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시간은 더디게만 흘렀다. 날씨가 좋았으니 망정이지 초조하게 기다리다 망부석이 될 지경이었다.
그렇게 정각이 가까워졌을 무렵, 시간에 딱 맞춰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매끈하게 잘 빠진 검은 세단 뒷좌석에서 우선경이 내렸다.
조원들이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손을 흔드는데도 힐끗 쳐다보고 말 뿐이다. 평상시보다 조금 더 각 잡고 차려입은 그는 셔츠의 소매를 탁탁 펴가며 느긋하게 계단에 올랐다. 누가 도련님 아니랄까 봐 내딛는 걸음걸이조차 곧고 반듯했다.
계단 끝까지 올라오고 나서야 그는 고개를 까딱 흔들며 인사했다.
“안녕.”
“아니 넌 대체… 왜 카톡을 안 봐. 우리 다 말려 죽일 생각이야?”
“어차피 곧 얼굴 볼 텐데 뭐 하러.”
4시 됐네, 들어가자.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무심히 앞장서는 우선경의 손엔 전시회 티켓 4장이 들려 있었다.
다들 홀린 듯 티켓만 바라보며 그의 뒤를 졸졸 따랐다.
“즐거운 관람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나이 지긋한 손님들에 섞여 들어오는 풋풋한 대학생들에게 갤러리 직원들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평소보다 더 밝게 웃고 친절하게 응대를 해 준다. 물론 그 무리에 포함된 VIP를 의식해서였다.
모두가 우선경의 얼굴을 알아봤지만, 미리 지시를 받은 탓에 알은 척을 하는 직원은 없었다. 보통의 손님에게 하듯이 눈이 마주치면 가벼운 눈인사만 건넬 뿐이었다.
특별전이 열리는 제1갤러리는 라움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곳이었다.
미로처럼 엮이는 내부 구조도 특이했지만 무엇보다 이 전시 공간은 여러 층을 하나로 터놔 층고가 매우 높았다. 입구 초입에 걸린 대형 설치 조형물이 초반부터 시선을 압도했다.
갤러리에 처음 와 보는 사람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공간감에 압도되어 혀를 내두르곤 했다.
“진짜 끝내준다. 우어….”
“우리 저쪽부터 보자!”
전시회의 컨셉이고 뭐고, 오늘 이곳에 온 목적은 입장하는 순간 날아갔다. 조원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작품에 홀려 정신이 나가버렸다.
우선경은 걸음을 늦춰 그들과 살짝 거리를 벌렸다. 다소 흥분한 녀석들은 선경이 뒤로 빠진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느새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자유로워진 선경은 홀로 유유히 걸음을 옮기며 내부를 둘러보았다.
전시 공간을 지루하지 않게 채우는 것은 오로지 큐레이터의 기획 능력에 달려 있었다.
게다가 라움처럼 규모가 큰 곳이라면 전시회에 여러 명의 작가들이 참여하게 되는 만큼, 화풍이 다른 작품들을 컨셉에 맞춰 짜임새 있게 배치하는 것이 중요했다.
다행히 라움 갤러리에는 실력 좋은 큐레이터들이 포진돼 있다.
비록 갤러리의 실권을 가진 대표는 운영에 별로 관심이 없을지언정, 실질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들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열정과 노력을 고스란히 갈아 넣은 덕분에 갤러리는 늘 최고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악물고 준비했다던 특별전은 확실히 볼거리가 많았다. 트로피칼 무드라는 제목과 어울리게 생동감이 넘치는 작품들이 가득했다. 그중에는 선경의 눈길을 끄는 것도 더러 있었다.
그림 앞에 서 있는 선경의 옆으로 반듯한 정장을 차려입은 여성이 다가와 섰다.
입장객 옆에 붙어 작품을 설명해 주는 도슨트가 주위에도 여러 명 있었으나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을 유지했다.
한참이나 옆자리를 지키던 수석 큐레이터에게 먼저 말을 붙인 건 우선경이었다.
“송 대표님은 저 온다는 거 모르시죠?”
“네, 부탁하신 대로 보고드리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정기적으로 참석하시는 모임이 있으셔서 오전에 일찍 퇴근하셨구요.”
“모임이라… 뭐 대충 알 만하네요.”
아직도 상류층 뚜쟁이질은 포기하지 못한 모양이다.
“준비하느라 고생하셨겠네요. 평이 좋던데요.”
“별말씀을요. 그게 저희 일인걸요.”
“저는 김 수석님이 계셔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부디 오래 일해 주세요.”
제가 대표로 올 때까지 남아 줬으면 했다.
뒤에 말은 차마 내뱉지 않았지만, 김주원은 의미를 눈치챘는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우선경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하고 답했다.
“그러고 보니 친구분들과 오신 건 처음이시네요. 요청하신 사항들을 봐서는… 신분은 일부러 감추고 계시는 모양이죠?”
“아직 아무도 몰라요. 수석님도 모르는 척해 주셔야 돼요.”
“얘기 안 하실 생각이세요?”
“굳이 떠들고 다닐 필요 있나요. 뭐 언젠가는 알게 되겠죠.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고.”
일주일, 길면 보름 정도? 딱 그 정도를 예상하고 있었다.
“깜짝 놀라겠네요, 미술사학과면 대부분 취업도 이쪽일 텐데. 아, 그러고 보니 저희 팀에도 한국대 출신들이 몇 명 있어요. 괜찮으시면 친구분들께 소개해 드릴까요? 온 김에 만나서 이야기 나눠 보면 좋은 경험이 될 텐데.”
“그거 너무 과한 특혜 아니에요?”
