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12화 (12/127)

#12

캠퍼스 주차장은 대학원생들과 교직원들이 이용하는 게 대부분이다. 겁 없이 치솟는 기름값은 물론이고 유지비에 턱없이 비싼 주차 요금까지, 대학생이 감당하기엔 부담스러운 요소들이 많았다.

조수석에 올라탄 권무열은 좌석 시트를 제 몸에 맞추면서 신기한지 여기저기를 만지고 둘러봤다. 뒷자리 공간이 조금 빠듯했지만 권우진 역시 군소리 없이 벨트를 매고 얌전히 앉아 기다렸다.

아직 새 차 냄새가 가시지 않은 차는 빤질빤질하게 빛이 났다. 우 회장이 선물로 사 줬다는 외제 차는 80세 노인이 고른 것답지 않게 디자인이 매끈하고 섹시했다.

“야, 이거 컨버터블 맞지?”

“그럴걸.”

“대박이다. 회장님 센스 있으시네! 선경아, 우리 한 번만 열어 보자.”

우선경은 별로 내키지 않는지 대답을 아꼈다.

아니나 다를까, 권무열은 옆에서 새끼 강아지마냥 낑낑거렸다. 그 꼴이 보기 싫어 결국 버튼을 눌렀다.

짙은 회색의 외제 차는 변신하듯 분해되며 지붕이 열렸다. 권씨 형제가 세리머니처럼 환호성을 지르자 선경은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리며 천천히 액셀을 밟았다.

그리고 주차 동을 나오자마자 후회했다.

이번만큼은 쏟아지는 시선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차는 속도를 많이 낼 수 없었고, 하필 점심시간과 겹쳐 교내엔 사람이 많았다. 느릿하게 굴러가는 자동차는 옆에서 걸어가는 사람과 속도가 그닥 차이 나지 않았다.

여기가 LA도 아니고 서울의 대학교에서 오픈카라니. 저 관종입니다, 여길 좀 봐주세요! 하고 소리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선경의 손가락이 짜증스럽게 버튼을 연달아 눌렀다. 하지만 주행 중에는 지붕을 닫을 수 없었다. 저 역시 천장을 열어 본 건 처음이라 몰랐다.

권무열은 이럴 줄은 몰랐다며 머쓱하게 웃었다. 뒷자리에 앉아 있는 권우진은 아무래도 상관없는지 설렁설렁 불어오는 봄바람을 만끽하며 여유를 즐겼다.

눈가를 찡그리고 있던 선경이 전방을 주시한 채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거기 좀 열어 봐.”

“어? 어어. 뭐 줄까. 뭐 필요해?”

“선글라스 있을 거야. 그거 꺼내.”

지시가 내려지자 권무열은 서둘러 콘솔박스를 열었다. 가죽으로 된 케이스를 열고 손수 안경을 꺼내 바쳤다.

하얗고 작은 얼굴에 선글라스를 걸치니 한껏 더 화려해졌다. 하지만 외모는 튈지언정 시선이 차단되니 마음은 좀 더 편해지는 장점이 있었다.

우선경은 바람에 날리는 앞머리를 짜증스럽게 쓸어 넘기며 감긴 핸들을 풀었다. 차는 본관 앞 연못을 끼고 빙 둘러 회전했다.

겨우겨우 정문까지 내려왔을 때였다.

뒷자리에 얌전히 잘 앉아 있던 권우진이 느닷없이 얼굴을 돌리더니 운전석 시트를 다급히 두드렸다.

“어? 잠깐만! 선경아 잠깐! 차 좀 세워 줘.”

성화에 못 이겨 차를 길가에 바짝 붙여 댔다. 하필이면 정문 바로 앞이라 통행인이 가장 많은 구역이었다. 마침 정차했으니 뚜껑을 다시 닫아야겠다, 버튼에 손을 뻗으려 할 때였다.

안전벨트에 묶여 있던 권우진이 차 밖으로 얼굴을 쭉 빼낸 채 소리쳤다.

“한지석!”

오픈카에서 외치는 이름 석 자는 온 사방에 울려 퍼졌다.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귀에 이어폰을 꽂고 가던 이름의 주인도 걸음을 멈춰 세울 정도였다.

남자는 깜짝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권우진을 발견하곤 도로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너 여기 왜 왔어? 오늘 쉬는 날이잖아.”

“그냥, 공부나 할까 해서.”

목소리 엄청 좋네.

선경은 귀에 확 감겨드는 부드러운 저음에 솔직한 평가를 내렸다. 저 남자는 목소리가 꼭 악기 같았다. 콘트라베이스처럼 편안하고 묵직하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한지석이라는 남자는 차 옆으로 몸을 바짝 붙여 권우진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우선경은 버튼을 누르려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하자 손을 멈췄다. 이럴 때 지붕을 덮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팔을 차창에 걸치고, 운전대를 가볍게 두드리던 선경은 문득 사이드미러로 시선을 보냈다. 작은 거울에 남자의 상체가 비쳐 보였다.

셔츠와 슬랙스. 그저 평범하고 깔끔한 차림이었다. 하지만 옷 핏만 봐도 넓은 직선의 어깨와 단단한 가슴, 살집 없이 날렵한 허리가 여실히 드러났다.

알파구나. 본능적으로 상대의 형질을 알아차렸다.

접어 올린 베이지색 셔츠 소매 밑으로 힘줄 선 팔뚝이 보였다. 그 아래로 보이는 손 역시 커다랬다.

