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조원들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저건 그냥 던지는 허세가 아니야. 쟤라면 정말로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묘한 기대감이 일렁이는 와중에 우선경은 무심하게 핸드폰을 꺼냈다.
연락처 목록에서 익숙한 이름을 누르고 문자를 입력했다.
[혹시 특별전 티켓 4장 구할 수 있을까요. VIP용 말고 일반으로요.]
문자를 보낸 지 몇 분 되지도 않아 수석 큐레이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우선경은 최대한 통화음을 죽이고 전화를 받았다.
“네.”
-안녕하세요, 김주원입니다. 요청하신 티켓 날짜는 언제로 해드릴까요?
“잠시만요.”
선경은 핸드폰을 가슴 아래로 끌어내렸다.
“날짜 언제가 좋아?”
“진심이야?! 이렇게 쉽게?”
“싫으면 다른 곳으로 가도….”
“아니! 완전 좋거든? 무조건 갈 수 있어!”
“빨리 날짜 정해! 나는 다 괜찮아! 수업 빠지고도 갈 수 있어!”
“혹시 주말도 되는 거야? 아, 그건 너무 염치없나?”
흥분한 조원들은 갈피를 못 잡고 저들끼리 난리를 치느라 바빴다.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선경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알아서 결론을 내렸다.
“오픈티켓도 가능한가요?”
-네, 준비해서 오늘 성북동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통화는 용건만 간단히 주고받고 끝났다.
아무렇지 않게 핸드폰을 다시 테이블 위로 내려놓는데,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들이 심상치 않았다.
선경은 별일 아니라는 듯 제 앞에 놓인 머그잔을 들어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럼 이제 장소는 정해진 거지? 나머지 또 뭐 정하면 돼?”
“우선경 대체 정체가 뭐야? 너… 라움 갤러리랑 뭐 있어?”
“뭔데 전화 한 통에 티켓이 뚝딱 나와?”
머그잔 뒤로 표정을 숨긴 선경에게 추궁이 이어졌다. 정체를 깔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재벌이라는 것을 밝히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장단점이 분명했다.
일단 집안 배경을 알게 되는 이상 사람들의 대접이 달라진다. 어떻게든 잘 보이려 애썼고, 떠받들어 주고, 밑도 끝도 없이 추종자가 되기도 했다.
단점은 그만큼 원치 않는 주목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밥을 먹거나, 수업을 듣거나, 심지어 그냥 숨만 쉬고 앉아 있어도 수십 개의 시선이 따라붙는다.
심심풀이 땅콩처럼 타인의 이야깃거리가 되는 건 기본이고,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구설수에 오른다. 숨이 턱턱 막히는 일이지만 그렇게 태어났으니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행인 건 20년을 겪다 보니 이제는 어느 정도 면역이 생겼다는 점이다.
역시… 아직은 좀 이른 감이 있지.
“할아버지가 투자를 좀 많이 하셨어.”
거짓말은 아니잖아. 선경은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눈썹을 으쓱거렸다.
***
갈 곳이 정해지자 회의는 급물살을 탔다. 조원들은 빠르게 역할을 나눴고 전시회 방문 일정을 잡았다.
서로의 강의 시간표와 개인 일정을 고려해 약속은 금요일 오후 4시로 정해졌다.
우선경은 라움 갤러리 티켓을 구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발표와 PPT 작성에서 제외됐다. 말로만 듣던 무임승차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아르바이트가 있다던 홍재영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회의는 얼추 마무리가 된 상황이라 나머지 조원들도 슬슬 짐을 챙겼다.
헤어지기 전 윤봄은 우선경을 붙잡았다. 과제를 위해 연락을 해야 되니 번호를 알려 달라 청하는데,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선경은 순순히 과대의 핸드폰에 자신의 연락처를 찍었다.
“금요일에 보자.”
우선경의 핸드폰 번호까지 따낸 윤봄은 이제 정말 볼일이 없다는 듯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남겨진 이는 이제 둘. 선경이 슬쩍 몸을 돌리자 끝까지 옆에 남아 있던 안석현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선경아, 집으로 갈 거야?”
“응.”
“나는 동방에 가 보려구. 너는 차 가지고 다니지? 어디 주차장에 댔어?”
안석현의 동아리가 있는 학관과 선경이 차를 세워 둔 주차 동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를 동행하는 내내 안석현은 참새처럼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중간고사를 어떻게 안 볼 수 있지? 청강생은 원래 그런 거야?”
“안 보는 게 아니라 못 보는 거야. 시험 볼 자격은 없거든.”
“그래두… 히잉, 부럽다. 시험만 없어도 학교 다닐 맛 날 텐데.”
안석현은 쉬지 않고 종알거렸다.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동아리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 선배라는 것들이 어찌나 호되게 군기를 잡는지, 또 최근에 한 미팅은 얼마나 별로였는지까지 말해 주었다.
감정이 어찌나 풍부한지 한 호흡의 말 속에 기쁨과 슬픔. 즐거움이 다 담겨 있을 때도 있었다.
혼자서 열심히 떠들어대는 통에 선경은 듣는 역할만 해 주면 됐다. 편하긴 했지만 오늘 통성명을 나눈 것치곤 지나치게 사적인 정보들이 흘러들어왔다.
자신의 이야기를 이토록 거리낌 없이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게 무척 신기하고, 낯설었다.
“너는 내가 편한가 봐.”
“응! 우리 과에 남자 오메가라고는 너랑 나 둘뿐이잖아.”
학교에 오메가가 없는 편은 아니지만 대부분 예체능 계열에 집중돼 있었다. 오죽하면 미대와 음대 건물엔 방향제가 필요 없다는 말까지 나돌까.
