼운 웃음소리에 우진은 슬쩍 곁눈질했다. 그의 눈이 자연스럽게 혈색부터 살폈다.
“넌 요즘 어때? 지낼 만해?”
“괜찮아요.”
“다행이다. 그… 별 탈 없이 잘 적응했다는 얘기는 들었어. 고생 많았겠더라.”
눈치 보며 묻는 안부에 선경은 웃으면서도,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이 주일은 본인이 생각해도 참 지겹고 고단한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할아버지의 별채에서 뜻밖의 제안을 받은 그날 이후, 우선경은 학교를 다니기 위해 많은 것들을 준비해야 했다.
가장 먼저 페로몬 전문가를 섭외했다.
앞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려면 스스로의 몸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어야 했다.
이 분야에 있어 최고라는 특수형질과 교수에게 강도 높은 1:1 교육을 받았다. 보통은 자연스럽게 체득해 가는 것을 우선경은 단시간 내에 배워야 했다.
처음엔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페로몬을 통제하는 걸 배웠고, 어느 정도 완벽해지자 다른 형질자들, 특히 알파의 페로몬에 익숙해지는 연습에 돌입했다.
알파의 페로몬에 한 번도 노출되어 본 적 없었던 우선경은 이 연습을 특히 힘들어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적응해서 학교를 다니겠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
악착같은 노력 덕분인지 훈련은 좋은 성과를 거뒀다. 혼자 돌아다녀도 좋다는 진단이 떨어지자, 할아버지도 공부를 시작해도 좋다고 허락하셨다.
그렇게 청강을 시작한 지가 일주일째였다.
시간이 제법 지났다 싶었을 때쯤, 권무열이 도서관 유리문을 어깨로 밀며 걸어 나왔다.
볼일이 있다는 것도 겸사겸사 처리했는지 왼손엔 묵직한 쇼핑백이, 오른손엔 커피가 담긴 캐리어가 들려 있다.
불만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을 하고 벤치 앞까지 걸어온 권무열은 의자 위로 커피와 지갑을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거 살살.”
느긋하게 주의를 준 권우진이 제 몫의 아이스커피를 가져가며 빨대를 입에 물었다.
한 호흡에 커피는 삼분의 일가량이 없어졌다. 카페인을 들이켜자 살 것 같은지 권우진은 크으, 낮게 울리는 신음을 질렀다.
“아우, 역시 커피 포션이 최고야.”
“그럼 우린 먼저 간다, 수고.”
“니들 어디 가. 수업 다 끝났어?”
“어, 우리 점심 먹으러 가려고.”
“와씨, 1시도 안 됐는데 끝이라고? 이것들은 학교 완전 날로 다니네… 하긴, 나도 그럴 때가 있었지. 나도 좋은 시절이 있었어.”
“… 왜 저렇게 혼자 주절거리지?”
권무열은 저 형이 아무래도 공부하다 미친 것 같다며 선경의 팔을 잡아끌었다.
억지로 의자에서 일으켜지던 선경은 권우진의 상태가 영 안돼 보였는지 같이 밥 먹으러 갈 것을 제안했다.
“됐다, 나는 지금 밥보다 잠이 더 급해.”
“아니면 집에 가서 좀 씻고… 한숨 자다 나오는 거 어때요?”
“집까지 또 언제 가. 왔다 갔다 하는 시간에 조금이라도 자는 게 낫지.”
“저 차 가지고 왔는데.”
“진짜? 어디다가 주차했어? 형 지금 바로 갈 수 있어.”
게으른 몸이 잽싸게 일어났다. 권우진은 남은 커피를 쭙쭙 빨아 마시며 가장 먼저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