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13화 (13/127)

#13

비좁은 교수실 안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냄새가 났다. 오래된 책에서 나는 특유의 따뜻하고 꿉꿉한 종이의 냄새.

선경은 방 안을 가득 메운 법률 서적들을 보며 이곳이 삼촌의 방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책장은 빈 공간을 찾기 힘들었다. 한 손에 잡히지도 않는 두꺼운 법전과 한자가 난무하는 서적이 가득했다. 그 앞에 놓인 책상에도 비슷한 책들이 두서없이 쌓여 있었다.

외삼촌은 그 무질서한 책상에 앉아 이마를 붙잡고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얼마나 집중을 했는지 본인이 노크에 화답한 것도 잊고 있었다.

우선경이 들어와서 교수실을 다 구경할 때까지도 누군가 자신의 공간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읽고 있던 종이에 첨삭을 적어 넣던 고종환은 방문객이 있다는 걸 깨닫고 아차 싶어 고개를 들었다.

“아, 그렇지. 누가 왔…, 어? 뭐야!”

“바쁘시네요, 교수님.”

그제야 자신을 알아본 외삼촌을 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놀란 종환은 책상 서랍 모서리에 무릎을 찧어가며 급하게 달려 나왔다. 아픈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기어코 앞까지 걸어 나오더니 선경의 팔을 붙잡았다.

“어떻게 된 거야? 아니 연락을 하지! 데리러 나갔을 텐데.”

“그냥 지나가다가 잠깐 들른 거야.”

“귀한 발걸음 하셨네. 나는 대체 언제 오나, 언제 오나. 매일 기다렸는데! 삼촌 연구실은 어떻게 찾았어? 오면서 길 안 잃어버렸어?”

애 취급 하는 소리에 선경이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그런 거 찾아보면 다 나와.”

“이야, 다 컸네. 우선경. 이제 성인 됐다 이거지?”

기특해 죽겠다는 듯 종환이 조카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질색하는 걸 살살 달래가며 벽과 붙어 있는 가죽 소파로 선경을 데려갔다.

소파에 앉은 선경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볼 동안 그는 창가 앞에 놓아둔 커피머신의 전원을 눌렀다.

손님용으로 따로 준비해 두는 머그컵을 꺼내고 정성스럽게 커피를 내렸다. 창문이 모두 닫힌 연구실에 은은한 원두 향이 채워졌다

“지저분하지? 지금 좀 바쁠 때라 정신이 없네.”

“괜찮아, 그냥 얼굴만 보러 온 건데 뭐. 삼촌 바쁘면 가서 일해. 난 커피만 마시고 갈게.”

“쓰읍! 가긴 어딜 간다고. 절대로 안 돼. 오늘 무조건 나랑 저녁 먹어.”

고종환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 오후 스케줄을 확인했다.

오늘은 마침 강의가 없는 날이다. 스케줄 표엔 잠시 뒤 지도해 주는 대학원생과의 면담이 잡혀 있었다. 삼십 분이면 되는 간단한 일정이라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허공을 쳐다보며 잠시 시간을 가늠하던 종환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멜팅 다이닝입니다.

상대방이 밝은 음성으로 인사를 건네자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요청사항을 쏟아냈다.

“안녕하세요. 오늘 5시 30분에 두 명 예약하려구요. 와인 페어링 코스로 부탁합니다.”

그가 예약하는 것을 듣고 있던 선경이 와인 소리에 놀라 쳐다보자 종환은 콧잔등을 찡긋 구기며 웃었다.

선경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연애나 저런 식으로 하지. 조카에게 하는 것 반만 여자 친구에게 했어도 외삼촌은 진즉에 결혼하고 애도 낳았을 거다.

그는 로스쿨 전임교수치고는 나이가 무척 젊은 편에 속했다.

37살. 심지어 미혼이라 선경과 같이 다니면 나이 차가 좀 많이 나는 형제로 보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예약을 마친 종환은 뿌듯하게 웃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깍지 낀 손을 배 위에 올려두고 느긋하게 조카의 얼굴을 바라본다. 자신이 쳐다보는 걸 알면서도 눈 한번을 안 봐주는 게 한결같이 매정하고 새침했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불편한 곳도 없고. 밥도 잘 먹어. 몸무게도 원래대로 돌아왔고.”

요즘 어딜 가든, 누구를 만나든 꼭 듣는 소리였다.

선경은 이제 대답하는 데 도가 텄다. 마치 준비된 대본이 따로 있는 것마냥 이번에도 자동 응답기와 같은 답변이 줄줄 흘러나왔다.

“억제제는? 이제 완전히 끊었어?”

종환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마다 챙겨 먹던 페로몬 억제제는 더 이상 먹지 않아도 됐다. 김 박사는 앞으로는 발정기가 찾아올 때만 먹으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첫 히트 사이클을 겪지 못한 우선경은 이것 때문에 조금 예민해져 있었다. 보통 3개월에서 6개월 주기로 온다는 발정기는 아직까지 소식이 없었다.

