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1조 어딨어요!”
“3조! 3조 이쪽으로 모이세요!”
먼저 명단을 확인한 사람들이 소리쳤다. 몇몇 유별난 이들이 손을 번쩍 쳐들며 인간 깃발을 자처하고 있었다. 시장 바닥처럼 북적이던 단상 앞은 명단을 확인한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조를 찾아가며 차츰 정리되기 시작했다.
단상 앞에 아무도 서 있지 않게 됐을 때가 돼서야 우선경은 그 앞으로 걸어가 자신의 이름을 찾았다.
5조 - 안석현. 우선경. 윤봄. 홍재영.
하나같이 낯선 이름들이었다.
“저기….”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손길에 뒤를 돌아보니 어정쩡하게 모여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 혹시 5조…?”
선경의 물음에 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침묵이 흘렀고, 어색한 눈동자들이 분주하게 굴러갔다.
우선경은 곤란한 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먼저 물었다.
“제가 조별 과제는 처음이라 아무것도 몰라서요. 어떻게 하면 되나요?”
“음, 처음이니까 역할 나누고 간단하게 계획 세우면 될 거 같아요. 일단 어디 자리를 잡아야 할 텐데….”
대답해 준 단발머리의 여자애는 그나마 낯이 좀 익었다.
과대라고 했었던가? 몇 번 나서서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선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돌아봤다.
평소와 달리 수업이 끝난 강의실은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미 삼삼오오 모여 조별 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 모습은 흡사 도떼기시장과 같았다. 수십 개의 입이 모여 떠드는 소리로 머리가 왕왕 울렸다.
선경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선 뭘 해도 귀에 안 들어오겠네요. 저희 1층에 있는 카페 가서 할까요?”
“예? 아, 네! 좋아요!”
조원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질 못하며 화답했다.
사실, 문제의 청강생이 한 조에 묶인 걸 확인하곤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하던 참이었다. 먼저 나서서 얘기를 꺼내 주니 그저 고맙고 신기할 따름이다.
그 투명한 반응에 선경은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제가 자발적 아싸를 자처하긴 했어도, 사회성이 모자란 건 아닌데. 아무래도 이미지가 단단히 잘못 심어진 모양이다.
“가요, 내가 살게요.”
우선경은 일부러 눈매를 곱게 접으며 강의실 문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노트북을 넣은 가방을 추슬러 메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 조원들은 뭐에 홀린 듯 그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나섰다.
***
“1학년 과대를 맡고 있는 윤봄입니다. 스무 살 베타예요.”
“저는 안석현이라고 합니다. 스무 살이고요, 오메가예요!”
“홍재영, 스물한 살. 재수했고 베타입니다.”
우연인지 아니면 교수님의 의도가 담긴 건지 몰라도 한 조로 묶인 조원들은 모두 1학년이었다.
하나같이 뒤에 형질을 붙여가며 인사하길래 듣고 있던 선경도 머뭇거리다 제 소개를 했다.
“우선경입니다. 스무 살. 오메가… 입니다.”
아, 역시. 자기소개를 들은 조원들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간 입소문으로만 떠돌던 청강생의 신상이 이제야 제대로 파악되는 순간이었다.
점심시간도 훌쩍 넘긴 애매한 시간이건만, 카페는 제법 사람이 많았다.
역시 다른 학부에서도 일부러 찾아오는 핫 플레이스다웠다. 겨우 남는 테이블 하나를 사수할 수 있었다. 둥그런 원탁은 아무리 봐도 2인용 같아 보였지만 다른 곳에서 의자를 빌려와 어떻게든 끼어 앉았다.
좁은 테이블 하나에 서로의 무릎이 닿을 정도로 옹기종기 붙어 앉았다. 음료를 놔두기에도 빠듯한 상판 위엔 조장인 윤봄의 노트북만 대표로 올라왔다.
이제 겨우 자기소개가 끝났을 뿐인데 벌써 할 말이 떨어진 듯 서로 눈치만 봤다.
그 와중에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안석현이라는 녀석은 같은 남자 오메가라는 것에 무슨 연대감이라도 느끼는 건지 헤실헤실 풀어진 얼굴로 선경을 바라본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선경은 카페를 둘러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아악, 이대로는 안 되겠어. 나 어색한 거 못 참아!”
참다못한 윤봄이 머리를 헝클며 소리를 질렀다.
“우리 같은 과인데 그냥 편하게 말 놓을까요? 그쪽도 엄밀히 말하면 동기나 마찬가진데.”
“맞아요! 그동안 수업도 계속 같이 들었잖아요. 저희 셋은 같은 학번이라 이미 잘 알거든요. 군기 잡을 선배도 없는데 우리끼리 그냥 편하게 해요.”
“그래, 뭐가 됐든 빨리 좀 하자. 나 4시까지 아르바이트 가야 해.”
“…….”
다들 이렇게 수다스러운데 어떻게 참아왔던 걸까.
윤봄의 말을 시작으로 너도나도 한마디씩 거들더니 일제히 우선경을 쳐다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여기서 어떻게 싫다는 말을 할 수 있으랴.
“저도 괜찮아요.”
“좋아, 그러면 후딱 끝내 볼까?”
윤봄은 노트북을 펼쳤다. 뺨으로 흘러내린 단발머리를 귀 뒤로 꽂아 넣더니 야무지게 손을 풀었다. 목을 좌우로 꺾는 모습은 다소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일단 주제부터 정하고, 역할 분담하자. 혹시 가 보고 싶었던 전시 있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이 손을 들었다. 발언권을 얻은 안석현과 홍재영은 앞다투어 가고 싶은 곳을 줄줄이 불렀다.
