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
“안에서 혼자 버틴다고 되는 일 아닌 거 알잖아요. 빨리 해결하고 나갑시다.”
묵묵부답이었다. 한눈에 봐도 자존심 강해 보이던 인상이 떠올랐다. 아마도 끝끝내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지석은 비어 있는 옆 칸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양변기 뚜껑을 닫고 헤드 부분을 밟고 올라선 뒤 칸막이 위를 짚었다.
팔 힘만으로 몸을 끌어올리자 높이를 이겨내고 다리가 훌쩍 들렸다. 한지석은 부실한 칸막이를 그대로 타고 올라갔다.
“좀 비켜 봐요.”
“미쳤어요?”
문을 붙잡고 바짝 붙어 서 있던 우선경은 황망한 낯으로 위를 쳐다봤다. 한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비어 있는 공간으로 뛰어내렸다.
선경은 정말 울고 싶어졌다. 기껏 피해서 도망 왔더니 허락도 없이 침입해 오는 건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혀를 깨물어서라도 이 남자 앞에선 절대 흐트러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지석에게선 더 이상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약 필요한 정도는 아니죠?”
“…….”
“페로몬에 그렇게 약할 줄은 몰랐는데, 교수님께 들었어요. 발현한 지 얼마 안 됐다고. 아마도 그거… 혼자서는 해결하기 어려울 겁니다.”
발기를 에둘러 지칭하는 말에 선경은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같은 성별을 가진 사람이라고 수치심이 안 생기는 건 아니다. 특히나 상대는 발정의 원인이 됐던 사람이다.
한지석의 고개가 살짝 내려갔다. 그는 아마도 선경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거였겠지만 당사자로서는 신경이 쓰이는 행동이었다. 그냥 이 좁은 공간에 같이 있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한지석은 알파인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페로몬을 싹 거둔 상태였지만 아까의 감각이 또렷하게 남아 있어, 그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의식이 될 것만 같았다.
“당장 꺼져요.”
“나도 오래 있을 생각 없습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한지석은 입고 있던 셔츠 단추에 손을 올렸다. 그의 손가락이 지날 때마다 셔츠가 벌어졌다. 목을 지나 가슴 아래까지.
“뭐 하는 거야!”
뜬금없이 옷을 벗는 한지석을 보며 선경은 소리를 지르며 구석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사방이 막혀 있어 갈 곳은 여의치 않았다.
옷을 왜 벗어! 저 새끼 지금 미친 거 아냐? 기겁하는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석은 하나 남은 단추마저 풀어버렸다.
셔츠를 완전히 벗어 던지자 그 안에 입고 있던 하얀 반소매 티셔츠가 드러났다. 얇은 티셔츠는 탄탄한 몸의 윤곽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옷을 입고 있는데도 왜 이렇게 선정적인지, 선경은 저도 모르게 애먼 상상을 하게 되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는 벗은 셔츠를 공처럼 둘둘 말아 우선경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정확히는 코 밑에. 마치 코피를 막아 주듯이 셔츠를 대고 눌렀다.
느닷없이 옷에 처박힌 선경은 버둥거리며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힘이 어찌나 센지 떨어트려 놓기는커녕 단단한 팔에 매달린 꼴이었다. 뒤에선 뒤통수를 붙잡고, 앞에선 셔츠를 누르니 저항도 못 하고 셔츠에 얼굴을 비벼야만 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옷에 밴 한지석의 냄새가 맡아졌다.
“천천히 숨 쉬어요. 집중하고.”
“으읍! 저리 치! 으읏!”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그냥 맡아요. 이런 일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닙니다.”
발정에 가까운 흥분을 푸는 데는 알파의 페로몬이 즉효였다. 특히나 흥분을 촉발시켰던 알파의 것이라면 더욱더. 이 일의 원인이 자신임을 알고 있었던 한지석은 나름 책임을 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도의라고 생각했다.
한지석이 입고 있던 옷에는 그의 체취와 페로몬이 묻어 있었다. 코를 묻고 숨을 들이키면 특유의 짙은 향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아, 이 냄새. 짜증 나. 미칠 것 같아. 선경은 이를 갈면서도 다시 한번 크게 호흡했다. 긴장된 몸이 점차 나긋하게 풀렸다.
반항이 조금 잠잠해지자 그제야 한지석은 강제로 잡고 있던 뒤통수를 놓아주었다.
선경의 손을 잡아 셔츠를 붙들게 하고, 자신은 손을 떼버린다. 별일 없었다는 듯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는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혼자 처리할 시간 10분이면 됩니까?”
“…….”
“밖에 나가 있을 테니까 끝내고 나와요.”
용건은 이게 전부였는지 한지석은 곧장 잠금을 풀었다. 그가 협소한 칸에서 빠져나가자 선경은 단속하듯 재빨리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지석은 지체 없이 화장실을 나갔다. 출입구 문을 닫고 팔짱을 낀 채 그 앞을 막아섰다. 가끔가다 화장실을 쓰려는 사람이 다가오면 다른 층을 이용하라며 내쫓기를 반복했다.
