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16화 (16/127)

#16

“일단, 히트 사이클은 아닙니다.”

김 박사는 한참이나 뜸 들이다 말했다. 그의 얼굴엔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름 이 분야의 권위자이건만 환자의 상태에 대해 뭐라 확답을 못 하고 어설프게 진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못내 당황스러운 듯 보였다.

채혈을 끝낸 손가락을 거즈로 누르고 있던 선경은 김 박사의 오른손에 들린 하얀 테스트기를 쳐다봤다.

혈액 속 호르몬 수치로 발정 여부를 판별해 주는 검사 키트는 시간이 지나도록 빨간 줄 하나만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속이 답답했다. 차라리 히트 사이클이 온 거라면 납득하기 편했을 거다.

“발정기도 아니라면 대체 왜 그런 걸까요?”

“그냥 대화 중이었다고 하셨죠? 페로몬 강도도 그리 세지 않았고… 혹시 상대가 우성 알파였습니까?”

“역시 그게 문제가 될까요?”

‘이런 일 한두 번 겪어 본 거 아닙니다.’

문득 한지석이 내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주체할 수 없는 흥분에 당황하던 선경과 달리 그 남자는 당시 무척이나 담담하게 굴었다. 어디를 가도 늘상 벌어지는 일이라는 걸까? 마치 같은 일을 몇 번이나 겪어 본 사람 같았던 태도와 건조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선경은 수치심에 다시 한번 치를 떨었다.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지만, 우성 알파라면 그럴 가능성이 높죠.”

“…….”

“하지만 무조건 단정 지을 수는 없고 다른 부분들도 고려해 봐야 할 겁니다. 우선경 씨와 그 알파가 유별나게 상성이 좋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상대에게 호감을 느낀다면 페로몬에 쉽게 영향을 받을 수 있어요. 발현한 지 이제 고작 두 달밖에 안 되셨잖습니까. 한창 페로몬에 민감할 때입니다.”

김 박사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우선경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묻고 싶은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했다. 눈치를 보며 떠듬떠듬 말을 꺼냈다.

“혹시 그 알파한테 관심이 있으셨….”

“아니요!”

선경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리쳤다.

“진짜 아니에요. 그냥 보면서 잘생겼다고만 생각했어요. 그게 다였다고요!”

“…네, 뭐 그러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나 좀 알려 주세요. 저 이대로는 불안해서 밖에 못 다녀요. 또 이런 일이 생겨선 안 돼요. 박사님도 잘 아시잖아요.”

완벽하게 적응했다 생각했는데, 현실은 달랐다. 아직도 느낌이 생생하다. 알파 페로몬에 휩쓸려 몸이 멋대로 흥분하고 밑이 흠뻑 젖는 느낌은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운이 좋아 별일이 없었다지만 다음에도 잘 넘어갈 수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다.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고, 그 사실이 우 회장의 귀에 들어간다면 갤러리 상속이고 뭐고 우선경의 인생은 끝장날 게 분명했다.

“안 그래도 계속 권하고 싶었던 건데….”

한참을 고심하던 김 박사는 큰 결심을 한 듯 콧등까지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렸다. 선경의 눈치를 한번 살피더니 꽤나 과감한 제안을 던졌다.

“혹시 알파에게 페로몬 샤워를 받아 보실 생각 있습니까?”

“페로몬 샤워요?”

“폐쇄적인 공간에서 알파가 오메가에게 페로몬을 들이붓는 겁니다. 그것을 일정 시간 동안 참아내는 건데, 일반적으로 히트 사이클 주기가 불안정한 열성 오메가나 페로몬에 민감한 오메가들에게 권하는 단기 치료 방법이에요.”

“…일부러 흥분시킨다는 건가요?”

“보통은 발정이 날 때까지 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우선경 씨의 경우엔 그 직전에 멈춰야겠죠. 좀 무식한 방법이긴 해도, 이런 식으로 자극을 반복해 주다 보면 알파 페로몬에 대한 적응력이 높아지게 될 겁니다. 발정기가 오지 않는 이상 웬만한 알파 페로몬에는 무감해지겠죠.”

다소 위험하고 파격적이긴 했으나, 결과만큼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우선경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할게요.”

***

마음은 오늘 당장이라도 시작하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준비 과정이 복잡했다.

가장 먼저 페로몬 샤워에 동참해 줄 알파를 찾는 것부터가 급선무였다. 김 박사에게 다시 연락이 온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은밀한 훈련은 병원이 아닌 본가에 있는 서재에서 진행됐다. 아무래도 조금이나마 편하고 익숙한 곳에서 하는 게 심리적 부담이 덜했다.

상대는 27살의 알파였다. 미리 읽어 본 프로필에 따르면 해외에 거주 중이며 현재 일 때문에 잠시 한국에 체류 중인 한국계 프랑스인이라고 했다.

서로 다정하게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시간 내내 묵언 수행을 하며 버티는 것도 곤욕스러운 일이다.

어색한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눈치를 살피던 알파가 결국 불편한 기류를 견디지 못하고 먼저 말문을 열었다.

“서재가 멋지군요.”

“원하시는 책 있으시면 꺼내 보셔도 돼요.”

“제가 글자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요. 대신 눈으로 즐길게요.”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거든요, 서재를 두루 훑던 헤이즐넛 색의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우선경을 눈에 담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선하게 웃는 모습과 달리 알파에게선 진한 페로몬이 넘실 흘러나왔다.

“혹시 거북하거나 그러진 않나요?”

“아직까진 괜찮네요.”