이미 과제는 뒷전이다. 사심을 가득 담은 전시회 리스트가 끝없이 이어졌다. 윤봄은 손가락을 부지런히 놀리면서 받아 적었다.
이번 조별 과제가 재미있을 거라는 교수의 망언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과 특성상 대부분 학생은 갤러리나 미술관 투어를 좋아하는지라 팀플을 싫어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약간 즐기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신기했던 선경은 구태여 말을 보태지 않고 조용히 대화를 구경했다.
“우선경 너는? 가고 싶은 곳 없어?”
너무 참여가 없었던 탓일까. 윤봄이 타자 치던 손가락을 멈추고 선경을 콕 찍어 질문했다.
우선경 역시 전시회를 좋아했다. 유명한 미술관은 물론이고, 개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갤러리나 작가전도 자주 찾을 만큼 관심이 많았다.
최근에 라움에서도 특별전이 시작됐다는 얘기도 얼핏 들었지만 제 앞가림하는데 바빠 신경을 끊고 살았다.
이참에 한번 가 볼까도 싶었지만, 굳이 제 신상을 드러내는 모험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묻어 가기로 했다.
“난 어디든 괜찮아. 알아서 정해.”
“혹시 다크룸은 어때?”
안석현이 작년 초부터 인기를 끌고 있는 전시회를 언급했다. 극단적인 어둠을 100분 동안 경험해 보는 감각 체험형 전시였는데 데이트 코스로도 자주 언급될 만큼 주목받고 있었다.
외국의 유명 작가 초청전도 아닌데 이렇게 대중적으로 성공한 전시회는 흔치 않다. 인기를 얻는 요소를 세심하게 뜯어내 보는 것도 재밌어 보였고 무엇보다 과제 주제와도 딱 어울렸다.
하지만 얘기를 듣던 윤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나중에 PPT 짤 때 분량 채우기 너무 힘들어, 전부 까만 사진만 넣을 순 없잖아.”
“쟨 뭐 다 안 된대….”
안석현의 눈썹이 팔(八)자 모양으로 축 처졌다. 오동통한 아랫입술도 쭈욱 밀려 나오고 볼도 바람이 들어가 빵빵해졌다.
바로 앞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꼭 무슨 살아 움직이는 다람쥐를 마주하는 것 같았다. 오메가들은 원래 이렇게 애교가 많은 걸까? 남자임에도 새삼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른쪽에 앉아 있던 홍재영은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는 회의가 답답한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텐션이 없는 나무 의자는 등받이에 실린 하중에 힘겨워하며 삐그덕 소리만 날 뿐 뒤로 젖혀지지 않는다.
알바 시간이 다가오는지 손목에 찬 시계를 흘낏 살폈다. 캡모자 챙을 들어 올린 그가 눌린 머리를 헝클며 윤봄을 향해 제 의견을 던졌다.
“뽐, 솔직히 이것저것 따지다 보면 갈 수 있는 곳 아무 데도 없어. 우리 그냥 안전빵으로 메이저 가자.”
“메이저 어디? 오빠 라움 얘기 꺼내면 죽는다?”
“라움 갤러리? 거기 특별전 말하는 거지? 안 그래도 그저께 내 친구 다녀왔는데 눈뽕 제대로 맞았대. 확실히 돈이 많으니까 큐레이션 퀄리티가 넘사벽이라더라.”
홍재영의 말에 윤봄과 안석현이 각자 한 마디씩 얹었다.
라움?
저들의 대화 속에 들리는 낯익은 명칭에 우선경 역시 귀를 쫑긋 세우게 됐다.
“라움 좋지… 그런데 거길 어떻게 가냐구요.”
“왜 못 가는데요?”
우선경은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세 사람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 아! 선경은 자신의 존댓말 때문에 그런 줄 알고 다시 정정해 물었다.
“아 미안, 왜 못 가는데?”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얼굴이었다.
윤봄은 약간 서글퍼졌다. 에휴, 이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이라니, 겉만 번지르르하지 아무것도 모르는구만. 대체 어디서부터 알려 줘야 하나.
윤봄은 나긋한 목소리로 차분히 현실을 짚어 주었다.
“잘 들어. 라움 특별전은 상설전이랑 다르게 관람객마다 도슨트가 붙어서 설명해 줘. 그래서 한 번에 입장할 수 있는 관람객 수가 정해져 있어. 이미 티켓은 오픈 첫날 다 팔렸고. 지금은 뭐 가고 싶어도 못 가.”
“거기가 원래 그렇게 인기가 많았었나?”
“걔네 특별전 자주 안 하잖아. 한번 열리면 규모가 크기도 하고. 이번에 이 악물고 준비했다는 소문까지 돌아서 그런지 더 난리더라.”
“흐음.”
설명을 듣던 우선경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자주 안 열리긴 했다. 마지막이 지난가을이었으니 거의 반년 만이었다.
뭘 얼마나 이 악물고 준비했길래 이 정도일까, 흥미가 동한 선경은 턱을 괸 채 잠시 생각에 빠졌다.
“라움으로 가자.”
“내 말 귓등으로 들었어? 무슨 재주로 거길 가. 이미 매진이라니까.”
“티켓만 구하면 되는 거잖아.”
“뭐야? 너 구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