예상했던 10분하고도, 15분이 더 흘렀다.
화장실 출입문이 녹슨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안에선 눈가가 빨개진 우선경이 걸어 나왔다.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한지석과는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몸이 닿는 것을 노골적으로 피하듯 일부러 빙 돌아 나오는 우선경의 손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다행히 흥분은 가라 앉혔는지 선경에게선 그 어떤 페로몬도 맡을 수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끔했다.
하지만 기분이 엉망인 건 확실했다. 한지석보다 먼저 복도를 빠져나간 선경은 교수 연구실로 되돌아가지 않고 계단으로 향했다. 제 짐도 다 놔두고 도망치듯 떠나고 있었다.
“…….”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한지석은 다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에 남아 있는 페로몬이 없는 걸 확인하곤 자신이 열어 두었던 창문까지 꼼꼼히 닫았다.
마지막으로 우선경이 숨어 있었던 가운데 칸 문을 슬쩍 열었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달큰한 냄새 역시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쓰레기통에 처박힌 낯익은 셔츠가 보였다.
끼이익!
급제동이 걸리며 타이어가 바닥을 긁었다. 차는 정지선을 반쯤 넘었고, 신호가 막 바뀐 교차로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춰 섰다. 귀를 찢는 경적 소리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아….”
선경은 운전석 시트 위로 뒤통수를 기댔다. 브레이크를 밟은 오른쪽 다리는 아직도 뻣뻣하게 경직돼 있었다.
딴생각에 빠져 있느라 주위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괜히 운전을 했나. 사고가 안 난 게 다행이다. 혼자 자책하고 있을 때 대시보드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길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
발신자는 보나 마나 외삼촌일 것이다.
그는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조카를 찾는답시고 아까부터 끊임없이 전화를 걸고 있었다.
잠깐 통화하고 설명해 주면 그만인 것을 괜한 울화가 치밀어 외삼촌의 전화를 내내 모른 척했다.
이후로 어떤 정신으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집에 겨우 도착한 선경은 차고에 차를 대충 밀어 넣고 본채로 올라갔다.
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배 집사와 고용인 몇 명이 현관에서부터 대기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선경의 분위기가 어쩐지 평소보다 가라앉아 보였다.
그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배 집사가 고갯짓으로 고용인들을 해산시켰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었다.
“밖에서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김 박사님 좀 불러 주세요.”
느닷없는 부탁에 순간 배 집사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다른 의사도 아니고 김 박사를 부르라니. 이건 형질과 관련된 문제라는 거 아닌가.
“김… 박사님을요? 도련님 몸이 안 좋으신 건가요? 어디가 어떻게요?”
재차 물었지만, 선경은 입을 꾹 다문 채 제 방으로 향했다.
배 집사는 2층으로 올라가는 우선경을 놓칠세라 그 옆을 바짝 따라오며 신중하게 그의 안색을 살폈다.
원래도 하얗던 얼굴이 지금은 핏기 없이 창백하게 질린 게 누가 보더라도 심상치 않아 보였다.
혹시라도 밖에서 무슨 해괴한 일이라도 당한 건 아닐까. 아찔한 상상까지 더해지자 배 집사는 진땀이 다 났다. 제발 우 회장에게 보고해야 할 만큼 심각한 일만은 아니길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지금 바로 연락 넣겠습니다. 다른 것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신가요?”
“없… 아, 학교로 사람 좀 보내 주세요. 외삼촌을 만나고 왔는데 거기다 짐을 다 두고 왔어요.”
“네, 알겠습니다.”
“박사님 도착하시면 불러 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선경은 훌쩍 계단을 밟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배 집사는 이마를 짚은 채 아이고, 소리를 냈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이 상황을 조용히 수습하기 위해선 동분서주해야 했다.
방으로 들어온 선경은 곧바로 옷부터 벗었다. 셔츠와 바지, 젖은 속옷까지 싹 다 구석에 던져 넣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를 틀자 위에서 쏟아지는 미지근한 물이 머리부터 흠뻑 적셨다. 두 손으로 젖은 얼굴을 세수하듯 닦아내던 선경은 짜증스럽게 미간을 찡그렸다.
아직도 그 알파 냄새가 난다.
팔등에 코를 붙이고 숨을 들이켰다. 알몸에 천 쪼가리 하나 걸치지 않았는데도 여전히 묵직한 페로몬이 맴돌았다. 마치 몸에 냄새가 밴 것 같았다.
바디워시를 손바닥에 흘러넘치도록 짜내고 부드러운 스펀지에 묻혀 맨몸에 비볐다.
비누 향 가득한 거품이 한가득 만들어지다 못해 손을 뒤덮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우선경은 열기가 사라진 몸을 강박적으로 닦아냈다.
하얀 거품이 다리 사이에 말라붙은 체액과 코끝에 남아 있는 페로몬을 모조리 씻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