하지만 인문대, 특히 미술사학과엔 오메가가 드물었다. 학년을 통틀어 총 5명. 그중에 남성체 오메가는 안석현과 우선경뿐이었다.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친해지고 싶었어.”
“친구 많던데. 나랑 왜 굳이.”
“그야 예쁘니까! 선경이 너처럼 예쁜 사람은 처음 봤거든!”
안석현은 흥분한 아이처럼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립서비스가 아니라 진심이라며, 강조해서 말했다.
누군가한테서 예쁘다는 말을 듣는 건 여전히 적응이 안 됐다. 뭐라 대답해야 될지 몰라 선경은 말을 아꼈다.
아무리 그래도 남자한테 할 소리는 아니지 않나? 눈살을 찌푸리며 싫은 티를 내자 석현은 또 배시시 웃는다. 악의 없는 순수한 웃음이라 더 기가 찼다.
“…정말 뭐라 해야 될지 모르겠다.”
한숨과 같은 혼잣말에 안석현은 다시 옆으로 가까이 붙어왔다. 우선경의 빠른 보폭에 맞추느라 걸음이 뜀뛰듯 껑충거렸다.
“진짜 농담 아니고 옆에서 지켜보는데 다가가고 싶었어. 너는 뭔가 특별해 보였거든. 물론 외적인 것도 있지만 특히 분위기가 말야! 네가 아무리 혼자 다녀도 전혀 외로워 보이지 않았어. 자존감이 높아 보인달까. 오히려 반짝거리더라고. 아마 그래서 더 눈길이 갔던 것 같아.”
“너도 충분히 특별해. 남과 비교할 거 없어.”
“흐응, 그 말도 맞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 아까워. 내가 만약 너였다면 이렇게 조용히 학교 다니지 않았을 거야.”
“조용히 안 다니면 뭘 할 건데?”
“글쎄, 잘생긴 알파들 한 번씩 다 만나 봐야겠지?”
“뭐?”
하겠다는 게 고작 그거야? 한심한 대답에 선경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왜, 뭐가 어때서! 너 한국대 알파 수준 얼마나 높은지 아냐? 다른 학교까지 소문이 자자해.”
“퍽이나. 그런 거 들어 본 적도 없어.”
“한지석도 몰라?”
순간 멀끔한 얼굴이 스쳐 갔다.
흔한 이름인가? 그렇겠지. 설마 수많은 사람이 다니는 한국대에 같은 이름 하나 없을까.
“…무슨 과야?”
“대학원생! 로스쿨 2학년. 전공도 섹시하지?”
하지만 아무래도 선경이 떠올린 사람과 안석현이 말하는 한지석은 동일 인물인 듯싶었다.
“거봐, 역시 알지? 아는 얼굴이야.”
“왜 네가 우쭐해지는 건데? 그 사람이랑 뭐라도 돼?”
“아니 그건 아닌데, 선경이 네가 자꾸 모르는 척하니까….”
핀잔을 들은 안석현은 기죽은 목소리로 대꾸하며 괜히 땅을 한 번 걷어찼다. 떼쓰는 아이처럼 신발 앞코로 땅을 후벼파느라 잠시 뒤처졌지만 우선경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안석현은 이내 벌어진 거리를 잽싸게 따라붙으며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다시 탱탱하게 기가 살았다. 아기 새는 다시 조잘거렸다.
“뭐 어때. 한국대 다니는 사람 중에 한지석 모르는 사람 없을걸? 우성 알파에 인물 좋지, 인성 좋지. 미래도 보장돼 있어. 심지어 집안도 빵빵해! 아버지가 대법원장이시래. 정말 다 가지지 않았냐?”
“…인성은 그닥 좋은 것 같지 않던데.”
“무슨 소리야! 지석 선배가 얼마나 친절한데!”
우선경은 멋대로 화장실 안으로 들어와 셔츠를 벗던 무례한 남자를 떠올렸다.
‘내 실수도 있으니 책임지려는 겁니다.’
그게 친절함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단 말이지? 제 페로몬에 흥분한 오메가를 달래 준답시고 멋대로 침입하고, 옷을 벗어 주는 게?
누구한테나 그렇게 해 준다니 값싼 친절이 따로 없었다. 그런 놈을 좋다고 추앙하는 안석현도 이해할 수가 없었고.
하지만 애써 내색할 필요는 없었다. 선경은 알겠다는 듯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네 취향이 그렇다는데. 잘해 봐.”
“잘해 볼 것도 없어. 그 선배는 여자 오메가만 만날걸? 아무튼, 내가 너라면 좀 더 즐기겠다는 얘기야. 나중에 관심 있으면 우리 동방에 놀러 와! 내가 사람들 많이 소개해 줄게!”
“그래, 봐서.”
안석현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주차 동까지 순식간에 도착했다.
***
약속했던 금요일이 왔다.
만나기로 한 시간이 되려면 아직 한참이 남았건만 갤러리 정문 앞엔 기대에 찬 얼굴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들 제가 가장 먼저 왔겠거니 생각했는데, 그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이 있는 걸 보며 손가락을 치켜들고 낄낄 웃었다. 그만큼 설레는 날이었다.
손에는 이미 닳도록 들여다봐 너덜해진 팸플릿이 들려 있었다. 물론 소장용은 따로 챙겨뒀다.
역시 돈이 많으니까 이런 무료 홍보지도 고급스러운 종이를 쓴다며 감탄하기도 했다. 조원들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이번 전시에서 가장 기대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우선경 왜 안 오는 겨, 카톡도 안 읽네?”
“설마 못 오는 건 아니겠지?”
물주께서 안 오신다면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설마 그러겠어. 조원들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입구로 이어지는 굴곡진 대리석 계단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빨리 저 아래에서 흠 없이 잘난 얼굴이 나타나 주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