선경은 저런 남자다운 팔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나한테는 안 어울리겠지? 슬쩍 제 손과 비교해 봤다.

힘줄은커녕 근육조차 없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게 영락없는 오메가의 팔이다.

선글라스를 써서 다행이다. 선경은 눈치 보지 않고 남자의 외형을 훔쳐봤다. 아쉽게도 거울로는 고작 턱 아래까지만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뒤돌아 얼굴을 확인하는 건 자존심이 용납하질 않았다.

“수업도 없는데 공부하러 학교를 나온다고? 이거 진짜 광기네.”

“그러는 넌, 이 시간에 어디 가.”

“나는 동생이 태워 준다고 해서 잠깐 집에 다녀올까 했지.”

“동생? 아, 이번에 입학했다는?”

한지석은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권우진의 동생이 누구인지 확인해 보려는 것 같았다.

물론 우진의 친동생은 보조석에 타 있었지만, 그런 세세한 것까지는 알 리가 없었다. 알파의 시선이 운전대를 잡고 있는 선경의 옆얼굴에 와 닿았다.

어떤 의도도 담겨 있지 않은, 순수한 궁금증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시선이 머무른 시간조차 길지 않았다.

하지만 괜스레 왼쪽 뺨이 따끔거렸다. 선경은 턱을 괴는 척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선경아, 미안한데 나 내려야겠다. 만나기 힘든 친구라서 그냥 보내기가 그러네. 다음에 형이 맛있는 거 사 줄게.”

“괜찮아요. 담에 봐요.”

“미안! 간다. 권무열, 엄마한테는 저녁에 들어간다고 전해!”

“아 몰라, 형이 말해!”

형제의 투닥거림이 짧게 이어지고, 권우진은 차 밖으로 몸을 빼냈다.

그가 내리자 무열은 기다렸다는 듯 버튼을 연달아 눌렀다. 웅장한 소리를 내며 차 지붕이 천천히 올라왔다.

천장이 재조립되는 걸 기다리던 와중에 선경은 룸미러를 흘깃 보았다. 학교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권우진과 한지석의 뒷모습이 보였다. 둘 다 워낙 장신이라 대충 봐도 눈에 띄었다.

“커피를 마셔서 그런가.”

“뭐?”

“아니야, 아무것도.”

평소보다 두근거리는 기분을 애써 무시하며 기어를 풀었다. 여러모로 이목을 끌었던 외제 차는 곧장 정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

학교를 다닌 지도 어느새 3주 차에 접어들었다.

드디어 중간고사가 시작됐다. 청강생인 선경은 시험을 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남들보다 여유로운 주간을 보내고 있었다.

원래는 연강으로 잡혀 있었던 동양화 강의가 시험으로 인해 날아갔다. 자체적 휴강을 하게 된 셈이다. 인문대 건물을 빠져나온 선경은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문득 미뤄 뒀던 일을 떠올렸다.

‘꼭 한번 놀러 와. 알겠지?’

한국대 법학전문대학원에 외삼촌이 다니고 있었다. 전임교수라고 했었던가. 선경이 한국대에서 미술사학 공부를 시작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언제라도 상관없으니 꼭 한번 들르라고 당부를 남겼었다.

같은 학교니까 마음만 먹으면 쉽게 찾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차일피일 계속 미뤄놓고 있었다.

생각난 김에 오늘 가 볼까?

어차피 이후에 할 일도 없었고 무료하기도 했다.

우선경은 어플로 학교 지도를 띄워놓고 대학원 건물을 찾았다. 생각보다 길을 찾는 건 쉬웠다.

법학관 앞에 도착한 선경은 허리를 짚고 잠시 숨을 골랐다. 이렇게 많이 걸어 본 건 오랜만이다. 호흡이 달려 가슴이 씨근덕거렸다.

“같은 학교 맞아? 뭐가 이렇게 멀어.”

한국대의 규모를 너무 얕봤다.

건물과 갈림길만 그려진 조그만 지도와 실제 캠퍼스는 차이가 상당히 컸다.

법학관 건물은 인문대와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있었고, 완만한 언덕길이 쉼 없이 이어졌다. 단순해 보이는 지도를 따라 5개의 학관을 지나치는 데 20분이나 걸렸다.

칙칙하고 낡은 외관을 생각했는데 법학관은 생각보다 화려하고 깨끗했다.

입체적인 구조로 지어진 5층 높이의 건물은 ㄱ자로 꺾인 모양이었고, 정면으로 보이는 외벽엔 투명한 유리창들이 촘촘히 들어차 있었다. 학교라기보다는 새로 지은 정부 청사의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아무래도 로스쿨이 대학교의 이미지에 큰 영향을 미치니, 학교에서도 가장 많은 투자를 하는 듯했다.

안으로 들어와 1층 로비에서 안내 표지판을 찾았다. 교수 연구실은 3층에 있다고 적혀 있었다. 외삼촌에게 전화해 물어보면 쉽게 해결될 일이지만 선경은 일단 닥치는 대로 가 보자 싶어 계단을 밟고 오르기 시작했다.

운이 좋게도 층별 안내판에서 외삼촌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고종환 교수 308호.

제대로 찾아왔나 보다. 연구실 문에는 낯익은 증명사진과 이름이 붙은 현황표가 붙어 있었다. 빨간 화살 표시가 ‘재실’ 칸을 가리키고 있었다. 선경은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예에, 들어오세요.”

안에선 늘어진 목소리가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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