조금 얼굴이 달아오르는 감은 있었으나, 흥분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우선경은 시계처럼 채워진 심박수 측정기를 확인했다. 역시나 수치는 안정적이었다. 아직까지는 수월하게 버틸 만했다.

“이런 식으로 페로몬을 쏟아 보는 건 처음이라, 저는 좀 많이 어색하네요.”

되레 상대방이 얼굴을 붉히며 손부채질을 했다. 오메가 앞에선 늘 페로몬을 신경 쓰고 주의를 기울이는 게 일종의 에티켓이었다.

오메가를 자신의 페로몬으로 적셔놓는 행위는 대부분 상대를 유혹할 때나 침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적어도 이런 공개적인 곳에서 하기엔 남부끄러운 행위였다.

“좀 어때요?”

한 시간쯤 지났을까. 옆방에서 대기하던 김 박사가 들어와 상태를 물었다.

“괜찮아요.”

너무 멀쩡해서 문제랄까.

김 박사를 붙잡고 자신을 고쳐 놓으라며 사정했던 게 민망해질 정도로 변화가 미미했다.

“좋아요, 그럼 농도를 조금 더 높여 보겠습니다.”

김 박사의 요청에 알파는 페로몬의 밀도를 차츰 높여갔다. 농탁한 알파의 페로몬이 전신에 감겨왔다. 이제는 숨만 쉬어도 진하게 느껴질 정도다. 선경은 숨을 고르며 잠시 눈을 감았다.

이상해. 그때의 느낌이 아니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첫 페로몬 샤워는 허무하게 끝났다.

두 시간 동안 온몸이 푹 절여질 정도로 페로몬을 뒤집어썼건만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뭔지 모를 찝찝한 기분만 남았다.

몸을 깨끗이 씻고, 옷도 갈아입은 뒤 다시 서재로 돌아오니 이미 자리는 깔끔하게 정리된 뒤였다. 알파는 돌아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서재에 홀로 남아 노트북을 두드리며 기록을 남기고 있는 김 박사에게 다가갔다. 기척을 느낀 김 박사가 허리를 곧게 펴고 이리 와서 앉으라며 의자를 끌어왔다.

“어떠셨어요? 생각보다 괜찮았죠?”

“잘 모르겠어요, 박사님. 이게 과연… 저한테 맞는 방법일까요?”

뭔가 불만족스러워 보이는 우선경과 달리 김 박사는 싱글벙글한 낯이다. 지적 욕구로 충만해진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첫술에 배부를 수야 없죠, 오히려 저는 상당히 흥미로웠는걸요. 보통의 오메가였으면 이미 히트 사이클이 오고도 남았습니다. 우선경 씨의 페로몬 방어 기제는 이미 충분하다는 소리겠죠. 다만 기존에 경험했던 발정의 원인을 찾아내긴 해야 할 겁니다.”

“뭐든 좋으니 확실하게 교정됐으면 좋겠네요.”

“제일 좋은 건 그때 그 알파를 섭외하는 방법이겠지만….”

슬쩍 눈치를 봤다. 우선경은 어렵다며 완강하게 고개를 젓고 있었다. 아쉬움에 김 박사는 쩝, 입맛을 다셨다.

“일단은 앞으로 몇 번 더 시도해 보죠. 오늘은 맛보기로 경험해 봤다 치고, 다음에는 조금 바꿔 볼게요. 최대한 상황을 그 당시와 비슷하게 맞춰 보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김 박사는 조건에 맞는 알파를 찾아보겠다는 말과 함께 다음 약속일을 잡았다.

***

학교는 여전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잘 다니고 있었다.

도망치듯 대학원 건물을 빠져나왔던 날, 외삼촌에게는 뒤늦게 전화를 걸어 피치 못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베타인 삼촌은 본인이 너무 배려가 없었다며 지나칠 정도로 미안해했다.

한지석과는 그 이후로 마주칠 일이 없었다.

하긴 이 넓은 캠퍼스에서 접점도 없는 두 사람이 만날 확률은 희박하다. 심지어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공부하는 데 투자하는 로스쿨생이었다. 틀어박혀 책만 파는 사람을 마주치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게 평범한 일상이 지속되던 어느 날이었다.

우선경에게도 대학 생활 최대 주적이 찾아왔다. 운 좋게 시험은 패스할 수 있었지만 청강생도 조별 과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중간고사 끝난 지 얼마 안 됐는데 과제를 내줘서 미안합니다. 그래도 할 건 해야겠죠? 최근 진행 중인 전시회의 기획 의도와 셀링포인트를 파악해 오세요. 발표는 이 주 뒤 1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아아악!”

“하하하! 너무 괴로워들 말고, 이번 건 재미있을 거예요. 자세한 건 조교가 이어서 공지해 줄 겁니다. 그럼 다음 강의 때 봅시다!”

예? 팀플이 재밌다고요? 교수님. 농담이 지나치신데요.

학생들의 원성에도 교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허허실실 웃으며 강의실을 떠나자 대기하고 있던 조교가 앞으로 나섰다.

말린 쭉정이 같은 몰골을 하고 터덜터덜 걸어 나온 조교는 의욕이라곤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로 공지문을 읽었다.

“예에…, 조 편성은 교수님이 이미 짜 주셨고요. 명단은 앞에 붙여둘게요. 확인하시고… 조 바꾸실 분들은 내일까지 가능합니다. 학사로 찾아오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메뚜기 떼처럼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 나갔다. 단상 위에 붙여진 작은 A4용지 앞으로 머리와 어깨가 다닥다닥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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