“특혜가 아니라 투자죠. 미래의 인재 영입을 위한 포석을 깔아둔다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김 수석은 담백하게 자리를 떠났다. 또각거리는 구두굽 소리가 멀어진다. 김주원은 손가락을 까딱이며 직원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홀로 남겨진 선경은 그림을 좀 더 구경하다 자연스럽게 코너를 돌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화랑을 걸었다. 눈이 편안한 조도와 완벽한 온습도가 마음에 들었다.
철저하게 관객 수를 조정해서인지 북적거림 없이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작품 옆에는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은 사이즈로 판매 완료 표시가 붙어 있었다.
언뜻 보면 고급스러운 포장지를 두른 미술관 같지만 이곳은 엄연히 상업적인 공간이었다.
내걸린 그림들은 모두 상품이었다. 도슨트는 친절한 접객 매너와 해박한 지식으로 작품에 대해 설명하며 관람객의 구매 욕구를 돋운다.
아무래도 공간이 너무 크다. 좀 더 그림에 집중할 수 있게 분리되는 것도 좋을 텐데. 아예 건물을 다시 지을까. 내걸린 작품보다 겉 포장지에 주목하며 선경은 바쁘게 눈을 돌렸다.
그러다 생각지도 못한 그림을 발견했다. 그곳엔 얼마 전 할아버지가 구입하셨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쪽빛 호숫가에서 배를 타고 있던 연인들. 그 앞에 홀린 듯 멈춰 선 우선경은 작가 이름을 소리 내 읽었다.
“Alain Minjo Chartier.”
“민조가 한국 이름이에요. 아무도 불러 주지는 않지만.”
어느새 옆으로 바짝 붙어선 남자는 제법 유창한 한국어로 속삭였다. 노래하듯 말하는 깊은 목소리와 물씬 풍기는 아로마 향이 익숙했다.
옆을 돌아본 선경은 놀란 듯 바짝 굳어버렸다. 그는 얼마 전 서재에서 만나 페로몬 샤워를 도와줬던 알파였다.
화가였을 줄을 꿈에도 상상 못 했다. 심지어 이게 그의 작품이라는 것도, 아니 그보다 한국어가 왜 이렇게 능숙해?
많이 놀랐는지 큰 눈을 껌벅거리는 우선경을 보며 알렌은 머쓱해져 이마를 긁었다.
“그런 반응이면 좀 민망한데요.”
“아, 죄송해요. 전혀 예상 못 해서.”
“미술계에 알파가 좀 드물긴 하죠. 다들 놀라긴 해요.”
그는 충분히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뒷짐을 지고 자신의 작품을 내다보는 모습은 제법 작가다웠다.
서재에서 봤을 때는 조금 무기력해 보였던 얼굴이 지금은 물을 머금은 화초처럼 생생하게 피어올랐다. 확실히 본업을 대할 때 더 활기가 도는 타입인가 보다.
“제가 제일 아끼는 작품이에요. 크기는 작지만 완성하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죠. 누가 주인이 될까 항상 궁금했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우선경 씨가 사 줘서 더 만족스럽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저희 할아버지가 사신 거죠.”
“우선경 씨가 골랐잖아요.”
도무지 외국인답지 않은 어휘와 완벽한 발음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누가 샀는지 확인하러 페로몬 샤워도 지원한 건가요?”
“인정하면 너무 변태 같을까요?”
그는 맞다는 말을 에둘러 전했다.
“라움에서 연락을 받고 한국에 와서 전시회 준비하는 동안 우선경 씨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요. 도움이 필요하다는 얘기에 고민하던 차에 당신이 ‘몽베르트의 연인들’을 구입했다는 것도 알게 됐죠. 라움 갤러리와 연관돼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그날 저택에 왔을 때였고요.”
“모든 게 다 우연이라는 얘기군요.”
“인연일지도 모르죠.”
우선경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알렌의 시선은 그림이 아닌 선경에게로 향해 있었다. 갈색과 녹색이 오묘하게 섞인 헤이즐넛 색의 눈동자에는 명백한 호감이 담겨 있었다.
“언젠가는 당신이 운영하는 라움을 만날 수 있는 건가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기대할게요, 아마도 지금보다 훨씬 더 멋질 것 같거든요. 부디 그때도 함께할 수 있길 바랍니다.”
알렌은 악수를 청했다. 쭉 뻗어 나오는 오른손을 외면하기란 어려웠다.
손을 겹쳐 잡으니 따뜻한 온도와 적당한 악력이 전해져왔다. 두어 번 흔들고 놓으려는데 상대가 손을 놔주질 않았다.
“그날 인사도 못 하고 떠난 게 내내 아쉬웠어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오늘 나랑 저녁 먹는 건 어때요?”
더 이상 모른 척 받아 줄 수 없었다.
“같이 온 일행들이 있어서요.”
“꼭 오늘이 아니더라도 괜찮은데. 이번 달까지는 한국에 있을 계획입니다. 듣기로는 이탈리안 음식 좋아하신다면서요, 제가.”
“작가님. 죄송하지만.”
선경은 얼굴 가득 대외용 웃음을 지었다.
“저 아무하고나 같이 밥 안 먹어요.”
하지만 밥 한번 같이 먹기 힘들다는 우선경은 지금 조원들에게 붙들려 한국대 앞 먹자골목에 와 있다.
나는 왜 여기 와 있는가. 여긴 대체 어딜까. 기껏 한남동에서 모였으면서 왜 학교 앞까지 꾸역꾸역 되돌아온 것인지 당최 모를 노릇이었다.
태어나서 택시도 처음 타 봤다.
기사를 불러 따로 이동하겠다고 해 봤지만, 어딜 내뺄 생각이냐며 강제로 붙잡혔다. 캐릭터가 그려진 주황색 택시에 몸을 실었다. 남자 셋이서 팔과 허벅지를 맞붙인 채 체온을 나누는 경험은 평생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