그게 꼭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다.

“학교는 다닐 만해?”

“수업 재밌어. 교수님들 강의 수준도 높고.”

“친구는 좀 사귀었고?”

“…….”

우선경은 대답 대신 고개를 홱 돌렸다. 대답하기 싫은 말엔 대놓고 회피하는 게 아직도 어린 티가 났다. 고종환은 바람 빠진 소리를 내가며 웃었다.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시간은 어느새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면담할 학생이 도착한 모양이다. 소파에서 일어난 고종환은 선경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삼십 분이면 끝나. 기다려 줄 수 있지?”

“알겠어.”

문 앞까지 직접 마중을 나간 종환은 자신을 찾아온 학생에게 양해를 구했다. 지금 조카가 와 있는데, 괜찮으면 잠깐 같이 있어도 되겠냐고 묻는 목소리가 선경에게까지 들렸다. 다행히 별 상관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외삼촌 등 뒤로 키가 훤칠하게 큰 남자가 따라 들어왔다.

알아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전공책을 펼치던 우선경은 인기척을 느끼곤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들었다. 상대를 알아본 순간 몸이 멈칫하고 굳었다.

어제 봤던 그 남자였다.

비록 자신이 본 건 고작 상반신과 뒷모습이 전부였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알파의 페로몬은 지문과도 같았다. 얼핏 맡았던 향이었지만 틀림없었다. 게다가 가까이서 보니 알겠다. 그는 우성 알파였다.

“지석아, 거기 잠깐만 앉아 있어. 나 메일 하나만 얼른 보내고 시작하자.”

“네, 천천히 하세요. 교수님.”

예의 바른 청년이 소파에 앉았다. 하필이면 마주 보는 자리였다.

선경이 그를 한 번에 알아본 것과 달리 한지석은 낯선 타인에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지랖이 넓거나 친화력이 좋은 성격이 아닌 건 확실했다.

한지석은 짧게 깎은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에 잠긴 건지 살짝 기울어진 얼굴이 자꾸만 시선을 끌어당긴다.

그 섬세한 윤곽이 의외였다. 선경은 저도 모르게 상대를 깊이 관찰했다.

‘저렇게 생겼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단단한 골격만 봤을 때는 그저 남성스러움이 다분히 묻어나는 얼굴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마치 고전 명화에서 튀어나온 사람 같았다.

색이 바래버린 세피아 톤의 필름처럼 머리카락과 눈썹, 눈동자 모두 부드러운 갈색이다.

앞머리를 넘겨 매끈하게 드러난 이마 아래 툭 불거진 눈썹뼈, 그 아래로 이어지는 우뚝한 콧대와 갸름한 턱선은 남성적이면서도 어딘가 관능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면서 긴 눈매는 꼭 강아지 같은 게… 얇게 쌍꺼풀진 아몬드형의 눈은 꼬리가 살짝 처져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덩치가 저렇게 큰데 보호 본능을 일으킨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지독하게 잘생겼다. 원래 우성 알파들은 다 저런 건가?

너무 대놓고 쳐다본 탓일까. 발밑을 내려다보던 한지석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

강아지 같던 눈매는 어느새 사람을 꿰뚫어 보듯 분명하고 날카롭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죄지은 게 없는 선경은 지지 않고 시선을 맞췄다.

민망해서라도 누구 하나 먼저 그만둘 법도 한데 힘겨루기 같던 눈싸움은 고종환이 돌아올 때까지도 계속됐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 아, 이쪽은 내 조카.”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은 종환은 간단한 소개를 덧붙였다.

“…….”

이제 와서 통성명을 하기에도, 악수를 나누기에도 애매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눈인사만 주고받았다.

“하핫, 이거 꼭 소개팅 시켜 주는 것 같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종환은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서로가 다른 목적으로, 그저 우연히 한자리에 앉아 있었을 뿐인데 앉은 위치 때문인지 정말로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해 주는 자리 같았다.

내내 아무 말이 없던 한지석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조카라고 하셔서 어린 학생일 거라 생각했어요.”

“학생은 맞아. 한국대 다니고 있거든. 올해 스무 살인데, 음… 이걸 신입생이라고 해야 하나?”

종환은 애매하게 말을 늘였다. 학번도, 학년도 없는 청강생을 명확하게 설명하기란 어려웠다.

한지석은 팔짱을 끼며 상체를 반듯이 폈다. 그의 눈가가 묘하게 휘어진다. 세상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외제 차 운전석에 앉아 있던 우선경의 모습이 비로소 떠올랐던 것이다.

“스무 살이면… 어린 거 맞네요.”

“성인 돼서 조금 철이 들긴 했는데 여전히 까칠해, 지금도 도망갈까 봐 붙잡아 둔 거야. 이렇게 안 잡아 두면 같이 밥도 안 먹어 줘.”

외삼촌의 부연 설명에 선경은 질색하며 미간을 찡그렸다. 이제 그만 대화 주제에서 빠지겠다는 듯 거칠게 전공책 페이지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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